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이르는 대표적 학자이자 문신(文臣)을 이야기할 때면, 으레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 야은 길재(冶隱 吉再, 1353-1419) 그리고 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1396)... 이렇게 세분이 제일 먼저 거론되곤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세분의 호가 모두 '은(隱)'자로 끝나서, 보통 이 세분을 함께 묶어서 3은(隱)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학창 시절에 열심히 이들 세분의 이름과 호를 외웠던 기억이 새롭다.
이번 글에서는 이 세 분 가운데 이색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그것은 군산을 거쳐 아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천 땅을 거치면서 이색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문헌서원(文獻書院, 서천군 기산면 서원로)을 들렸기 때문이다.
## 둘째 마당: 문헌서원
이색 선생의 학문적 업적이 워낙 뛰어나셨던 관계로 조선팔도에 당신을 배향하는 서원은 많다. 그러나 규모면에서나, 정통성 면에서(당신의 묘가 문헌서원 옆에 있다.) 문헌서원을 따라올 곳은 없다고 봐야 한다. 아, 문헌서원은 이색 선생뿐만 아니라 한산 이씨 명조 선현 8위를 제향하고 있는데, 1611년(광해군 3년)에 문헌(文獻)이라고 사액을 받았다.
문헌위치는 아래 사진을 참조하면 되는데,
29번 국도에서 한산과 서천을 연결하는 지방도로 접어들면,
삼거리길에 문헌서원으로 가는 방향을 가리키는 석비가 보인다. 그리고 이곳에서 비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문헌서원을 만나게 된다.
문헌서원 주차장에서 만나는 문헌서원 안내판.
요즘 지방자치단체마다 앞을 다투어 만들어내는 '~길'이란 것이 있는데, 서천은 '천년 솔바람길'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지방의 소도시를 돌아다니는 경우 종종 숙박시설이 여의치 않다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는데, 이러한 사정은 서천 또한 마찬가지이다. 물론 서천의 경우 바닷가 쪽에 펜션들이 있기는 하지만, 호텔과는 느낌이 좀 다르다. 그래서 나는 상대적으로 호텔 사정이 좋은 군산을 들러 놀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서천으로 넘어 들어오는 방법을 택하여 서천 땅을 돌아다니고 있다. 그런데 만약 서천만을 둘러보는 여정이라면, (나와 같은 방식을 택할 수는 없고) 문헌서원 바로 앞에 있는 '문헌전통호텔'에서 1박을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문헌전통호텔 전체의 외관인데, 이만한 외관을 가진 호텔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주변도 한량없이 고즈넉하고.
객실의 모습인데, 상당히 운치가 있다. 계단을 올라 댓돌에 신발을 벗어놓고 마루에 오른다는 것, 요즘 같은 시대에는 맛보기 힘든 것이 되어버렸는데, 문헌 전통호텔이라면 그런 재미를 맛볼 수 있다.
숙박료 등 보다 자세한 것은 아래사진, 또는 문헌서원의 홈페이지(http://m.munheon.org)를 참조하면 되는데, 화장실과 욕실사정이나 수건 구비 여부 등을 체킹해 두는 것이 좋다.
아, 믄헌전통호텔에서 머무는 경우 호텔에서 식사를 해결할 수도 있다. 다만, 이곳에서 식사를 하기 위하여서는 사전예약이 필수이다.
문헌전통호텔을 지나서 문헌서원으로 가는 길 오른쪽으로 동상이 하나 보이는데, 바로 이색 선생의 동상이야.
그리고 홍살문이 보인다. 그렇다면 홍살문 너머부터가 문헌서원이라는 것인데,
홍살문 오른쪽에 하마비(下馬碑)가 보인다. 공부하는 곳에 대한 배려. 아무리 급한 일로 말을 달려 나갈 때에도 이곳에서는 말에서 내려야 했다. 말발굽소리가 행여 공부하는 이들의 집중력을 흩트려 놓으면 안 되니 말이다. 이런 것을 보면 학교 앞에서도 클랙슨을 울려대는 요즘의 운전자들은 정말 반성해야 된다.
문헌서원 이색 선생의 묘를 비롯한 당신 일가의 묘들과, 수많은 전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그 규모가 상당하기 때문에 문헌서원을 수박 겉핥기 수준에서라도 둘러보려면, 다음과 같은 안내 팜플렛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팜플렛에 따르면, 문헌서원의 기원은 가정 이곡(稼亭 李穀, 1298-1351)과 목은 이색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1575년(선조 8년)에 효정사(孝靖祠)를 짓고 배향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아, 가정 이곡, 이 분은 이색 선생의 아버님이신데, 이처럼 부자가 공히 학문적 위업을 이루는 경우는 참 쉽지 않을 터인데...
문헌서원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아래 사진 속의 내용을 읽어 보기를...
문헌서원 전체의 모습인데, 이 정도 규모의 서원은 전국적으로도 그리 많지 않다.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받은 9개 서원 가운데에도 (전각수나 부지면적 등과 같은) 규모면에서는 이 정도에 이르지 못하는 서원들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위 사진에서 보듯이 홍살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이렇게 석비(石碑)가 줄지어 서있는데, 한자가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적혀 있어서 그 내용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석비가 6개이다 보니 그를 마주치는 순간 서원구지(書院舊誌)에서 만났던 "서원철폐령에 의해 서원이 훼손될 때 그 자리에 단(壇)을 세우면서한산 향현사에 제향되던 ‘한산 6군자(현암 이종덕, 어성 신담, 남강 이임, 과묵당 홍미, 복천 강학련, 지족당 권양)’을 함께 제향하였다"는 기록이 생각났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 석비들이 한산 6군자와 관련 있는 것 아닌가?라는 발칙한 상상을 하게 되었고.
그러고 보니 오른쪽에서 세 번째 비석은 문양공 현암 이종덕(文襄公 玄巖 李種德, 생몰미상)의 효행비이다. 아, 문양공 이종덕은 이색 선생의 장남인데, 이분도 문과에 장원급제를 하셨다. 하여튼 이색 선생의 집안, 공부에는 뛰어난 재질을 가졌다.
홍살문을 지나니 오른쪽으로 멋진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사진 속에 보이는 정자의 이름은 경현루(景賢樓)인데... 만약 경현루를 보며 어디서 본 듯하다...라는 느낌을 받았다면, 당신은 드라마 매니아라고 자처할만한 하다. 이곳이 바로 '구르미 그린 달빛'의 촬영지이니 말이다.
다른 쪽에서 바라본 정원. 나무그늘이 드리워진 벤치에 앉아 있게 되면, 음풍농월(吟風弄月)이라는 말을 절로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이들 석비와 정원을 지나치면, 비로소 온전히 문헌서원을 만나게 되는데, 일단 문헌서원의 전경(全景)은 이러하다. 아, 이색 선생의 묘역은 위 사진에는 없다. 오른쪽의 건물군들이 서원이고, 왼쪽은 이색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목은선생영당(穆隱先生影堂)'이다.
일단 서원 쪽으로 다가가면 문헌서원의 외삼문에 해당하는 진수문(進修門)과 맞닥뜨리게 돼. 바른 마음으로 나아가 제대로 공부하라...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현판의 모습이다.
서원에는 원생이나 손님들의 거처로 사용되는 건물이 있었는데, 보통 동쪽과 서쪽에 각각 한 채씩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각각 동재(東齋), 서재(西齋)라고 불렀다. 이것이 동재의 모습인데,
동재의 이름은 존양재(存養齋)로 현판의 글씨는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1606-1672)이 썼다고 한다. 아, 존양재란 이름은 맹자의 존양성찰(存養省察)에서 유래한 말로, "마음의 본성을 지켜 착한 성품을 기른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그리고 이것이 서재의 모습인데
서재의 이름은 석척재(夕惕齋)로 현판 글씨는 역시 송준길이 썼다고 한다. 아. 석척재란 이름은 주역의 건건석척(乾乾夕惕)에서 따온 것인데, 건건석척은 "밤낮으로 쉼 없이 노력하고 노력하라"라는 의미라고 한다.
동재와 서재를 양옆으로 두고 정면으로 가로질러가면 원생들에게 강학을 행하던 진수당이 나오는데, 이곳의 현판 또한 송준길이 썼다고.
그리고 진수당에 오르면 힘찬 글씨체로 쓰인 ‘문헌서원’이라는 액호를 만날 수 있는데, 이 글씨는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의 것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이야기 한 건물의 배치는 아래 사진을 참조하면 되는데, 오른쪽이 동재고 왼쪽이 서재이다. 정면으로 보이는 것이 진수당이고.
진수당의 왼쪽 옆에 또 하나의 석비가 보이는데, 비문에는 '한산문헌서원비기(韓山文獻書院碑記)'라고 제목이 붙어 있다.
위 사진 속 석비 옆으로 쪽문이 나있는데,
이리로 나가 담을 따라 돌아가면 이색 선생을 비롯하여 문헌서원이 배향하는 분들의 위패를 모신 효정사(孝靖祀)가 나오는데, 계단 위에 서원의 내삼문에 해당하는 경현문(景賢門)이 있다. 이를 통해 효정사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보다시피 경현문은 굳게 닫혀 있다.
때문에 효정사에는 접근이 불가했고, 경현문 옆으로 둘러쳐져 있는 담벼락에 기대어 멀리서 효정사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효정사 옆쪽으로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전각이 하나 서있는데, 바로 이색 선생의 초상(보물 제1215-2호)이 봉안되어 있는 목은선생영당이다.
영당의 현판인데, 누구의 글씨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곳에 관복을 입은 이색 선생의 초상이 있는데, 원본은 아니지만 1755년에 원본을 보고 당시의 일류화가가 그린 것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크기는 85.2cm×150.7cm.
목은선생영당 앞쪽으로 이색신도비(李穡神道碑,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27호)가 있는데, 비문은 하륜(河崙, 1348~1416)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록한 비석을 말하는데, 묘의 남동쪽에 세우는 것이 통례이다.
목은선생영당과 이색신도비를 함께 사진에 담아 보았는데, 영당으로 들어가는 영당삼문(影堂三門)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인다.
목은선생영당 쪽에서 신도비를 바라보며 사진을 남긴 후에,
이색 선생의 묘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신도비를 묘의 남동쪽에 세우니, 묘는 신도비의 북서쪽 방향으로 있을 것이다. 하여 방향을 잡고 묘를 향해 걷다가 잠시 멈춰 서서 서원 쪽을 뒤돌아 보았다. 문헌서원 전체의 전각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색 선생의 묘역. 두기의 묘가 보이는데, 뒤쪽의 것이 이색 선생의 묘이다. 이색 선생은 69세를 일기로 여주에서 사망하였는데, 선생의 3남인 이종선(李種善)이 이곳 한산으로 모셔왔다고 한다. 앞의 묘가 바로 이종선의 묘. 첫째 이종덕과 둘째 이종학의 묘는 북쪽에 있다고 한다.
이색 선생의 묘. 무덤 앞에 망주석과 문인상, 마상(馬象)이 있는 소박한 모습을 띠고 있다.
묘비 또한 그리 요란하지 않아서 고졸한 멋이 있고.
묘에서 내려오다 만난 옛 우물터. 우물 위에 정자를 세워 놓았는데, 수질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물 근처에 아무리 갈 길 바쁜 과객(過客)일지라도 잠시 쉬어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나무의자가 멋들어지게 놓여 있다. 실제로 아산복귀시간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여기서 잠시 머물렀는데, 그 과정에서 무심코 다시 문헌서원 팜플렛을 집어 들었다가 내가 놓친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바로 장판각(藏版閣)...
급히 몸을 일으켜 다시 서원으로 들어가서는 동쪽으로 나 있는 쪽문을 지나쳐 장판각에 이르렀다.
장판각은 이곡의 가정집 20권과 이색의 목은집 55권을 찍어내기 위한 975개의 목판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장판각 앞쪽으로 멋들어진, 그리고 규모도 상당한 건물이 있는데, 교육관이라고.
서원의 오른쪽으로 또 몇 기의 묘가 보이는데, 이들 묘는 이색 선생 손자들의 묘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