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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티끌 02화

티끌

1부. 잔향의 문

by 융 Jung

7월 11일, 월요일. 전화기 알람이 울리기 전에 잠에서 깨는 법이 없었는데, 눈을 뜬 시각은 여섯 시 일 분 전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알람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티셔츠를 펄럭이며 땀에 젖은 등을 말렸다. 그리고는 주방으로 가서 시리얼에 우유를 붓고 선채로 그릇을 들고 먹었다. 자꾸만 왼손에 땀이 났다.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잊어버렸던 꿈의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가 금세 사라졌다. 냉장고 옆 창문의 간유리로 이른 아침의 햇빛이 연분홍으로 아른거렸다. 뻑뻑한 눈을 비비자 젖은 눈곱이 손가락에 묻어났다. 생각 없이 습관대로 시리얼을 대충 씹어 삼키다가 아몬드 조각에 입천장을 찔렸다. 상처가 깊었던지 피 비린내가 꽤나 느껴졌다. 우유에 섞인 피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느닷없이 어제 가위에 눌렸을 때 보았던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희미했던 기억 속 그녀의 얼굴이 하연의 얼굴과 닮아있었다. 어쩌면 가위 속 그 소녀는 ㅡ 동생의 장례식에서도 울지 않았던 하연과는 다르게 ㅡ 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리얼을 모두 건져먹고, 남은 우유를 들이마신 다음 곧장 설거지를 하고 욕실로 걸음 했다. 멀찍이 소파에서 고치로 몸을 두른 번데기처럼 이불로 몸을 돌돌 말고 웅크린 채 잠든 연후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욕실 문을 조심스럽게 여닫았다.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다가 세면대에 뱉은 치약거품에 섞인 붉은 피가 보였다. 입을 크게 벌리고 세면대 벽에 붙은 거울을 바라보았지만 상처는 도통 보이지 않았다. 거울에 입속을 비추면 시선이 닿지 않았고, 시선이 닿으면 입속이 보이지 않았다. 별 수 없이 검지로 입천장을 더듬어 보다가 그만 포기하고 욕실에서 나왔다. 평소와 같이 다려지지 않은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계절과 상관없이 번갈아 입는 어두운 색 바지를 입고 회색의 얇은 재킷을 걸쳤다. '담배, 라이터, 지갑, 차키, 손목시계'를 습관대로 읊으며 재킷 주머니를 확인하고, 잊을뻔한 손목시계를 왼손에 찼다. 평소대로 여섯 시 반이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나는 방에서 나와 곧장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연후가 내 집에서 밤을 보낸 일은 흔치 않았지만 그리 드물지도 않은 일이었기에 신경 쓰이지 않았다. 강남으로 향하는 올림픽대로를 느리게 달렸다. 원효대교를 지나 한강다리에 가까워지면서 길은 더욱 막혔다. 월요일 아침이면 늘 있는 일이었다. 창문과 선루프를 조금씩 열고 담배를 한 개비 꺼내 피웠다. 회사에 도착하기 전에 몇 개비는 더 피울 것이므로, 담뱃갑과 라이터는 재킷에 넣지 않고 조수석에 던져두었다. 위쪽을 움켜쥔 흔적이 선명한 종이가방이 시야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지난밤 연후가 하나의 모친으로부터 넘겨받은 물건이 들어있을 그 종이가방이었다. 출근 시각보다 삼십 분 일찍 사무실 주차장에 도착했다. 여느 월요일에 비해 일찍 도착한지라, 나는 전화를 꺼내 이십 분의 타이머를 맞추고 운전석을 뒤로 젖혔다. 뉴스를 들으며 출근직전에 쪽잠을 자는 것은, 출근길의 교통체증과 업무의 시작 사이에 달콤한 간식의 역할을 했다. 습하고 더운 여름날 얼음을 넣어 마시는 레모네이드와 같았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한번 알람이 울리기 전에 몸을 일으켰다. 종이가방을 열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거의 충동처럼 느꼈다. 노부인이 연후에게 했던 말을 듣지 못했다면 달랐을까, 연후가 그토록 세게 움켜쥐고 있지 않았다면 달랐을까ㅡ라는 생각을 거듭해도 궁금증이 가시지는 않았다. 휴대전화 화면의 타이머는 알람까지 이 분을 남겨두고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알람을 끄고, 연후에게 '종이가방이 차에 있는 걸 모르고 출근을 했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여덟 시 이십오 분, 사무실은 산뜻한 화분과 시원한 조명으로 나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주말은 잘 쉬셨습니까— 따위의 인사를 밝은 얼굴로 주고받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월요일 아침이었다. 나는 차 트렁크에서 꺼내온 가방을 의자에 올리고 첫 번째 지퍼를 열어 노트북을 꺼내고 두 번째 지퍼를 열어 마우스를 꺼냈다. 금요일이나 휴일 전 아니, 거의 대부분의 퇴근길에 나는 회사 업무용 노트북을 가방에 챙겨 나선다. 집에 성능이 뛰어난 개인 노트북이 있음에도 업무용 노트북을 챙기는 것은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었다. 정보보안 쪽의 일을 하다 보면 노트북을 회사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문제가 터졌을 때 원격 데스크톱이 방화벽에 막힌 탓에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회사로 향하는 택시에 올라야 하는 상황을 모면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나에게는 일 자체가 독서나 산책 같은 취미 중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전과 달리 나는 스스로가 일중독임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매달 만나는 정신의학과 의사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 한다. 아웃룩으로 이메일을 띄우고, 이번 주에 처리하도록 지난주에 깃발표시를 해둔 이메일과 할 일의 목록, 참여를 수락한 대면회의나 화상회의의 일정과 아직 수락하지 않은 회의 요청을 먼저 살펴보았다. 일본계 저축은행과의 재계약에 성공했으며, 이와 관련한 대면회의가 아침 열한 시에 대회의실에서 있을 예정이라는 메일을 살펴보았다. 발신자는 영업 1부의 정 실장이었다. 우리 회사 측에서 특별한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 한 매년 계약이 연장되는 여러 외주보안 프로젝트 중의 하나이지만 정 실장은 이를 전사적으로 자랑하기라도 하듯이 수신자 목록을 가득 채웠다. 나는 수신자 목록보다 더 빼곡한 참조 목록의 한 사람이었다. 다른 특별한 일정이 있지는 않았으나 나는 참여하지 않음을 선택했다. 입사동기인 정 실장도 게의치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다음으로는 아직 구성원은커녕 부서의 이름조차 확정되지 않은 신규 사업부의 포렌식 연구실에서 보내온 메일을 살펴보았다. 수신자는 여러 부서장과 실장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참조에는 인사부장과 인사 실무자 몇이 포함되어 있었다. 내 이름은 수신자에도 참조에도 없었다. 숨은 참조였다. 나 말고도 여럿이 숨은 참조를 통해 이 메일을 수신했을 것이다. 사실상 수신하지 않은 것과 같이 무시해도 될 일이지만, 누구에게나 그렇듯 숨은 참조로 보내어진 메일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메일은 IT회사에서 보기 드물게도 지나치리만큼 예의 바른 인사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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