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잔향의 문
어느덧 나는 한 자리에 서서 세 개비째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목은 까끌까끌했다.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나는 곧장 차에 올라탔다. 운전을 할 때에는 잡념을 떨치는 게 좋다, 라는 생각으로 나는 집으로 운전하는 동안 머리를 비우며 뉴스를 들었다. 핵전쟁의 위협이 가시화된다며 우려하는 중동 특파원의 급박한 목소리도, 한국인 선수가 뛰고 있는 유럽 축구팀의 우승을 전하는 스포츠 전문기자의 들뜬 목소리도, 세기의 발견이라는 물리학계의 연구결과를 담담한 목소리로 과장된 것이라며 인터뷰하는 국내 전문가의 목소리도, 오른쪽 귀로 들어왔다가 왼쪽귀로, 반쯤 열린 차창밖 도로 위로 모두 다 흩어졌다. 여느 월요일보다 퇴근길 도로는 한산한 편이었고 집까지 도착하는 데에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나는 잊지 않고 조수석 바닥의 종이가방을 챙겨 들고 차에서 내렸다. 귀가 후 한 시간이 넘도록 나는 거실 소파에 오도카니 앉은 채 탁자에 놓인 그것을 노려보고 있었다. 종이가방 속에 비스듬히 들어있던 물건을 처음 끄집어내었을 때 하마터면 나는 그것을 냅다 집어던질 뻔했다. 진짜와 꼭 닮은 장난감 뱀을 꺼내 들었을 때와 비슷한. 하지만 불결한 기분이었다. 그저 작은 호기심으로 들춰본 종이가방 속에서 꺼낸 물건은 자위기구로, 남자의 성기를 놀랍도록 세밀하게 닮아있었다. 험상궂은 거인을 데려다 그의 성기를 석고로 본을 떠서 만든 것만 같았다. 얼어붙은 자세로 손에 든 살구색 기구의 평평한 아래에는 단계별 스위치가 달려있었고, 그 옆에는 건전지함이 있었다. 편심추가 달린 전동기라던가 진동소자 따위를 동작하기 위한 것이리라. 이리저리 스위치를 움직여보았지만 그것은 작동하지 않았다. 건전지함을 열어보자 여섯 개의 AAA 전지를 위한 모든 슬롯이 비어있었다. 집에 남은 건전지가 있던가,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던 순간 나는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와 함께 몸서리를 쳤다. 다만, 혐오의 대상이 그 물건이었는지, 나 스스로였는지, 혹은 둘 다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조가 가득한 헛웃음을 허공에 내뱉고 서둘러 건전지함을 닫았지만 자책은 가시지 않았다. 그러고는 거실 탁자에 그것을 세워둔 채로 나는 소파에 앉았다. 그렇게, 출근할 때의 옷차림 그대로 나는 한 시간이 넘도록 굳어있었다. 집으로 운전해 올 때만 해도 조금은 허기가 졌었다. 운전대를 잡은 채, 앞유리 넘어와 사이드미러에 비치는 차들을 살피면서, 나는 냉장고에 든 재료들을 생각했다. 야채칸의 부추를 씻어다 전을 부쳐먹을까, 냉동고의 만두를 튀겨먹을까, 마침 대형마트에서 헐값에 산 드라이진을 냉장고에 넣어뒀으니 안주삼아 먹을까 생각했었다. 집에 들어서고는 하필이면 부엌으로 걸음 하기도 전에 마치 장 봐온 물건처럼 들고 온 종이가방 속을 먼저 봐 버린 것이다. 그것을 본 순간부터 달아난 입맛은 돌아오지 않았다. 밤 열 시가 다되어갈 즈음에서야 나는 소파의 주름에 맞게 구겨져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등이 젖고 눈곱이 잔뜩 낀 것이,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사위가 어두워 손에 잡히는 스탠드 조명을 켰더니 탁자 위에 여전히 우뚝 서있는 흉물스러운 음경이 눈에 들어왔다. 거실바닥에 떨어진 종이가방을 주워다가 나를 주눅 들게 만드는 그 물건을 집어넣었다. 연후 언제고 술동무를 청하거나 출근 전까지 몸을 뉘일 곳이 필요하다며 찾아올 것이 예상되었으므로, 비교적 덜 지저분한 서랍 하나를 열어다가 종이가방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고 그의 방문 전까지는 마냥 잊어버리고 싶었다. 터지지 않는 풍선을 삼킨 듯 속이 불편했다. 마음 한편이 묵직이 갑갑해져 왔다. 그러고는 곧 까닭 모를 짜증이 등골을 타고 올라 뒷목을 휘감았다. 재킷과 셔츠, 바지와 양말을 아무렇게나 벗어서 침실문으로 집어던졌다. 그래 봤자였다. 결국 나는 숨을 몰아쉬고 양말부터 재킷까지 고개를 숙여 하나하나 주워야 했다. 청소보다 중요한 건 애초에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라고 혼자서 뇌까렸다. 재킷과 바지를 반듯이 펴서 걸고, 속옷과 양말을 벗어 빨래바구니에 넣고, 더운물로 한참 동안 샤워를 했다. 푸석하게 마른 수건에서 먼지가 빛났다. 세탁기가 문제인 건지, 세제가 문제인 건지. 아무리 값비싼 수건을 사도 늘 이모양이었다. 얼굴을 닦고 머리를 말리고 났을 때 묻어있는 보풀 따위가 없다는 게 내게는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트렁크 팬티와 셔츠 아래에 늘 받쳐 입는 흰색 반팔티를 걸치고 머리를 말리는 동안 혓바닥도 같이 말라갔다. 온몸이 갈증을 호소했다. 얼음이 남아있던가, 머릿속이 냉장실에 넣어둔 드라이진으로 가득 차서는 헤어드라이어를 끄고 여전히 축축한 머리칼을 하고서 부엌으로 향했다. 얼음틀은 비어있었다. 냉장실에서 꺼낸 싸구려 드라이진이 마음에 쏙 들만큼 시원할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얼음을 새로 얼리거나 밖으로 나가기 또한 싫었으므로 나는 체념한 채 냉장고 문을 닫았다. 경쾌한 코르크 소리는 만족스러웠고, 바닥이 두껍고 부드럽게 각이 진 유리잔에는 얼음이 없는 만큼 더 많은 술을 따랐다. 선채로 왼손으로 식탁을 짚은 다음 오른손으로 잔을 들어 향을 맡고, 윗입술을 적신 다음 혀로 훔쳤다. 허리를 펴고 몸을 틀어 부엌 창밖을 바라보니 언제나처럼 부러질 듯 부러지지 않는 나뭇가지가 가로등을 가리며 새까만 그림자를 기분 나쁘게 흔들고 있었다. 나는 그림자를 노려보며 잔에 남은 술을 숨 한번 고르지 않고 단번에 비웠다. 출근 시각 전에 모르는 번호로부터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나의 전화기에는 사내 비상연락망 엑셀파일에서 변환한 전 직원의 번호가 저장돼 있었으므로, 간밤에 온 부재중 전화의 주인은 필시 고객사 보안 담당 실무자이거나 당직자일 터였다. 새벽 세 시에 여섯 번씩이나 연락을 했다면 급박한 일일 텐데— 싶다가도, 정말 급했으면 문자 메시지라도 남길만 한데 그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어쩌면 자체적으로 해결이 되었나 보다—라는 쪽으로 생각이 옮겨갔다. 우선은 출근부터 한 다음에 연락을 해보면 그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