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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티끌 04화

티끌

1 부. 잔향의 문

by 융 Jung

“어떻게 알았어?”

조금은 놀란 얼굴로 그가 말했다. 하루의 시작이 꼬일 때가 있다. 늦잠을 잤다던가, 열차를 놓쳤다던가, 우산을 챙기지 않아 속옷째로 젖었을 때가 그렇다. 경쾌하고 찬란하게 하루를 시작하기란 이별을 겪어보기 전의 꽃다운 풋사랑만큼,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별다른 문제없이 그저 무던히, 무수히 반복되던 아침이 한 번 더 똑같이 시작된다 해서 뛸 듯이 기쁠 수는 없다. 많은 이별을 겪은 후의 새로운 사랑이 예전처럼 뜨거울 수 없는 것처럼. 눈꺼풀을 간지럽히며 솟아오른 아침해만으로 뛸 뜻이 기뻤던 유아기의 내가 아직은 까마득한 기억 속 언저리에 남아있다는 것에서 어떤 의의를 찾을 필요도 없다. 포렌식 연구실의 이수연 실장의 이메일을 받은 날, 그날은 유달리 일찍부터 꼬였었다. 침대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아니, 메슥거리는 기억만이 흐릿하게 남은 꿈을 꾸던 순간부터였다. 짧은 시간 동안 누구를 탓해야 할지 미간에 힘을 주어 생각하다가 눈을 고쳐 뜨고 회의용 책상 건너편에 옆으로 비스듬히 앉은 훈성을 바라보았다.

“이봐, 이봐……” 훈성이 말했다. “역시 연차가 높은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그래, 어떻게 눈치를 챈 거야?” 고개를 떨구고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얼굴을 들어 훈성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내가 느끼는 배신감이나 실망감이 그에게 전해지기를 바랐다.

“부서 이동이라는 건 정말 상상도 못 했어. 내가 이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잖아. 무엇보다, 내가 관리직 자리에 욕심이 없다는 건 이 회사 직원 그 누구라도 알고 있다고. 내가 일을 잘하고 못하고는 네가 실장으로서 매년 공정하게 점수를 매긴다고 믿어왔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지. 내 점수와 연봉인상률, 나쁘지 않아. 만족스러워.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지. 다른 직원들보다 연차가 긴 만큼 경험도 많지만, 그렇다고 안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항상 공부했고, 젊은 직원들에 비해 도태되기는커녕 실무자로서 여전히 잘해오고 있잖아? 그러니까 내 말은, 도구로써 나의 가치는 여전히 높은 편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야. 그러면, 부서 이동의 이유가 뭐겠어? 좌천은 아니라는 거지. 그렇다면, 내가 바보가 아닌 이상, 부서를 이동시킨다는 건 경쟁상대 제거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잖아. 나는 정말 인간적으로 네가 선량하다고 생각해 왔고, 그랬기 때문에 과거에는 네가 실장이 될 수 있도록 나름 노력도 했어. 네가 아니라, 부추긴 사람이 있었겠지. 전현희 부서장님, 그분 정도라면 그러실 수 있겠지. 사내 정치에는 도가 튼 분이시니까 기반을 다지는 차원에서 그러셨을 수 있겠지. 평소에도 너를 잘 챙겨주기도 했고. 내 말이 틀려?” 턱을 당긴 채 조용히 내 말을 듣던 훈성은 옅은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그 미소는 내가 잘 못 본 것일 수도 있다— 목을 고치고서 특유의 차분한 말씨로 대답했다.

“조태호 님, 아휴. 태호야.”

“김훈성 실장님, 뭐요, 뭐.”

“일단 대답할게. 들어봐. 결론부터 말하자면, 틀렸어. 그렇지, 아무한테도 말을 안 했는데 네가 알 수가 없지.”

내가 불쾌한 기분을 숨기지 않고 말을 가로막으려 입을 막 떼려는데 그는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곧장 말을 이었다.

“부서 이동, 이까지만 맞아. 그런데 내가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너를 다른 부서로 옮기겠어? 아니지. 게다가 네가 없으면 영업부에서 신규 프로젝트를 따오더라도 내가 전개할 수가 있겠어? 맨날 이직 준비나 하고 있는 저 치들을 데리고 내가 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야. 가만 보면 이 회사는 이름만 번지르하지 아주 무슨 이직 사관학교라니까. 아무튼 오히려 반대로 생각을 해보면, 그러니까 내가 없어도 우리 팀은 돌아간다……. 내 말이 틀려?”

훈성은 오른손 검지 손톱 끝으로 책상의 매끄러운 표면을 살짝 치더니 틈을 두었다.

“알기 쉽게 말씀해보세요.” 내가 말했다.["부서이동 어쩌고는 맞는다며. 알아듣기 쉽게 그냥 편하게 말을 해봐요, 김 실장님.”

그는 고개를 뒤로 획 젖히더니 천장의 조명을 방향 없는 시선으로 쫓으며 들릴 듯 말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아니라, “ 그가 고개를 내리며 현기증이 온 듯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내가 갈려고. 우리 십 년 차 조태호 님, 내가 어느 부서로 가려고 할까, 한 번 맞춰봐.”

할 말을 잊은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부서라고는 오로지 포렌식 연구실로 뿐이었다. 칠 년 동안 함께 일한 훈성을 나는 회사 내의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해 왔지만,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그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내가 아는 그는 모든 급여를 모조리 예금하고 평생을 부모명의의 신용카드로 생활해 왔다. 이미 물려받은 재산도 상당했고, 훗날 물려받을 재산은 더욱 많았다. 자리 욕심도, 돈 욕심도 없는 그에게 회사로부터 필요한 것은 그저 명함 한 장이었다. 실로 그와 나는 이름난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그는 관리직에 올랐다. 불필요한 스트레스로부터 탈출하고 한직에서 가늘고 긴 직장생활을 할 수 있다면 충분히 그는 그 선택을 할 수 있으리라. 훈성과 달리 가진 것도 물려받을 것도 없지만 나 역시 큰 욕심이 없었으므로 그와 친하게 어울릴 수 있었다. 직장에서의 명예욕에 무관심한 것뿐만 아니라 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비혼을 고집하고, 빚 없는 집이 있고, 상대적으로나마 씀씀이가 크지 않다는 공통점도 한 몫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이렇다 할 신념 따위 없이 살아온 내가 처음부터 꿈꿔온 삶의 모양이 비혼과 무욕으로 귀결되리라고는 상상해보지 않았었다. 내게도 결혼을 약속했던 연인이 있었다. 그녀를 만났을 때 나는 대학교 졸업을 두 학기 앞두고 취직을 한 지 한두 달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학생으로서나 사회초년생으로서나 각각의 책임은 남들의 보통만큼조차도 내게는 버거웠다. 대대손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기에 나는 부모님과의 애정을 지키는 데에 굵고도 질긴 선을 지켜왔고, 그 선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견고해지고 자연스러워졌다. 내가 부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없음을 이해하는 만큼, 그들도 내가 밑 빠진 독 같은 집안에 돈을 보태지 않을 것을 인정함으로써 한 해에 두어 번 만나는 명절에 나의 가족은 다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야만 할 만큼 나는 가진 게 없었고, 수입의 대부분은 대학 일 학년부터 쌓여왔던 학자금 대출금의 변제와 남은 학기의 등록금과, 월세. 그리고 생활비로 쓰였다. 그녀는 그런 나의 성실함을 늘 칭찬했다. 그녀와의 데이트는 여름이면 더운 곳에서, 겨울이면 추운 곳에서 했지만 그녀는 불평하지 않았다. 그녀의 삶이란 나의 것보다도 고단했다. 과제와 논문을 제출하는 대신 강의실 출석을 하지 않아도 되는 조기취업 상태였던 나와는 달리, 그녀는 낮에 강의를 듣고 밤에는 바(Bar)에서 일했다. 귀하게 자란 듯한 외모와는 다르게 그녀 역시나 돈과는 거리가 먼 가정에서 태어난 탓이었다. 그녀에게는 티 없이 맑고 화사한, 내 인생을 걸어도 좋을 무언가가 있었다. 학생이 본연의 업인 공부에 집중하고 장학금을 타야지 아르바이트 때문에 공부에 소홀하면 안 된다, 라고 타박하는 교수에게 '장학금을 받으려고 공부에만 매진하면 그래서 장학금을 받으면, 월세랑 생활비는 어디서 벌어요?'라고 까르르 웃는 얼굴로 반박할 줄 아는,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와 그녀는 만난 지 얼마지 않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레 결혼을 약속했었다. 지금처럼 열심히 살다 보면, 우리는 언젠가, 분명히, 꼭. 다만 그 약속에는 적확한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래 그래서였다. 마음의 온도는 봄으로 시작하는 계절의 순서와 닮았다. 내게 필요한 만큼의 돈을 모으려면 사계절이 쉰 번은 지나야 함을 어렴풋이 깨달아가던 초가을, 진눈깨비 한 번 내리기 전에 그녀는 떠났다. 철없이 목표했던 그만큼의 돈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도 모으지 못하리라고 스물일곱 살의 나는 그 겨울 내내 생각했다.

이듬해 일 월초에, 새해맞이를 핑계로 모인 술자리에서 그녀의 지인으로부터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었다. 이별조차 초라했던 나와의 관계는 빠르고도 수월하게 정리됐고, 그녀는 유복하게 자라 모난데 없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고 지인이 말했다. 눈이 부시게 높게 높게 하늘로 날아오를 그녀가 하마터면 나에게 발목이 잡힐 뻔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를 생각하며 나는 소주를 입에 털어 넣고 너털웃음을 쳤다. 나의 반응이 유쾌했던지 지인이 말을 이었다. 그녀는 지난 성탄절에 결혼식을 올렸고, 몰디브로 한 달간의 신혼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그녀가 남편을 언제 그리고 어디서 만났는지 묻고 싶었지만,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르던 질문을 미끈하게 뭉쳐진 가래처럼 삼켰다. —훗날, 천국 같은 곳이었다고. 꼭 한 번은 가보라고. 언젠가 그곳을 다녀온 동료가 말해준 기억이 났다.— 산산이 깨진 소주병의 유리가루 같은 눈바람이 호프집 유리창을 때리는 겨울, 따스한 인도양에서 그녀는 행복하리라, 나를 잊었으리라. 스피커에서 울리는 음악소리를 이기려 저마다 목에 핏줄을 세워가며 큰 목소리로 떠들어대는 술집의 한 귀퉁이에 오도카니 앉아 나는 조용히 뇌까리며 술잔을 채웠다. 그 술자리로부터 며칠 후, 나는 원룸의 집주인에게 방을 부동산에 내놓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그녀와의 미래를 위해 모으기 시작했었던, 내가 세대주가 될 가족의 미래를 그리며 모으고 있던 목돈에다 은행의 대출을 보태어 작고 낡은 주택을 구입했다. 일월 이십오 일이 되기 전에 이사를 하려 했지만 이사는 이월 중순에야 할 수 있었다. 세월은 빨리 지나갔다. 매달 따박따박 통장으로 들어오는 급여는 해가 지날수록 불어났고, 한 해에 한 번씩 나오는 성과급도 홀로 사는 내게는 충분하고도 과했다. 결국 나는, 조기 상환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며, 고객님의 경우 손해가 이만큼이라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은행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출금을 조기상환했다. 돈은 통장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갔다. 훈성이 같이 하자고 끈질기게 조르던 골프 대신에 업무와 연관되는 공부를 취미로 삼은 덕분이기도 했다. 이따금 누군가의 소개로 여자를 만나기도 했고 여러 달 동안 관계가 지속된 적도 더러는 있었지만 결국 그녀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나와 헤이지기를 원했고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을 꺼낸 경우는 없었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나는 그녀들의 말에 따라 헤어지기를 택했다. 때로는 먼저 헤어지자고 말해준 상대가 고맙기도 했다. 그녀와 헤어진 지 십 년이 넘도록 나는 그렇게 나름의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물욕도 명예욕도 없이, 아무런 큰 욕심 없이,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생각이 이즈음에 이르자, 나는 훈성의 입장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나조차도 삶이 만족스럽거늘, 지금보다 더 고된 일을 무엇하러 그가 좇을 텐가. 보안부서의 장점이라면, 바쁠 때에는 세로진 주름이 미간을 쥐어짜고 깜빡임을 잊은 눈꺼풀이 사포처럼 뻑뻑해지지만 한가할 때에는 졸음이 쏟아질 만큼 여유롭다는 점이다. 오늘은 이렇다 할 업무가 없었음에도 하룻낮 내내 졸음이 오지 않았다. 출근할 때의 역순으로 가방을 챙겨 퇴근할 때, 건물을 나서며 올려다본 하늘에서 저녁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유월의 해는 길었고, 조금은 낯설었다. 다시 사무실로 올라가 공부나 할까 싶기도 했다. 내가 발걸음을 되돌리지 않은 것은 차 조수석 아래의 짐이 떠올라서였다. 건물을 오른쪽으로 돌아 주차장에 이르러서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가방을 차 트렁크에 던져 넣었다. 불붙은 담배가 바스스 타들어갔고, 짙고 무거운 연기가 한숨과 함께 습한 공기를 물들였다.

“그렇게는 안 될 거야.” 회의실에서 내가 훈성에게 말했었다. “네가 그 팀으로 갈 수는 없어. 이제 와서 나더러 실장을 맡으라는 거야, 아니면 나더러 네가 아닌 저 치들 중 하나를 보스로 모시라는 거야. 나는 둘 다 싫어. 차라리 내가 지원하지.” 훈성이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했다.

“언제까지 실무자로만 남으려고 그래, 일단은 들어봐. 보안부서 실장이라는 내 자리 말이야. 연봉이 상당해. 게다가 관리직 수당도 나오지. 사람마다 차이야 있겠지만, 원천징수 상으로 나는 오십 퍼센트 가까이 올랐었어. 태호 너라면 더 오를 테지. 실수령액을 한 번 생각해 봐. 무시할 수 없는 숫자 아니야?”

협상을 위해 머릿속에 미리 써두었던 말이었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훈성이 지나치게 호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틈을 두며 차분하게 내 반응을 기다렸다.

“관리직이라면 절대로 사양이야.” 나는 잘라 말했다. 그의 안쪽 눈썹이 찌푸려지고 얇은 이맛살에 주름이 생겼다. 역시나, 하고 체념하는 것 같기도 했고 나를 설득하기 위한 다른 방도는 없을까, 하며 고민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내가 말을 덧붙였다.

“전현희 부서장님이나, 포렌식팀 이수연 실장이나, 김 실장님이 지원한다 그러면 반기지 않을 거야.”

나의 말에 훈성은 어째서? 라고, 소리 내지 않고 물었다. 전현희 부서장이 사내 입지를 다지기 위해 당신을 필요로 한다는 점, 관리직에서 실무직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서의 업무 체계에도 위협이 되는 점, 관리직에 있던 사람을 이제야 막 입사한 이수연 실장에게는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점,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반박거리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나는 그런 따위를 열거하기가 일순간 귀찮아졌다. 나는 짧은 답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뱉었다.

“너 잘 모르잖아, 포렌식에 대해서.” 훈성은 눈을 떨구고 아랫입술을 넓적하게 비죽대다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긴 해. 그건 맞는 말이지.” 그는 고개를 떨군 채로 말이 없었고, 나는 그 모습을 쏘아보았다. 나는 그가 지금의 자리를 지키는 쪽으로 마음을 굳힐 수 있도록 마지막으로 몇 마디를 보탰다.

“너는 관리직이 어울려. 괜히 포렌식팀에 지원한다느니 불필요한 말을 꺼내가지고 미운털 박힐 필요 없잖아. 이제 막 입사한 박준기 씨나, 입사한 지 만 일 년이나 됐던가? 김광수 씨나 다들, 아직 가르칠 게 많아.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도 네 역할이지. 네가 뽑은 사람이니까. 실장님이 다른 부서로 가버리면 마음이 흔들릴 거야. 네가 지원했다는 소문만으로도 흔들릴 테지. 그렇다고 그 친구들 중에 하나를 포렌식팀에 추천하면 포렌식 팀이 보안부 연구실을 뭘로 보겠어? 이수연 실장이 아주 대놓고 무시할걸? 아무튼, 겨우 인원수 다 채워서 좀 안정되려고 하는 참인데, 실장이 돼서 그러지 말아. 우리 보안부 연구실, 아직 어린 친구들이 대부분이야. 이때다, 하고 이직할지도 모르잖아. 그러니 잊어버려.”

그는 짧게 숨을 뱉고 고개를 들어 편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어색하다 말하기에는 편한, 불편하다고 말하기에는 익숙한 침묵이 늘어져갔다. 내가 셔츠를 들추어 손목시계를 들여보자 그제야 훈성이 말했다.

“어차피 각 실에서 한 명씩은 추천해야 해. 우리 보안부 체면도 있고 하니까 네가, 우리 조태호 님이 대승적 차원에서 자원했다고 보고할게. 포렌식팀이 영 별로인 것 같으면, 면접 볼 때 그 자리에서 딱 잘라 싫다고 말해버려. 나도 전현희 부서장님한테는, 부사장님이 신설한 팀에서 나온 협조요청인지라 딱 잘라 거절할 수는 없으니까 제스처 정도는 보이는 거다, 라고 보고 드릴게.” 사내정치라면 도가 튼 전 부서장에게서 배운 걸까. 뭔가 보기 좋게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순간 내 얼굴이나 귀가 붉어지지는 않았을까 몹시 신경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스스로의 직감에 가까운 느낌을 쉽사리 인정할 수는 없었다. 훈성이 관리직에 올라 협상 능력이 성장했다고 인정하는 것보다는, 내가 자원한 걸로 매듭 져 지기를 인정하는 편이 나았다. 이수연 실장이 직접 찾아와 지원을 종용한 점은 석연찮지만, 훈성의 말처럼 면접에서 거절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회사에는 포렌식에 관심이 있어 자원한 사람이 있을 테고, 기존의 조직에 염증을 느꼈던 사람 그래서 이미 이직을 염두에 두었던 사람도 있을 터였다. 게다가 내부채용에서 인원이 모이지 않으면 외부채용을 하면 그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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