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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티끌 10화

티끌

1부. 잔향의 문

by 융 Jung

7월 17일, 일요일 그날 밤, 꿈은 길고도 선명했다. 딸은 말없이 내 손을 잡고 골목길을 걸었다. 너무 익숙한 길인데,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느낌이었다.

“아빠, “ 그녀가 말했다.["다시 시작하면 안 되는 것도 있어.”

나는 물었다. “예를 들면?”

그녀는 내 손을 꼭 쥔 채 대답했다.

“아무도 날 모르게 되는 거. 그건 안 돼.”

깼을 때, 눈가는 젖어 있었다. 창밖은 이미 밝았고, 알람은 한참 전 울렸던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출근 준비를 마치고, 차에 올라탔다. 엔진을 켜기 전, 휴대폰 화면을 봤다. 메시지가 와 있었다.

> rewindMemory(); //기억을 되감는 중, 특정 구간 도달

> holdState("unstable"); // 기준점 불안정, 외부 개입 요구됨

나는 그때 처음, 이 시스템이 나에게서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관찰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나는 그 안에서 기준점이었고, 오류였으며, 동시에 변수였다.

7월 18일, 월요일. 그날 밤, 꿈은 아주 생생했다. 딸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식탁 위엔 아직 김이 나는 밥이 한 그릇 놓여 있었다. 창밖은 여름답게 밝았고, 햇살은 이상할 만큼 정적이었다. 나는 그 곁에 앉아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아빠, 이건 예전에 했던 말인데,” 딸이 천천히 말했다.["그땐 몰랐어. 지금도 조금 헷갈리긴 해. 근데 이제는 알 것 같아. 무언가가 오고 있어. 되돌릴 수 없는 어떤 거야.”

나는 나 스스로도 뜻 모를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말에 동의했다.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반찬 하나를 조심스레 집었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면, 기억도 거꾸로 흐를까?” 그녀는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아니면 기억은 그대로 있는데, 시간이 다르게 움직이는 걸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질문은 아이의 입에서 나왔지만, 어른인 나도 풀지 못할 문제였다. 딸은 다시 말했다.

“사람들이 점점 나를 못 알아보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까 지금 이 말을 꼭 해야 돼.”

익숙한데 낯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다음번에 내가 안 보이면,” 그녀가 말했다.["그건 내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기억이 어딘가에 갇혀버려서야.”

꿈은 그 순간 끊겼고,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7월 19일, 화요일 화요일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며 물을 끓였다. 컵에 인스턴트 커피를 풀고 얼음을 몇 개 넣어 젓자, 어젯밤의 말이 되살아났다. 기억이 어딘가에 갇힌다. 그런 일이 정말 가능할까? 나는 그 말을 되새기며 차에 올랐다. 회사에 도착하자 이수연 실장이 나를 불렀다. 회의실 14층 1408호, 익숙한 번호였다.

“어젯밤 새로 들어온 데이터입니다.”

그녀가 종이 서류를 내밀었다.

“이번엔 천문연구소 경유입니다. 무려 공식 보도 자료예요.”

나는 종이를 넘기며 읽었다. ‘관측가능한 우주의 외곽에서 가속 팽창이 멈춘 징후가 관측되었다. 전문가들은 초기 우주 구조에 대한 오류 가능성, 또는 시스템적 불연속성을 고려 중이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건 그냥 뉴스가 아니에요. 실시간 데이터를 기반으로 자동 추출된 결과예요. 무언가가, 전례 없는 방식으로 수축을 시작한 겁니다.”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햇살은 변함없이 번들거렸고, 도시는 조용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스케일에서 거대한 뭔가가 되돌아오고 있다는 느낌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수연 실장이 말했다.["우리가 받았던 이상 신호들 있죠. 그 패턴이랑 거의 일치하는 그래프가 나왔어요. 내부 시간의 역전곡선과, 기억 인덱스 파열.”

나는 한 장의 그래프를 가리키며 살펴보았다. 일정 주기로 반복되던 곡선이 어느 지점부터 균열처럼 어긋나 있었다. 곡선의 경계는 마치 터지기 직전의 얼음판 같았다.

“정말로 이게…”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기억이 복원되는 게 아니라, 이미 존재했던 기억이 돌아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어요. 시스템이 아니라, 그 안의 존재들이 자기 자신을 되찾는 방식일지도 모르죠.”

점심 무렵, 연후에게 또 연락이 왔다.

“이번엔… 이상한 거야.” 목소리는 단호했다. 회사 근처 카페에서 다시 만난 그는 평소보다 훨씬 조용했다.

“이번엔 꿈에서, 내가 무언가를 꺼냈어. 말로 설명할 순 없는데… 그게 전부였던 느낌이야. 내가 그걸 꺼내자, 애가 그냥 사라졌어. 말도 못 하고.”

나는 커피를 젓던 빨대를 멈췄다.

“근데, 태호야. 아니, 야. 그 애… 예전에 본 기억이 있어. 분명히.” 그는 고개를 감췄다.

“근데, 내가 본 기억이 아니야. 내가 아닌 누군가의 기억이었어.” 우리는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연후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지금 이대로 가면, 우리 둘 다 그 애를 잊게 될지도 몰라.”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잊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겠네.”

7월 20일, 수요일 그날 밤, 나는 딸을 다시 만났다. 이번엔 낡은 놀이터였다. 그네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딸은 미끄럼틀 위에 앉아 있었다.

“아빠, 진짜 시간이 얼마 없어.” 그녀는 손을 뻗어 나를 잡았다.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면, 사람 마음도 거꾸로 되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

나는 그 손을 잡았다. 놀랍도록 따뜻하고 가벼운 손이었다.

“잊지 마. 난 없어지는 게 아니야. 그냥… 다시 저장되는 거야.”

나는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이건 꼭 기억해.” 그녀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기억되는 한, 존재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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