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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노 Jan 07. 2024

'아다지오'처럼

아파트 근처 천변을 산책하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바쁜 사람들이다.

천변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그 앞에 있는 신호등을 지나야 되는데 그곳에서도 바쁜 사람들은 부동자세로 신호등이 켜지기만을 기다렸다가 튕기듯이 길을 건넌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는 저녁 7-8시 정도의 그곳은 산책을 선택한 사람들 답게 모두가 비슷한 모양새로 걸음걸이 와 옷차림 마저 쌍둥이들처럼 닮아있다.

산책로에 설치된 턱걸이를 몇 차례 이용하고 다시 재빠르게 일어서 걷기 시작하는 남학생, 추운 날에도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가뿐 숨을 몰아쉬며 조깅하는 건장한 남자, 이어폰을 꽂고 허리춤에 옷을 묶은 채 리드미컬하게 걷는 여학생들, 빛이 모두 사라진 캄캄한 밤에 선캡을 깊게 눌러쓴 아주머니 등 모두가 진정으로 바쁜 이 시대의 주인공들처럼 보인다.

주인을 따라나선 작은 강아지는 빨라지는 주인의 발걸음을 붙잡은 채 엉덩이를 길게 뒤로 빼더니 역시나 산책을 나선 이웃집 강아지와 눈인사를 건네느라 바쁘다.

도시에서의 강아지들은 본인들의 의지와 상관없는 바쁜 삶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산책로 옆으로 난 자전거 도로에서는 휙 휙 바람을 가르는 쇳소리를 내며 골격이 훤히 드러난 운동복을 입은 남자들 몇 명이 호리호리한 자전거를 타고 씽씽 달려가고 있다.

두 도로가 합해져 버린 듯 가끔은 산책로인지 자전거 도로인지 사람들은 마구 뒤섞인 채 걷거나 달리거나 하며 앞을 향해 나아간다.

그렇게 현대인의 삶이 리얼하게 드러나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 한편에서도 왠지 모를 활기가 샘솟기도 한다.




도시를 벗어나 한적한 곳을 걸을 때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조금 더 나와 닮은꼴을 발견할 수 있다.

산책로 주변의 풀벌레 소리나 나무들이 바람에 부대끼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느긋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가다 멈추기를 반복하는 아이의 해찰부림을 말없이 기다려주는 젊은 부부, 나이 지긋한 노부부가 다정한 발걸음을 조심조심 뗄떼,  '뽀드득' 발에 밟히는 눈의 감촉이 귀의 고막을 통해 소리로 들려올 때 나는 내 마음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니던 귀뚜라미 떼 들을 어둠저편으로 잠재워 버릴 수 있게 된다.


사람의 마음에는 틈 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크고 작은 여러 형태의 돌들이 모인 돌담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틈이 있듯이 사람의 마음에도 틈이 있어야 그 틈새로 어떤 날엔 강풍이 불고 또 어떤 날은 미풍이 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내보낼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주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인 나는 그렇게 내 의지와 상관없더라도 가끔은 나를 그런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떠미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계획했던 일을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시작해야겠다는 의지가 '불끈' 하고 주먹을 쥐게 만들거나 한낮의 쨍한 해를 보면서 이상하게 조급해지는 마음을 느린 걸음이 잡아주기 때문이다.

브런치를 시작하고 시간을 정해 꾸준히 쓰기로 마음먹었는데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지키지 않았던 탓에 의지박약이라고 스스로를 질책했었다.

항상 무엇인가에 쫓기듯 마음이 바쁘고 초조하지만 그렇다고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 설명할 수 없는 마음상태 가 요즘의 나인 것 같다.

마음은 '알레그로' 지만 나의 움직임은 '아다지오' 다.

이유 있는 느림의 미학이 아니라 이유 없는 게으름의 자학이 오늘하루도 나를 장악하는 듯하다.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걸린 A가 의사에게 상담을 했다는 말을 듣고 나도 A와 같은 증상이라고 느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괜찮다'

'자고 싶으면 자고 티브이 보고 싶으면 보고 게임하고 싶으면 게임하면 된다'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도 잘못된 게 아니다' 




나는 '아다지오'와 '알레그로'가 적당히 버무려진 악보 위에서 살고 싶다.

평온함을 유지하기 위해 '알레그로'의 발길질을 수백 번 하는 백조 도 되었다가 때로는 태생적으로 느릿느릿 함을 타고난 나무늘보 나 코알라 도 되어서 '아다지오'의 이면적인 성격을 잘 섞은 조화로운 내가 될 수 있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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