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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노 Dec 09. 2023

일부러 들은 건 아니에요

결혼할 거면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날씨가 너무 좋은 토요일, 이른 아침을 먹고 남편과 함께 산으로 산책을 갔다.

산책이란 표현이 알맞은 것이 정상까지의 등반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산책의 수준정도 되는 곳에 위치한 작은 절까지로 목표를 정했기 때문이다.

그리 힘들지 않게 올라갈 수 있으면서 기분전환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점이 좋아서 내가 즐겨 찾는 산책코스 중 하나이며 친구와는 자주, 남편과는 가끔 오게 되는 곳이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며 새소리를 들으며 한 발 한 발 걷다 보면 어느새 노곤히 풀어진 마음이 이런 일 저런 일로 심란하고 고민스럽던  나를 토닥토닥 다독인다.

산책길에 나와 남편은 많은 얘기를 나누지는 않지만 남편은 뒤에서 나는 앞에서 서로 걷는 속도를 맞추며 적당한 보폭을 유지하는 걸로 말보다 더 큰 소통을 이어나간다.

그렇게 30여분을 올라가면 위쪽으로 절 몇 채가 있고  정상으로 향하는 길 왼쪽으로 들어서면 나무 벤치 몇 개가 아래 계곡이 보이는 곳에 놓여있다.

그중 하나가 우리가 자주 앉는 명당석인데 그곳에 앉아 준비해 간 커피 한잔을 마시며 작은 바람에도 미세하게 흔들리는 나뭇잎 스치는 소리들을 멍하니 듣고 있는다.

그렇게 자연과 하나 된 몰입감은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이지만 조용한 숲 속에 파묻혀있는 느낌이 들게 하고  독립된 공간 속에 우리들만 있는 착각 속에 빠져들게 한다.

시답잖은 수다를 조금 떨다 내려오는 길에 앞서가는 여자 둘이 나누는 대화를 처음에는 우연히 나중에는 의도적으로 뒤따르며 엿듣게 되었다.




두 사람은 직장동료인 것 같기도 하고 친척지간인 것 같기도 하였는데 언뜻 봐서 어린 쪽은 삼십 대 나이 든 쪽은 '내 나이가 58인데'라고 본인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둘이 나누는 대화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58세 공무원 여자는 아직 미혼이고 이번에 소개팅으로 충주에 사는 60대 남자를 만났다.

여자는 이 소개팅 남과의 만남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첫째 롱디인 것이 마음에 걸렸고 남자의 직업이 계약직인 것이 싫다.

둘째 무엇이든 리더 하지 못하고 모조리 여자한테 묻는 것도 싫다. 

'브런치 카페에 가는 건 어떠냐' '이 정도만 시켜도 양이 차겠냐' 등 등.

끝으로 제일 못마땅한 건 남자의 직업이고 한 술 더 떠 공무원인 여자의 안정된 직업 때문에 남자가 여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싫다.

기혼인 삼십 대의 여자는 50대 여자의 부정적 관점에 놓여있는 남자를 호의적 관점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칭찬도 하고 때로는 맞장구도 쳐주면서 결혼선배로서 조심스러운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고 경험하지 않았던가. 내 마음이 열리기 전에는 그 어떤 말도 '소 귀에 경 읽기'라는 것을.




남편과 결혼을 하기 전 나도 많은 사람을 만났다.

소위 말하는 선과 소개팅의 중간정도 되는 어정쩡한 만남들이었는데 형제가 많던 집에 막내인 내가 결혼이 늦어지자 부모님은 물론 오빠 언니들의 겉과 속은 한마음이 되어 걱정 가득한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가족들의 그런 마음에 성의라도 보여야 해서, 때로는 '이러다 평생 혼자 사는 거 아닌가' 하는 현타가 제대로 온 외로운 날이면 별 기대 없이 불편한 자리에 생각 없이 나가곤 했다.

이 사람은 키가 작아서, 너무 커서 싫다.

체격이 왜소해서, 너무 뚱뚱해서 싫다.

직장이 별로라서, 또 너무 좋아서 나하고 안 맞아 싫다.

웃을 때 보니 이빨이 이상해서, 가만히 있을 때는 인상이 험악해서 싫다.

소개팅 자리에 운동화를 구겨 신고 나와서, 너무 정장차림으로 나와서 싫다.

참 별의별 핑계도 아닌 핑계를 대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내쪽에서 싫다고도 때로는 상대 쪽에서 연락이 없을 때는 잘나지도 못한 사람이 에프터도 안 한다 하면서 못마땅해하곤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그 남자들 중 정말 괜찮은 성품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직업이나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심지어 나와 취미생활이 꿍짝 인 사람도 있었다.

그림을 좋아하는 나에게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사람도 잘 맞았을 거고 등산을 좋아했던 나에게 건축설계사무소 대표이면서 전국의 명산을 올라가는 것이 취미인 사람 하고도 꽤 괜찮은 케미를 이룰 수 있었을 거다.

(나중에 언니는 이 사람 놓친 것을 나보다 더 아쉬워했을 만큼 경제적인 재력도 있었던 것 같다.)

언니 오빠들도 속으로 는 잘난 것도 없는 동생이 마지못해 끌려가는 소처럼 마음 없이 선 자리에 나갔다 오는 것이 얄밉고 꼴 보기 싫었을 거다.

그래도 철없는 동생의 '경제력이든 뭐든 다 소용없고 느낌이 팍! 오는 사람이 아니면 두 번은 만나지 않겠다'는 정해진 변론에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한 적 없고 나의 생각을 물심양면 존중해 주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의 마음이 약해진 틈을 놓칠세라 언니 친구는 내 처지나 비슷하면서 더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던 자기 사촌동생을 소개해주었고(심지어 연하인) 우리는 6개월여 만에 결혼을 했다.

오빠 언니들은 내가 결혼한다는 소리에 눈 귀 입 다 막고 무조건 ok를 했다.

세상에 무슨 형제들이 마흔 넘어 결혼하는 동생의 남편 될 사람 직업이며 성품이며 하나도 묻지 않고 무조건 ok이라니.

부모님이 계셨으면 골칫거리 취급하듯 동생을 떠밀어버린 오빠언니들을 호되게 혼냈을 거다.

물론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 어떤 사탕발림에도 넘어가지 않았겠지만 그전의 나는 결혼이라는 큰 숲에 들어갈 준비가 되지 않았던 탓에 숲을 이루고 있는 좋은 나무들을 볼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온전히 마음을 열고 상대를 받아들였을 때 그 사람의 내면이 나와 같은지 혹여 살다가 어려움이 닥쳤을 때 온전히 그 사람만을 바라볼 수 있을지 에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주변적인 이끌림에 의한 선택은 언젠가 그 외력들이 힘을 잃거나 소멸되고 나면 그 사람의 주체 또한 그가 가진 외력들과 함께 변하거나 사라져 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성품이나 인격도 물리적인 환경에 의해 변화될 수 있지만 그 본질까지 깨지지 않게 하는 것은 두 사람이 함께 풀어나가야 할 결혼생활의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의 시대에 들어선 요즘.

경제적인 이유, 가치관의 변화 등으로 인해 결혼을 아예 하지 않으려는 젊은 세대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다양하게 열려있는 사회관계 서비스 망을 통해 사람들은 외로울 새가 없고 나를 돌아보고 나의 위치가 어디쯤인지를 알게 할 틈마저 주지 않는다.

나 혼자여도 얼마든지 세상을 재미있고 지루하지 않게 살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틈이 생길 수 없는 시간을 계속적으로 쌓아 가기 때문이다. 

결혼여부가 아직도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가정을 꾸리고 그 안에서 맺는 가족들과의 관계들이 각자의 삶 속에서 무너지지 않는 짱짱하고도 변함없는 기본적인 뼈대가 되어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족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고 믿는 나만의 보편화된 생각 속에 살고 있는 나는 결혼을 하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상대방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는 섣부른 결혼은 '남자들은 거기서 거기다'라는 말 정도로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그래도 평범한 상대를 만나 결혼을 한 축에 끼는 사람들과는 다른, 버텨내야 하는 결혼생활로 소중한 내 삶의 하루하루가 스러져 가는 것을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얘기를 듣기 위해 천천히 하산하는 나를 따라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늦추는 남편을 바라봤다.

가진 것도 없었고 직업도 별로였고 하여튼 탐낼만한 외력의 세력이 별로 없었던 남편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나'가 삶의 주체가 되어 살았던 남편이 역시나 나만의 가치관으로 삶을 살아가던 나와 적어도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같이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를 배려하면서 걷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에 조금은 느리더라도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는 날 이 올 것이며 그때 우리 서로는 그동안 잘 걸었다 상대의 어깨를 토닥이며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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