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잔향의 문
“팔자 좋네, 사기업 직장인 님. 어?”
그가 돌아앉아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소방공무원 나으리. 불철주야 고생하시는데 어떻게, 가배 한 잔 드릴까?”
“어, 향 죽인다. 한 잔 주라. 졸려서 죽겠다.”
“향은 개뿔, 맹물만 끓고 있는데.” 일단은 저기 소파에서 좀 쉬고 있으라—하고 채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는 이미 털썩하고 소파 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혼자 사는 나로서 유리잔 하나와 머그잔 하나를 번갈아 쓰면 부족함이 없었기에 이따금 연후가 찾아들면 무엇을 마시든 간에 둘 가운데 하나를 쓰게 했었다. 부엌의 식탁 위에는 내가 먹다만 커피가 머그잔에 담겨있었고, 유리잔에 끓는 물을 부으면 깨져버릴까 염려가 되었다. 찬장을 열어 머그잔 하나를 꺼내다 그간 쌓였을 먼지를 흐르는 물에 씻으며 돌연 이 잔을 마지막으로 꺼낸 게 언제였는지가 궁금해졌다. 한두해 전, 혹은 서너 해 전인지도 몰랐다. 늘 쓰던 녹두색 머그잔과 꼭 같은데 그 붉은 색깔만이 달랐다. 한 쌍의 이 머그잔은 수년 전에 만나던 여자친구가 집구석에 제대로 갖춰둔 게 없다느니 술잔만 있고 옳게 된 물 잔 하나가 없다느니 핀잔하며 사다 준 것 중에 일부였으나 그녀가 지난 인연 중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잔을 다 씻고 물기를 털고 인스턴트 커피 가루를 부으면서도 그녀의 이름은커녕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르는 얼굴은 있었지만 그녀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 이후의 다른 여자친구에게 그 잔으로 차를 내놓았던 기억은 남아있었다. 다반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하므로 나는 양손에 머그잔을 하나씩 들고 거실로 갔다. 찬물을 타 미지근한 녹두색 잔과는 달리 붉은 잔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올랐다.
“내가 차가운 거.” 연후가 소파에서 고쳐 앉으며 말했다.
“차가운 거 아니고, 미지근한 거야. 그리고 이건 내 거야. 먹다 남은 거에 다가 더 탔거든.”
“삼복더위에 막 퇴근하고 온 사람한테 무슨 뜨거운 커피를 갖다주냐.”
“아직 아침이라 덜 더워. 나만큼 전기를 막 쓰는 사람도 없어. 에어컨이건 뭐건. 그러니 이렇게 시원하지. 게다가 너는 교대를 마치기가 무섭게 샤워부터 했을 테고 여기까지는 운전해서 왔겠지, 쾌적하게. 고생하는 거야 알겠다만 덥기는 뭐가 덥냐.”
나는 너스레를 떨며 방금까지 연후가 발을 올리고 있던 스툴에 팔꿈치를 걸치고 바닥에 모로 앉았다. 그가 장단을 맞추며 통쾌하게 항복했다.
“그래, 네 말이 다 옳다. 속옷도 갈아입고 왔다, 징그러운 새끼.”
그는 얼굴로 짜증을 억지로 쥐어짜 내며 툴툴댔지만 이윽고 붉은 머그잔을 후후 불며 커피를 홀짝였다. 지나가는 생각으로 내가 물었다.
“아까 네가 향이 좋다고 했잖냐. 진짜로 커피 향이 나던?”
“나던데? 나는 웬일로 네가 커피포트라도 하나 장만했나 싶더라만.”
“아침에 마시다 말고 잔에는 반도 안 남은 커피를 부엌에 올려뒀었거든. 그 냄새를 사람이 맡을 수가 있나 싶어서.”
“네가 둔해서 그렇지. 커피 향은 생각보다 짙다. 마셔봤자 잔에 든 커피만 마셨지 공기 중 입자를 네가 뭘 어떻게 해.”
“저놈의 물건 비싸기만 하고 아무짝에 쓸모없네.”
나는 작은방 입구와 소파 사이에 세워둔 공기청정기를 턱으로 가리키며 한 마디하고 말았는데, 그 뒤로 대화가 뚝 끊기었다. 정적이 길어졌다. 누가 먼저 그 민망한 이야기를 꺼낼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말을 꺼낸 나였으므로 나의 불편이 그의 불편보다는 덜했을 거였다. 게다가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면 연후는 내가 지난 저녁 무엇 때문에 전화를 한 것인지 알고 있을 터였다. 그때는 아직 퇴근 전이라 통화 중에 경황이 없었을지 모르겠으나, 밤새 대부분의 시간 깨어있었을 그가 골몰하지 않았대도 내가 전화한 까닭이 뇌리에 저절로 떠오르기에는 충분했으리라. 그러니 오늘 아침 전화를 대신하여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것이다. 결국 더 불편한 사람이 말을 꺼냈다.
“그래, 어제 하려던 이야기가 뭐였어?”
“짐작은 했을 것 같은데. 하연 씨가 전화를 했더라.”
“하나 언니가? 너한테?”
“모르는 척하지 마라, 네가 아니면 그분이 내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겠냐.”
“야 아니야. 나 진짜 아닌데?”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으나 진심인 듯 아닌 듯, 미안하기도, 의뭉스럽기도 했다.
“그러면 전화를 하면 될 일을 뭣하러 직접 왔냐. 온다고 미리 말 한마디 없이.”
“언제는 내가 말하고 왔나. 진짜 내가 네 전화번호 알려준 거 아니라니까? 황당한 새끼네 이거? 아니, 내가 네 연락처를 하연이한테 말했다고 치자. 그래서 뭐, 걔가 너한테 고백이라도 했어? 무슨 말을 들었길래 그러냐. 뭔가 중요한 말을 들었으니까 나한테 전화했겠네. 한 번 듣기나 해 보자.”
나는 크게 숨을 내쉰 다음 작심을 하고 말했다.
“자위기구, 여성용 자위기구 말이야. 이래도 모른 척할래?”
연후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입술을 입속으로 숨겼다. 내가 계속했다.
“그러니까, 어제 아침에 출근을 해서는 내가 하연한테 전화를 했어……”
“뭐 이 미친놈아, 하연이가 너한테 전화를 했었다며?”
연후가 말을 가로채기에 나는 급하게 그를 어르려고 손바닥으로 스툴을 두드렸고, 그가 다시 들을 준비가 된 표정을 하기에 설명이 뚜렷하도록 주의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 게 아니고, 일단 들어봐. 전날 밤에, 아니다. 그러니까 목요일에서 금요일로 넘어가던 새벽이었어. 오전 세 시 즈음이야. 그때 부재중 전화가 여러 번 왔었어. 일부러 전화를 안 받은 게 아니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부재중 전화가 여섯 건이나 있는 걸 알게 된 거고. 참, 나는 모르는 번호였으니까 업체 담당자가 전화를 했으려니 싶었어. 어쨌든, 나는 출근을 하고 나서 그 번호로 전화를 했거든? 그랬더니 대뜸 내 이름을 대면서 어디냐고 따져 묻는 거야. 나는 사무실이라고 그랬지. 참, 내가 그때까지만 해도 상대가 누군 줄 모르고 있었는데 본인이 하연이라고 하는 거야. 이하나의 언니, 이하연이라고.”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연후가 내 말을 잘 알아듣고 있는지 살폈다. 그의 두 눈은 마치 그래서, 뭐, 어쩌라고, 라며 묻는 것만 같았다. 그가 귀찮다는 듯, 보채는 듯 턱짓을 하기에 내가 계속했다.
“그러더니 대뜸 나한테 자위기구가 어디 있냐고 묻더라? 나는 뭐,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도 없고 말이지. 그래서 그냥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얼버무리고선 끊어버렸어.”
그렇게 내가 말을 마치자 연후는 앙다문 입술을 둥그렇게 내밀고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이윽고는 목을 고치며 마른기침을 했다. 그가 고개를 숙여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게 다야?”
“이게 다야.”
“그 뒤로 연락은 없었고?”
“없었고.”
“그건 지금 어디에 있는데?”
“저기, 서랍 안에.”
“……. 가져와봐.”
거실 탁자 위에 흉물스러운 자위기구를 올려두고, 나와 연후는 각자의 잔을 손에 쥔 채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없이 자위기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고, 연후는 뭔가를 파악해 보려 애쓰는 눈치였지만, 그가 무언가를 읽어낸 것 같지는 않았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낼지 망설이는 침묵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소파의 쿠션이 내 허리를 살짝 밀어 올렸고, 커피가 식어가는 소리가 귀에서 들릴 듯했다. 연후는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나도 마셨다. 쓴맛이 혀끝을 쓸고 지나갔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아 조심스럽게 자위기구를 들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묵직한 무게감이 손바닥에 실렸다. 지나치리만큼 실제의 피부를 모방해 그 촉감에 나는 진저리가 났다. 손가락 끝으로 느껴지는 미세한 탄성도 징글징글했다. 자위기구의 표면은 아주 조금의 먼지가 묻어 있었을 뿐 전반적으로는 깨끗했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흉물스러웠다. 그 순간, 표면과 약간 어긋나는 선이 손끝에 걸렸다. 쇠심줄 같이 흉포한 거인의 음경, 그 아래쪽 힘줄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이음매가 아니라 칼집 같은 틈이었다.
“새끼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칼집 같은 틈이 있어. 단순한 표면 흠집은 아니야. 안에 뭔가가 있는 것 같아.”
그는 고개를 숙이고 홈이 있는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 내가 뭔가를 할 새도 없이, 그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야. 내가 처음 하나를 발견했을 때, 내가 말한 적 있지? 타살인 것 같다고. 내가 하나 집에 갔을 때 제일 먼저 본건 하나의 정수리였어.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머리카락도 아래로 쓸어내린 듯이 늘어져있더라. 내가 급하게 문을 젖히고 들어서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게 꼭…… 귀신같더라.”
나는 채근하지 않고 그가 말을 이을 때까지 잠자코 있었다.
“평소에도 내가 말없이 들르면 늘 입고 있던 상아색 실내용 원피스를 그때도 입고 있더라. 목욕가운 허리띠 같은 걸 목에 감고, 무릎을 꿇고……. 팔은 축 늘어져 있었어, 손끝이 바닥에 닿을 듯 말 듯하게. 내가 바로 눕힐 때서야 그 팔도 굳어있는 걸 알았어. 처음엔 실수로 저지른 자살이라고 생각했어. 너무 두서없게 얘기해서 미안하다. 아니, 아무튼 그렇게 보였으니까. 말하기도 민망하지만 자기색정사—라고, 용어도 있어. 사람이 자위를 하다가 스스로 목을 조르면서 쾌감을 하…… 씨팔. 아니 근데, 이상했어. 내가 구급대원인데. 죽은 사람, 자살한 사람을 하루이틀 보는 직업이겠냐고. 무언가 분명히 이상했거든. 그런데, 처음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뭔가 이상한 거야. 자세가 굳어있으니까 옆으로 뉘었는데 꼬리뼈에 뭐가 툭 튀어나와 있더라. 이 썩을 물건이 하나 몸 안에 깊숙이 꽂아져 있는 채였다고. 말이 되냐 이게? 생전 그렇게 싫어하던 러브젤이 놓여있질 않나, 야. 저 크기를 좀 봐라. 저게 맞냐? 처음에는 놀라서 실감이 안 나다가 그걸 보고서는 현실감각도 사라지더라. 그래도 어떡해. 기가 막힌 와중에도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 그러면서 저 물건 끄집어 꺼내고, 사진 찍고—직업병이 진짜 무서운 거다 너—, 경찰에 신고하고, 하나 어머님한테 전화하고 그랬더랬다. 그러니까 그건 네가 알아서 버리던가, 굳이 하연한테 연락해서 찾아가라고 하던가, 직접 돌려주던가 네 마음대로 해라. 하연네 집에 가보면 너 깜짝 놀랄거다.
“응?”
“파르나스타워. 거기 관리비만 매달 삼백이래. 지하 주차장에 외제차밖에 없더라.”
나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그 이름은 내 머릿속 어딘가에 단단히 박혔다.
한바탕 쏟아낸 연후의 눈에 당장이라도 넘칠듯한 눈물이 고였고, 마치 그 순간 그 장소에 앉아있는 것같이 숨을 고르게 쉬지 못하는 그는 그야말로 처량해 보였다. 저런 놈이 그간 어떻게 참고 일을 했을까. 연후는 겨우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나를 노려봤지만, 나를 향한 분노는 아니었다. 결국 그는 마치 밤샘 근무에 기인했을 피로에 항복하듯이 다시 고개를 젖히고, 바로 하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지 않고 손에 든 자위기구를 내려놓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시 말을 꺼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연후야. 그런데 여기 뭔가 있다고.”
“몰라, 나는. 어차피 어머님도 동네 부끄러워 사건접수도 안 하겠다더라. 부검도 그렇게 못하게 난리를 치더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하기는 하나 본데. 아마 곧 화장할걸. 안 가려고, 나는. 다 잊을 거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연후는 다시 자위기구를 노려봤다. 나는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그 역시나 소리 내 말할 수 없는 호기심이 있음을 공감했다. 부엌 서랍에서 쇠젓가락을 하나 꺼내왔다. 끝이 납작한 젓가락이었다. 내가 젓가락을 들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고개를 살짝 멍하니 내가 무얼 하는지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자위기구를 손에 들고, 미세한 틈에 젓가락 위쪽 끝을 찔러 넣었다. 약간의 저항이 느껴졌고, 안쪽 어딘가에 걸린 감촉이 있었다. 젓가락을 한편으로 몰아 몇 번을 툭툭 쳤더니 자위기구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스르륵 돌아가며 밀려 나왔다. 반투명한 테이프로 앞뒷면이 감싸진 작은 물건이었다.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평평한 마이크로 에스디카드가 든 보호캡이 테이프로 고정되어 있었고 테이프 위에는 장난스럽게 붙인 듯한 하트 모양의 스티커가 하나 붙어 있었다. 누군가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이 영상이나 사진으로 들어있겠거니 싶은 메모리카드와 자위기구를 내가 탁자에 내려놓는 모습을 연후는 잠자코 바라만 보고 있었다. 순간 그의 눈이 번뜩였고, 그가 손을 뻗어 메모리카드를 집어 들었다.
“야, 이거 지금 봐봐. 어? 내가 이걸 씻어서 챙겼겠냐 그 경황에? 아니지. 훔치듯이 챙겨 나온 거라고. 괜히 어머님한테 말했다가 욕이나 처먹었지. 그런데……”
그가 보란 듯이 메모리카드를 꼬집어 들고서는 검지와 중지로 문지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미끄럽지가 안잖아!”
내가 손을 뻗자 그가 내 손바닥에 메모리카드를 탁 하고 내려놓았다. 그가 턱짓으로 시킨 대로 나는 그의 동작을 흉내 내며 문질러보았고, 그의 말대로 전혀 미끄럽지 않았다. 고인이 정말로 육중한 기구에 러브젤을 발라 자위를 했다면 아무리 좁은 칼집이라도 그 미끄럽고 끈적한 액체가 스며들지 못할 까닭이 없어 보였다. 어쩌면 연후의 말대로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타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목뒤가 오싹했다.
“네 말이 맞아.” 억지로 진정하는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그 거, 건전지도 들어 있지 않았어.”
“그래? 그런데, 네가 그걸 어떻게……. 어?” 그는 말문이 막히는 듯 말을 삼켰지만 꽤 오래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 또한 그가 뜻하려 했던 것을 이해하자마자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입술 안쪽을 깨물며 시선을 피했지만 수치심이 가실리는 없었다. 그러나 나에 대한 그의 경멸은 순간이었고, 그 경멸은 결코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이내 둘의 표정은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침묵을 이용해 나는 테이프를 벗겨내고 케이스에 든 메모리카드를 꺼냈다. 새끼손가락 손톱만큼이나 작고 얇은, 오랜만에 보는 마이크로 에스디 카드였다. 나는 그걸 다시 탁자에 올려놓았다.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두 눈으로 그 실마리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연후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그것에서 무언가가 나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결국, 하연의 것이었다. 연후도 나도 그 사실을 몰랐다. 내가 말했다.
“하연가 전화해서 찾던 게 이건 가봐. 메모리카드 중의 하나야.”
“이렇게 작은 게?” 그의 눈썹이 의심으로 꿈틀거렸다.
“흔한 거야. 네 스마트폰에도 들어있을걸.”
그는 수긍하는 얼굴로 나를 힐긋 쳐다보고 머릿속에서 무언가를 재조립하는 표정이었다. 그의 입술이 조금 열리다가, 다시 닫혔다. 연후는 말없이 메모리카드를 노려봤다.
“이걸 어떻게 할 거야?” 연후가 물었다.
“네가 알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물건인데.” 내가 받아쳤다.
그러고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다가 결국 자리를 일어섰다. 침실로 가 노트북을 꺼내왔다. 어쨌든 확인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었다. 노트북을 켠 다음 USB형 카드 리더기에 메모리카드를 밀어 넣고 노트북에 연결했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연후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등을 소파에 기대 있었고, 눈은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탐색기 창이 떴고, 하나의 폴더가 표시되었다. 폴더의 이름은 숫자 하나였다. 0. 나는 마우스 커서를 천천히 움직여 그 폴더를 클릭했다. 폴더 안에는 단 하나의 파일만 들어 있었다. 파일 이름은 [sys_trace_0.bat]이었다. 나는 파일을 더블 클릭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시스템은 무언가 잠깐 로딩하는 듯하다가 곧 조용히 멈췄다. 실행 권한을 바꿔 다시 시도해 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나는 메모장으로 파일을 열어보려 했다. 화면에는 깨진 문자들이 나타났고, 대부분은 기호와 알 수 없는 기계어처럼 뒤섞여 있었다. 일반적인 스크립트 구조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연후는 옆에서 조용히 나를 지켜보았다. 나는 워드패드, 코드 에디터, 바이너리 뷰어까지 시도해 보았지만, 내부 구조는 그 어떤 형식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파일 크기는 3MB 남짓이었고, 그 안에는 단순한 실행 배치 파일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한 이진 데이터가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