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잔향의 문
7월 14일, 목요일. 그날 밤 딸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온통 하얀 공간 속에서 어떤 문장 하나가 반복되고 있었다.
‘객체 오류 수정 중.’
나는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깼다. 새벽 세 시 반이었다. 물 한잔을 들고 창문 앞에 섰을 때, 그 순간에도 뭔가가 내 뒤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마흔을 바라보는 독신이라면 익숙한 오싹함었다. 대신, 커튼을 조금 열어 담장 위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아주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방향도 일정하지 않았다. 구름이야 늘 그랬듯 늘 다른 모양일 뿐일테지만 무언가가, 지금 내가 혹은 많은 사람들이 아는 모든 기준을 어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7월 15일, 금요일 수요일 아침,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메일을 확인했다. 제목은 없었고, 보낸 사람도 없었다. 단지 한 줄.
> rewindMemory(6); //시스템이 기억을 되감는 중: 시퀀스 0006
나는 그 숫자를 보며 생각했다. 그 숫자는 줄어들고 있었다. 처음엔 0007, 이제는 0006. 누군가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엄습하는 불안감은 앉은 내 몸을 통째로 몸서리치게끔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아침 출근길, 운전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다가 나는 라디오를 껐다. 도로는 평소보다 한산했지만, 이상하게 차들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실제 속도는 평범했지만, 내 감각만 따로 흐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신호 대기 중 사이드미러를 들여다보다가, 나는 문득 어젯밤 연후의 말을 떠올렸다.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이라면, 지금은 어디쯤일까.” 그 말은 단순한 꿈속 대사였지만, 머릿속에서는 자꾸 현실과 겹쳐졌다. 마치 이 세상이 본래부터 환영이었고, 지금에 와서야 실체를 되찾고 있다는 착각.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이수연 실장은 내 자리에 이미 와 있었다. 평소보다 더 단정한 차림이었다. 그녀는 책상에 놓인 서류를 손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 오후엔 복구 시뮬레이션을 한번 돌려보죠. 데이터 누락이 없는 조건에서, 시스템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봐야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그 뒷모습이 이상하게도 가벼워 보였다. 무언가를 미리 예감하고 있다는 느낌. 마치 이미 결과를 알고 실험을 반복하는 사람의 태도처럼.
점심시간, 휴게실 창가에 앉아 혼자 컵라면을 먹고 있을 때, 김 팀장이 다가와 말했다. “요즘 뉴스 보면 좀 무섭지 않아요?” 나는 대답을 피하려 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하늘이 팽창 안 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었는데, 이제는 수축한다네. 정영호 박사라는 사람이 이번에 인터뷰 했던데, 우리 우주가 접히는 중일 수도 있대. 무슨 종이접기처럼.”
그는 웃으며 말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저 라면 국물을 떠먹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대화가 끝났을 때, 창밖엔 잿빛 하늘이 흐르고 있었고, 그 아래 건물들은 유난히도 평평해 보였다. 오후 회의실. 가상머신 환경은 정리되어 있었고, 모니터에는 복원 테스트 결과가 출력되어 있었다. 전날에 이어, 같은 자동 실행 명령 파일 파일을 실행하되, 조건문을 모두 true 상태로 설정한 결과였다. 결과는 이상할 정도로 빨랐다. 시스템은 특정 이미지를 불러왔고, 곧이어 ‘시스템이 기억을 되감고 있는 상태 successful’이라는 문구가 떴다. 그런데 그 다음 줄에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문장이 나타났다.
> if (memory.diff > threshold) clearMemory();
// 메모리 차이가 임계값 초과 시 초기화 수행
나는 이수연 실장을 바라봤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아마도, 복원된 이미지가 원래 정보와 달라졌다는 뜻일 거예요.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오류로 간주되는 거죠. 그런데 중요한 건…” 그녀는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오류를 무시하고 롤백이 완료됐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스템은 이미 이질적인 상태를 받아들인 거죠. 강제로.”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원본과 다르더라도, 시스템은 되돌아간다. 다만, 그 결과가 완전히 같지는 않다는 뜻. 기억만 같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뜻. 퇴근 무렵, 스마트폰에 또 하나의 메시지가 떴다.
> rewindStage(stage); //기억을 되감는 중, 현재 단계: stage
이번에는 알림조차 울리지 않았다. 그저 화면을 켰을 때 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알 수 없는 아이콘이 하나 덧붙어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문양. 삼각형과 점 그리고 반원. 나는 그 아이콘을 바라보다가 무언가가 목에 걸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를 본 것 같기도 하고, 처음 보는 것 같기도 한 상징. 뇌가 감지한 이미지가 아니라, 신경 어딘가에 인식만 남긴 흔적 같았다.
7월 16일, 토요일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얼음을 넣은 물을 마시며 침대에 누웠다. 커튼 틈 사이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낮게 깔려 있었고, 벽에 비친 그림자가 내 호흡에 따라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는 그 흔들림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다가, 마치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놀이터였다. 딸은 평소처럼 그네에 앉아 있었지만, 이번에는 발밑에 작은 종이비행기를 접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아빠, 종이도 접히면 다시 펴질 수 있어. 근데 접힌 선은 남아. 완전히 사라지진 않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눈을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그 선이 티끌이래. 잊히기 전의 무늬. 남겨진 거.” 꿈은 그 말에서 멈췄다. 그리고 나는 새벽 네 시, 그대로 깨어났다. 손은 차가웠고, 머리맡의 텀블러엔 아직 얼음이 남아 있었다. 나는 눈을 감지 않은 채 그대로 누워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는 시간도, 멈추는 감각도 모두 실재처럼 느껴졌다. 시스템이 롤백하고 있다면, 나는 그 안에 있다. 그리고,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출근길, 라디오에서 정영호 박사의 인터뷰 녹취가 흘러나왔다. '관측 가능한 우주의 지평선은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안쪽에서부터 접히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합니다.' 나는 손을 뻗어 라디오를 꺼버렸다. 경쾌한 음성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운전 중에도 내내 그 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안쪽에서부터 접힌다니, 대체 그게 무슨 의미일까. 말도 안 되는 개념 같지만, 요 며칠 내가 마주한 것들에 비하면 별로 이상하지도 않았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모니터 앞에 흰 봉투가 놓여 있었다. 아무 표시 없는 겉면. 열어보니 출력된 로그 파일이 몇 장 들어 있었다.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같은 시스템 메시지가 반복적으로 출력되었다.
나는 그것을 읽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이제는 놀라거나 겁내는 일보다, 묵묵히 받아들이는 일이 더 자연스러웠다. 시스템은 뭔가를 덮고 있었다. 오류를 무시하고 복원을 강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을 복원하려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단지, 우리가 그 안에 있다는 것만은 점점 명확해졌다. 점심 무렵, 연후에게 연락이 왔다.
'잠깐 볼 수 있어?'
이번엔 거절할 수 없었다. 우리는 회사 근처 커피숍 구석에 앉았다. 연후는 말없이 커피를 마시다, 내 손을 바라봤다.
“너도, 가끔… 무언가에 조정당하고 있다는 느낌 들어?”
나는 웃지 않았다.
“무슨 꿈 꿨는데?”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그 여자애가 울었어. 날 보자마자. 그냥 계속, 말도 없이 울더라고. 나한테 뭔가 말해야 하는데, 말을 못하는 것처럼.” 역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날 오후, 이수연 실장은 내게 새로운 테스트 환경을 열었다.
“이번엔 시간 복원 값을 최소값으로 설정해봐요.”
나는 키보드를 두드렸고, 명령어를 실행했다. 화면에 출력된 응답은 이번에도 같았다. 시스템이 기억을 되감고 있는 상태. 그러나 이번엔 추가 메시지가 있었다.
> saveData(); // 존재 궤적 0001 저장
나는 한참을 그 문장 앞에서 멈춰 있었다. 기준점이 되는 어떤 것. 기준점. 그리고 human 한 사람의 기억 혹은 존재 궤적. 그게 나를 의미하는 건가. 왜 그 경로가 지정되어 있는 거지? 나는 파일 구조를 손으로 그려가며 다시 생각했다. 그저 임의의 문자열이 아니라, 시스템이 특정한 존재를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다. 단지 코드상의 잔재가 아니라, 어떤 실체가 있다는 증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