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내기
시간이 없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이건 무조건 지각이다. 그런데 나갈 수가 없다. 시간 계산을 잘못하고 이미 돌리기 시작해 버린 빨래 때문에.
점점 마음이 급해진다. 아니 근데 왜 세탁 시간은 처음에 알려준 것보다 점점 더 길어지냐고요… 진행 상태를 보니 세탁과 헹굼은 끝났다. 탈수만 남았다.
‘아 탈수는 하지 말까? 어차피 세탁하고 헹굼만 해도 옷은 깨끗해진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전원 버튼에 자꾸만 손이 간다. 손이 가요 손이 가~. 새우깡도 아니고.
혹시 몰라 인터넷에 검색해 본다. ‘탈수 안 하면’이라고. 탈수를 하지 않아도 빨래를 잘만 말리면 문제가 없다, 탈수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조건 해야 한다. 양쪽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그중 눈에 띄는 답변이 하나 있었다.
‘탈수를 하지 않으면 옷에 물기가 빠지지 않아서 무거워요. 그래서 말리는 데에도 시간이 더 오래 걸립니다. 탈수가 필요 없으면 세탁기 기본 코스에 굳이 넣어 놓았을까요? 다 필요하니까 기본 코스에 포함시켰겠지요. 순리대로 하는 게 제일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 이 답변을 보고 탈수까지 하기로 마음먹었다. 친구에게는 좀 늦을 것 같다고, 죽을죄를 지었다고 빌었다.
물기가 빠지지 않아서 무거워진다… 다 필요하니까 넣어 놓은 것 아니겠냐… 순리 대로라… 맞다.
물에 빠지면 옷이 무거워진다. 물을 탈수로 빼내주지 않으면 건조하는 데에,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는 데에 시간이 더 걸린다.
물을 양껏 머금은 옷은 그 어떤 옷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그럴 때 탈수라는 과정으로 옷의 필요치 않은 무게들을 빼주어 또다시 옷의 역할을 하게 된다.
문득 나를 무겁게 만드는 감정들도, 탈수라는 과정을 통해 무게를 덜고 싶어졌다.
완벽하게 물기가 없어지진 않아도,
상처가 완전히 아물진 않아도,
무게가 줄은 나의 마음은, 그전보다 훨씬 건강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