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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노 Jan 03. 2024

팔은 안으로 굽는지라...

떠나보내는 것도 사랑이다

웨딩 마치 가 울리고 신랑이 성큼성큼 행진한다.

런웨이 양쪽으로는 신랑신부 보다 더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신 화환들이 자태를 뽐내고 줄지어 서있고 

드디어 오늘 하루만큼은 세상 둘째가라면 서러울 미모를 가진 모델, 배우 들 못지않게 아름답고 찬란한 신부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신부의 아버지에게서 신부를 인계받은 신랑이 신부의 손을 잡고 나란히 주례사를 향해 선다.




언니의 아들이 결혼을 했다.

나는 이모의 자격으로 소위 요즘유행한다는 신식 한복을 대여해서 입고 결혼식에 다녀왔다.

외동으로 자라 선 지 어릴 때부터 유난스럽고 self-obsseced 성향이 강했던 조카가 서른 후반이 된 나이에 결혼을 한다니 우리 형제들, 또 그 형제에 딸린 식구들 까지, 마흔이 넘은 큰 아들을 아직 결혼도 시키지 못한 큰언니마저도 박수를 치며 환영해 줬다.

대학졸업 후 늦은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까지 형부 몰래 조카의 경제사정을 다 책임져줬던 언니의 고생이 끝나는 것 같아 마음 한편으로 속이 후련하면서 지 짝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조카가 대견해 보였다.

하와이로 6박 8일의 신혼여행을 가는 조카부부가 큰 캐리어 두 개를 가지고 인천공항으로 향할 때 잠시잠깐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내가 결혼할 당시 남편은 새로 시작한 일 덕분에 시간내기가 어려웠다.

1박 2일로 짧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을 고민해 보다가 결혼 전에 함께 여행했었던 지리산으로 결정했다.

구례로 향하는 길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눈처럼 날리는 도로를 달려 성삼재 주차장에 들어섰다.

하얗다 못해 빛으로 사라져 버릴 듯한 눈들이 저 높은 봉우리들을 점령하고 있었다.

노고단 정상을 오르는 동안 살갗을 찢어버릴 듯한 강한 눈보라와 맞서 싸우느라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어쩌다 한번 째진 눈으로 슬며시 바라본 하늘은 온갖 사나운 것들로 뒤엉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날에도 우리처럼 꾸역꾸역 노고단 정상을 올라온 사람 몇이 허둥지둥 쓰러지듯 우리 곁을 스치며 하산을 시작하고 정상석 비석을 부둥켜안고 사진 한컷을 남기고 우리도 하산을 서둘렀다.

그렇게 우리는 아랫마을에서는 봄을 윗마을에서는 겨울을 느끼고 두 계절에 걸쳐 신혼여행을 다녀왔다고 오랫동안 너스레를 떨어댔다. 

하와이든 지리산이든 멋진 날을 연출했다면 그것으로 신혼여행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 것이 아닐까 한다.

신혼여행의 성지이자 태평양의 낙원이라 일컬어지는 하와이를 남들에게 뒤처질세라 선택한 조카는 혼자 살고 있었던 20평짜리 아파트를 떠나 40평짜리 아파트로 입주를 한다고 한다.

그럴만한 경제적 능력이 아직 없는 조카가 큰 집을 욕심내고 있으니 그 바람의 끝이 결국은 부모의 것을 탐내는 자식으로 간주될까 내심 걱정이 되기도 한다.

능력만 있으면 궁궐보다 더 큰 집을 지어 산들 누가 뭐랄까.... 




형부가 조금 이른 퇴직을 하고 언니는 다 늦은 나이에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결혼 후 주부로서 살림만 해왔던 언니가 '주간보호센터'에서 할머니들에게 '선상님' 소리를 들으며 밥 나르고 커피타주고 목욕시키고 1종 면허까지 따가면서 할머니들 귀가도 시키며 생활한 지가 벌써 3년이 되어간다.

처음 얼마동안은 어떤 할머니가 언니를 이뻐하고 이것저것 챙겨준다고 자랑도 하고 또 어떤 할머니는 말을 잘 들어서 언니가 이쁜 할머니라고 부른다며 언니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직장생활 얘기를 할 때면'그래도 다행이다' 싶었다.

또 어느 날은 할머니들 귀가시키고 집으로 가는 길에 만개한 벚꽃이 너무 이뻐서 사진 한 장 찍었다며 '카톡' '카톡' 인증 사진을 보내기도 했다.

항상 밝아 보이지만 예민한 성격의 언니가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그렇게 잘 적응하니 내심 걱정했던 마음이 나 혼자만의 기우였구나 생각될 무렵이었다.


그랬던 언니가 언젠가부터 할머니들을 케어하는 것도 운전을 하는 것도 직장동료 선생님들을 대하는 것도 다 힘들다고 했다.

특히나 잘 움직이지 못하는 할머니들을 안다시피 하고 시키는 목욕이나 귀갓길 혹시나 다치실라 차에서부터 한발 한발 떼어주다시피 해서 동행하는 일은 생각보다 큰 노동이 따른다고 육체적인 고통도 토로했다.


가족도, 친구도, 지인도 없는 그저 경치 좋고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산기슭에 집을 짓고 낚시나 즐기며 노후를 즐기고 싶다는 형부만의 워라밸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바다가 바로눈앞에 펼쳐진 -경치는 그 어디 내놓아도 뒤처지지 않을 - 산자락에 이쁜 전원주택을 지은 지가 어느새 5년이 넘었다.

주택 집 마당 가꾸는 것만 해도 하루종일을 소일거리 삼는 형부와는 달리 그런 일에는 큰 관심이 없는 언니의 귀농생활은 좀 따분할 텐데 하는 마음이 들었던 차에 들려온 언니의 직장생활 은 일상에 활력을 줄 거라 생각했었는데 의욕이 한없이 상실된 언니의 목소리를 듣게 되니 다분히 마음이 쓰였다.


" 언니 이제 일 그만두고 집에서 언니가 좋아하는 꽃 도 가꾸고 형부랑 여행도 다니고 운동도 하면서 좀 나른하게 살아, 1년도 못 버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다녔네. "

하는 내 말에,

"그래도 한 2~3년은 더 다녀야 돼." 하는 거다.

'오잉?' 이게 뭔 소리야. 

그렇게 힘들다고 하더니 죄다 엄살이었던 거야?




언니는 아직도 아들을 품에서 떠나보내지 못하고 캥거루처럼 배에 짊어지고 있었다.

큰 집도 사줘야 하고 얼마 전에 마련한 -직장생활 시작한 지가 얼마 안 돼서 모은 돈이 없는데

큰 차를 떡하니 사놓고 아직 할부금이 한참 남았다- 풀옵션을 장착한 suv를 샀으니 그 할부금 도 같이 갚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지라 그런 언니가 안쓰러운 만큼 이제 결혼도 했으니 엄마도 직장생활 그만하고 엄마아빠 노후나 행복하게 보내라고 강력하게 말하지 않는, 부모의 경제적 지원을 당연하게 받는 조카가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마음 또한 컸다.

 

조카에게 삐죽한 마음을 품고 있던 내 속 사정을 알 리 없는 남편은 엄마가 아들생각해서 큰 집 사주고 차 할부금도 갚아주겠다는데 왜 그러냐며 혼자 씩씩거리고 있는 나한테  얄미운 한마디를 건넨다.

아마 언니는 아들의 삶까지 책임져야 하는 오늘을 버티기 위해 백번 천 번 약해지는 마음과 아픈 허리를 연신 세워가며  퇴근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밖은 작년보다 일찍 흐드러진 벚꽃이 이미 만개한데 언젠가 저 꽃을 보면서 느꼈을 그런 행복이 언니의 30분 퇴근길에 다시 한번 찾아왔으면 하고 바래어 본다. 

-2023년 조카의 결혼식을 다녀와서 끄적여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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