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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티끌 03화

티끌

1부. 잔향의 문

by 융 Jung

발신: 신규사업 TF 포렌식 연구실 이수연 실장

수신: 보안부 및 각 부서장님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부터 출근하게 된 이수연이라고 합니다. 이메일로 먼저 인사드리게 된 점에 있어 양해를 구합니다. 아직 부서명조차 확정되지 않은 데다가 저의 상사가 되실 부서장 자리도 공석이고, 연구실 구성원도 상당수 공석인 점을 부서장님들께서도 인지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첫 출근부터 회람을 돌리는 것은 부사장님께서 제게 지시하신 바, 내부채용 우선시 절차에 따라 각 부서의 실장님으로부터 우수한 인재를 추천받기 위함입니다. 내부 채용인원은 최대 네 명으로, 추천하실 인원을 본 메일 참조의 인사부 채용 담당자 또는 부서별 인사 담당자께 개별 회신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부 채용 기간은 오 월 마지막 근무일까지이며, 네 명의 내부채용이 확정되거나 기간이 만료될 경우 외부채용으로 전환되는 점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불쾌했다. 보안부서에서 살아남으려면 새로운 공격과 그에 대응하는 방어책을 끝없이 익히고 배워야 했다. 내게는 분명 즐거운 일이자 취미였다. 나와 함께 보안부 연구실에서 일하다가 영업부로 자리를 옮겨 실장까지 빠르게 올라간 정 실장처럼 승진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경우에는 이런 보안업무상의 공격과 방어 외에도 배워야 할 일들이 많았다. 경영학석사와 골프, 나로서는 도통 이해가지 않는 사내 정치도 그중 하나였다. 관리직에 욕심을 갖지 않는다고 기회가 될 때마다 말하고 다녔던 나를 경쟁상대로 삼을 직원은 없었다. 재작년에 실장승진이라는 사전 통보를 전해 받았을 때에도 나는 실무 전문가로 남게 해주지 않으면 퇴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입사후배인 김훈성을 추천했었다. 명함에 인쇄되는 직급이나, 관리자에게 부여되는 개인사무실, 더 큰 자동차의 지급 따위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 눈썹을 치켜들게 만드는 높은 연봉은 솔깃했지만—그만큼이나 연봉이 올라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 외에 '사람'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이 회사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최대한 오랫동안—가능하다면 정년까지—이 회사에서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조직도에서 이메일 주소나 보았을 나를 인원차출 일메일의 숨은 참조에 포함시킨 것이다. 나는 김훈성이 내게 부서이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보면 대답해 줄 말을 머릿속으로 생각해야만 했다. 내가 잉여인력이라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가진다면 내가 베푼 호의에 대해 똑똑히 가르쳐줄 터였다. 나는 인상을 쓴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밖 흡연장소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닫힘 버튼을 먼저 누르고서 로비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움직이는 동안 세상이 갈수록 각박해져 간다는 생각을 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옥상층에서 비나 눈을 피하며 담배를 피울 수 있었는데, 건물 관리자 옥상 출입구를 막아버린 뒤로 나 같은 흡연자들은 매번 건물 밖으로 나가 디귿자로 건물을 돌아 주차장 한편에 초라하게 마련된 흡연장까지 걸어갈 수밖에 없게 됐다. 늘 비어있는 꼭대기층 사무실에 입주사를 유치하기 위한 건물주 나름의 방책이었을 것이다. 다른 회사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려고 저네들 사무실 앞을 오가는 건 싫을 테니까. 옥상 출입구가 여닫힐 때마다 담배냄새가 풍겨오는 건 싫을 테니까. 하지만, 부동산중개업자를 따라 그 사무실을 보러 오고도 회사들이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엘리베이터가 꼭대기층 바로 아래층까지만 운전하기 때문이다. 이사하기에도 불편하고 무엇하나 옮기려면 계단을 이용해야 하는 사무실이기 때문에 늘 공실일 수밖에 없었다. 옥상에서 흡연을 금지한 지 일 년이 지났는데도 그 사무실이 여전히 공실이다. 흡연장에서 낯익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인사는 나누지 않았다. 이미 손에 담배를 들고 있는 이들이 인기척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나의 얼굴을 쳐다보고, 이내 연기를 뿜으며 저마다 하던 것으로 시선을 돌린다. 흡연장의 사람들은 같은 건물에 있는 다른 회사의 직원이거나, 같은 회사에 속해있지만 업무상 교류가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어차피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목적으로 같은 장소에서 만날 것이므로 가벼운 목례나 눈인사조차 필요가 없었다. 인사를 해야 할, 혹은 인사를 하지 않으면 불편할 사람이 언제라도 등장할 수 있으므로 담배를 입에 문 사람들은 기척을 느낄 때마다 잠시 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확인을 해야만 했다. 바짓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물고 첫 연기를 코로 뿜어내면서 손목시계를 봤는데, 아직 아홉 시 아침회의까지는 십오 분이 남아있었다. 서너 번 연기를 빨아들였을 뿐인데 벌써 불씨가 필터가까이 타들어왔기에 나는 얼른 새로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왼손을 둥글게 말아 바람을 막고 오른손에 든 라이터를 켜려던 참에 자박자박 가벼운 발걸음이 들렸고, 나와 주변의 이름 모를 낯익은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던지고, 중요하지 않은—인사를 해야 하는 상사가 아닌—사람임을 확인한 후 다시 담배를 문채 고개를 숙여 불을 붙였다. 손목시계는 여덟 시 사십구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조태호 씨, 안녕하세요.” 그녀가 말했다. “처음 인사드려요, 이수연이에요. 포렌식팀 실장이에요.” 이른 아침부터 내 기분을 잡치게 한 장본인이었다. 고개를 틀어 짧게 연기를 뱉고 담배를 왼손으로 고쳐 들고 허리 뒤로 가렸다.

“네, 안녕하세요.” 내가 말했다.["메일에 그, 숨은 참조에 넣어 주셔서 알고는 있었습니다. 이렇게 처음 뵙네요.”

눈을 마주하고 말하던 중에 나는 사무적이면서도 강단 있는 그녀의 말씨와는 판이하게 갸름한 얼굴을 덮고 있는 희고 투명한 얇은 살갗이 만드는 표정에서 세심한 호의를 발견했다. 괜스레 어색해서 내가 말을 덧붙였다.

“담배 피우세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후회했다. 그녀의 뺨 아래로 한 겨울의 나무 같은 퍼런 혈관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마치 그녀는 내 질문을 듣지 못한 듯 제 할 말만 말했다.

“지원하세요.”

그 말을 꺼내는 것이 흡연장으로 온 유일한 목적인 듯 들렸다. 나조차 후회했던 질문이라서였을까, 그녀가 듣지 못한 것이 차라리 다행스러워서였을까, 그녀의 태도는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의 외모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손목시계를 보기 위해 가렸던 왼손을 치켜들고 말했다.

“아홉 시에 회의가 있어서, 올라가 봐야겠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건 따로 회신드리겠습니다.”

회의까지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당장은 그 자리를 회피하고 싶었기에 나는 대충 둘러댔다. 시각을 살핀다며 괜히 그녀 얼굴 앞으로 담배연기를 들이댄 것이 마음에 걸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닫힘 버튼을 누르고 십사 층 버튼을 눌렀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동안 나는 엘리베이터가 중간에 멈춰 서지 않고 곧장 십사 층으로 향하기를 바라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노트북을 챙길까 망설이다가 필기구만 챙겨서 아침 회의에 들어갔고, 지난주 보고한 내용 말고는 특별히 할 말이 없었기에 잠자코 앉아 고개를 끄덕이다 회의를 마쳤다. 모두가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일어서던 참에 훈성이 내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태호 님은 잠시 남아주세요.” 나는 태연하게 대답하며 의자를 고쳐 앉았다.

“네, 실장님.”

문과 벽이 모두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회의실에서 나와 훈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줄지어 빠져나갔다. 13층에서 올라온 지원부서의 이나라 실장이 마지막으로 가벼운 목례와 함께 회의실 문을 닫고는 총총거리며 사라졌다. 나는 팔짱을 끼며 두 팔꿈치를 책상에 대고 상체를 앞으로 당겼다. 훈성이 말했다.

“태호야, TF구성된 거 어떻게 생각해?”

숨은 참조로 받은 이메일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느라 내가 대답할 때를 놓치자 훈성이 말을 이었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실장 노릇을 조금 해보니까 큰 흐름은 대충 알 것 같더라. 네가 나한테 이 자리를 떠밀지만 않았어도 이런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관리자가 적성에 안 맞아, 전혀. 그래, 뭐. 이미 여러 번 말했었지만, 듣기 싫은 소리를 해야 하는 자리잖아? 실장이라는 자리라는 게…….”

그가 할 말이란 게 무엇인지 짐작되었기에 말을 빙빙 돌리고 있는 그 꼴이 거슬렸지만,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착해빠진 훈성에게 불쾌한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그에게는 모난 구석이 없었고, 부모 명의의 신용카드를 쓰는 것을 부끄러이 여길 만큼의 염치도 갖췄었다. 이미 필요한 만큼의 재산이 있었고 필요 이상의 지출력이 있었기 때문에 회사에서 받는 급여란 그에게 유의미한 숫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해왔고, 내가 맡기 싫어서 떠넘긴 실장 자리도 군말 없이 맡았다. 그랬기에 나 또한 그에게만큼은 친구로서 동료로서 그리고 부서원으로서 꺼내는 말이 정제되도록 노력했다.

“뭔데 네. 괜찮으니까 그냥 말씀해보세요. 싫은 소리를 하기 싫어도 일은 일같이 해야지. 우리가 같이 일한게 한두 해도 아닌데 그렇게 조심스러워할 이유가 있겠어. 편하게 이야기해 봐. “

그는 입술을 비죽이고 한 손 중지로 안쪽 눈곱을 긁으며 망설였고, 결국 내가 먼저 물었다.

“부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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