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센다이 시가지를 굽어보는 센다이성터(仙台城跡)
# 첫째 마당: 들어가며
센다이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둘러본 곳은 1602년에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에 의해 아오바(青葉) 산에 건설된 센다이성(仙台城)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센다이성이 있었던 자리인 "센다이 성터(仙台城跡)"였다. 센다이성은 남쪽에 깊이 약 40m의 깊은 골짜기, 동쪽에 60m 높이의 절벽이 있고, 서쪽으로는 깊은 숲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였는데, 태평양전쟁 때 연합군의 공습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하여 지금은 센다이 성이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흔적 정도가 이렇게 간신히 남아 있을 뿐이다.
센다이성터에서 가장 볼만한 것이 이 나무일 정도로 철저하게 황폐화되어 있어서 과연 이곳에 성이 있었다는 것이 의심될 정도로 말이다.
때문에 일본 사람들도 이곳을 차마 센다이성이라고 부르지를 못하고, 센다이성이 있었던 자리라는 의미를 담아 센다이성터(仙台城跡)라고 부르고 있다. 이처럼 센다이성터는 오랫동안 완벽하게 방치되어 있었는데, 2003년 8월 27일에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복구 내지 복원작업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복원 사업의 결과 지금은 돌담, 무기고 그리고 망루였던 와키야구라(脇櫓)가 어느 정도 예전의 모습을 다시 찾게 되었는데, 이들 복원된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사이트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이처럼 볼품없는 센다이성터를 왜 찾아들었는지가 궁금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센다이 성터 안에 있는 다테 마사무네의 기마상(騎馬像)과 그곳에서 바라보는 센다이 시가지의 풍경이 센다이를 대표하는 관광 명소"라고 소개해 놓고 있는 센다이 관광 안내책자들 때문이었다.
## 둘째 마당: 센다이성터(仙台城跡)
앞에서 언급한 이유 때문에 찾아든 센다이성터는 솔직히 많이 실망스러웠다. 관광안내서들이 그렇게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센다이 시가지의 풍경은 겨울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정작 더 커다란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틀림없이 센다이성터를 제대로 찾아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다테 마사무네의 기마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여 다테 마사무네의 기마상을 찾아 성터 안을 헤매는 내 눈에 기마상이 보이지 않는 이유를 추단 할 수 있는 것이 포착되었는데, 문화제 등을 보수할 때 그 앞에 길게 드리우는 가림판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편 커다랗게 드리워진 가림판 한쪽 구석에 이런 것이 붙어 있었는데, 파파고가 그 내용을 친절하게 번역해 준다. 핵심은 2021년 후쿠시마 지진으로 기마상이 기울어져 보수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것.
아, 내가 이곳을 찾았던 때가 2023년 2월이었으니, 지금쯤은 대충 보수작업이 마무리되었을 것 같기는 하다. 그래서 지금 이곳을 찾는다면 아래 사진과 같은 모습의 기마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테 마사무네의 기마상에 관하여는 아래 사이트를 참조하기를...
다테 마사무네의 기마상 옆으로 이렇게 멋진 탑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태평양전쟁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탑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 셋째 마당: :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센다이성이 풍운아 다테 마사무네에 의해 건립된 점을 생각할 때, 다테 마사무네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을 듯하다.
일본의 경우 고대에는 천황이 전국을 직접 다스리며 실력을 행사했지만 언젠가부터 쇼군(しょうぐん, 将軍)이 실질적 최고권력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특히 천하를 판가름하는 전투라 불리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1600년)에서 승리한 도쿠가와(德川) 가문은 쇼군의 지위를 세습하며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하여 왕정복고가 이루어질 때까지 무려 260여 년을 일본을 지배하게 되는데, 이 기간 동안 쇼군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자신의 죽음은 물론 가문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해서 천하의 그 누구도 쇼군의 명에 절대복종해야만 했는데, 이때 정면으로는 아니지만 나름 독자적 노선을 견지하며 도호쿠(東北) 지방을 지배했던 걸물이 출현하는데, 오늘 이야기하는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1567~1636)"가 바로 그 사람이다. 아, 아래 사진을 보면 다테 마사무네 초상화의 오른쪽 눈이 제대로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세 살 때 천연두로 오른쪽 눈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다테 마사무네는 독안룡(獨眼龍)이란 별명을 갖게 된다.
센다이번의 초대 번주(藩主)였던 다테 마사무네는 덴쇼 17년(1589년)에 도호쿠의 패권을 놓고 아이즈번의 아시나 요시히로(蘆名義廣)와 벌인 스리아게하라 전투(摺上原の戦い)에서의 승리를 통해 도호쿠 지방을 지배하며 도호쿠의 왕(東北王)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리고 그 무렵에는 지금의 후쿠시마 현과 아이즈 및 야마가타 현의 남부, 미야기 현의 남부가 모두 다테 마사무네의 지배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남부의 여러 호족, 그리고 지금의 미야기현이나 이와테현 일부도 사실상 다테 마사무네의 세력 범위에 있었고. 이렇듯 걸출한 인물인 다테 마사무네에 관하여 보다 자세한 것은 아래 사이트를 참조하기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테 마사무네가 세운 센다이성에 관하여 상세한 것은 아래 사이트를 참조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