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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Aug 25. 2024

[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28화

가장 좋은 방법-1

{ 벗, 미치광이 - 제2권 27화 }에서 이어집니다.


 곰형사가 펜이 꽂혀있는 조그마한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쓰는데,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아마 그자의 이름을 잊을까 봐 써둬야 했으리라, 나는 짐작할 뿐이다. 그의 손에 들린 펜은 더 이상 글자를 쓰지 않고, 다만 허공으로 올랐다가 내리기를 반복하며 종이 위에 점을 찍고 있다.

 「알겠습니다…….

펜이 수첩에 점을 찍은 모양에서 멈추고, 곰형사는 수첩에 시선을 고정한 채 조용히 내게 대답한다. 이윽고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왼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었던 고개를 세우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을 잇는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유지 씨. 저, 부탁 하나만 할게요.

 「우선은 들어보고요. 말씀하세요.

 「정말로 전화기가 없어요?

 「네? 무슨……. 네, 그렇다니까요.

 「그래요……. 그러면, 전화기를 사면, 저한테 연락해 주세요. 도움이 될 거라는 확답은 못 드려도, 절대 손해 보실 일은 없을 겁니다. 부탁해요.

 「네, 생각해 볼게요.

 「그럼,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곰형사가 목례를 하기에 얼떨결에 나도 목례를 한다. 그가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숙인 것인지, 단지 앉은자리에서 일어서기 위해서 윗몸을 숙였던 것인지, 혹은 인사를 하고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선 것인지 일순간 판단은 서지 않았지만 내가 그들에게 정중하게 대해서 나쁠 것은 없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가 허형사에게도 목례를 한다. 그가 가방을 챙겨 들면서 말한다.

 「절차라는 게 있어서, 어차피 저희가 호텔에 쳐들어가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누가 신고를 하거나 목격자로 나서주지 않는 한은 말이죠. 유지 씨에게도 사정이 있겠죠. 그런데요, 제가 이 일을 하면서 익힌 건데, 숨길게 많다는 건 그만큼 좀 뭐랄까……. 께름칙하다 겁니다. 어차피 저도 유지 씨 안 믿어요. 설마 하니 불쾌한 건 아니지요. 말 못 할 비밀이 많은 유지 씨와는 다르게 저희는 숨기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유지 씨는 저희를 믿지 않죠. 그러니 유지 씨를 신뢰할 리가 있겠어요. 가급적이면 나중에라도 저한테는 연락하지 마시고, 정 하고 싶으시면 우리 배형사님한테 하세요. 자, 그럼.


 두 형사는 편의점을 끼고돌아 도로 쪽 오르막길을 향해 걷는다. 재개발 때문에 떠나간 사람이 많다지만, 고작 두 명이서 이 동네를 조사한다는 게 가능하기나 할지 의문이다. 그들은 아마도 사건 현장에서 가까운 가게나 가정집을 계속 조사할 참인가 본데, 나로서는 미안할 따름이다. 사장과 나를 대신해 잡혀 마땅한 악당을 알려줬음에도 그저 묵묵히 탐문을 이어가겠다 하니 허형사의 말대로 둘은 역삼동으로 갈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그들에게 내가 한 모든 말은, 하지 않은 것과 같다. 허탈하다. 담뱃불을 붙여 입에 물고서, 라이터와 담뱃갑을 탁상에 던진다. 그러고서 나는 온몸에 힘을 빼고 사지를 늘어뜨린 채로 시선을 하늘로 던진다. 시야의 아래쪽 반은 거미줄로 지저분한 파라솔, 위쪽 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다.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그 경계에 상관없이 피어오르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잔기침을 하던 중에 담배연기가 도넛 모양으로 솟아 나와 신기하던 참에, 골목 쪽 편의점 문이 열리며 풍경이 울린다. 안녕히 계세요-하는 여전히 나를 알아보지 못하던 여직원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그간 고생했네-하는 늙은 사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위를 향하던 고개를 조금 더 뒤로 젖히자 사장의 허리띠가 바로 코앞이다.


 다시 팔다리에 힘을 주고 뒤로 넘겼던 고개를 바로 세우자 현기증이 인다. 서서히 되돌아오는 초점의 가운데에서 멀어지고 있는 여직원의 뒷모습이 보인다.

 「형사들한테는 저분을 설득해서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한다면서요. 겁을 좀 많이 먹어서 그런가, 결국 그만 일하겠다고 했나 보네요?」

내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하며 묻자 사장이 담백한 말투로 답한다.

 「아니야. 내가 자른 거야. 저 친구, 뉴스에나 주변에는 관심이 없는 편이거든. 살인사건이 일어났건 어쨌건, 저 친구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인게지.」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아직 범인이 잡히지도 않았는데, 무서워하기는 했을 것 아니에요?」

 「전혀 그러지를 않던데? 그저 그런가 보다-하며 신경도 안 썼어. 그렇지만 어쩌겠나. 내 자네를 돕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나름의 도리를 다해야지. 공범인 자네가 궁핍해져서 나까지 곤란해져서야 쓰겠나? 다시 일자리가 필요할 것 아닌가.

사장은 호의 어린 말속에서 공범이라는 단어에 유독 힘을 주는 것 같다. 특히나 그 말을 꺼내던 순간 그의 눈은 유독 매서웠다.

 「고마워요, 사장님.」

노인은 대답대신 껄껄 웃으며 편의점 문으로 몸을 튼다. 그가 문을 열고 가만히 있기에 나는 얼른 그 뜻을 이해하고 뒤따라 들어간다.

그는 계산대 안쪽으로 들어가고 나는 진열대 곳곳을 훑어본다.


 내 모습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두 눈을 감은 채로 팔짱을 끼고 의자에 앉아있던 사장이 말을 꺼낸다.

 「오늘은 집에 가서 좀 쉬고, 밤에 출근하면 돼. 밤 아홉 시 반에 나오게. 괜찮지?」

생필품 진열대를 살펴보던 나는 짧게 네-하고 답한다. 모서리 천장에 걸린 볼록거울을 통해 보이는 그는 여전히 두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있다.

 「형사들한테는 무슨 이야기를 한 게야? 꽤 길게 이야기했잖아. 자네 맞은편의 덩치 큰 형사는 수첩까지 꺼내서 뭘 쓰던 모양이던데. 유지 학생, 이유야 어찌 됐건 그 쓰레기 같은 놈이 죽은 건 전부 다 자업자득이었어. 그렇지 않은가? 사람을 겁탈하려 들 때에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어야지. 설마 하니 자네가 나를 원망하지는 않는 거지?」

미동도 없이 평온한 얼굴로 가만히 팔짱을 끼고 두 눈을 감은 노인의 말에서 근심과 염려가 묻어난다.

 「범인을 안다고 말했어요.」

볼록거울에 비친 그의 미간이 일순간 찌푸려진다. 그가 틈을 두고 되묻는다.

 「누구라고도 말했나?」

 「네.」

노인의 눈이 천천히 떠지다가 가느다랗고 날카로운 모양에서 멈춘다. 그리고는 아이고-하며 등허리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네 입에서 나온 이름이 설마 하니 이준호는 아니겠지.

또렷하지 않은 볼록거울을 통해 그와 눈이 마주친다. 분명히 그는 거울을 통해 나를 내내 지켜보며 말을 걸고 있었던 듯하다. 눈을 감고 있다고 착각했지만 사실은 여전히 실눈을 뜨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 테다. 이제 그는 큰길 쪽 출입문을 잠그고 있다. 나는 일부러 투덜거리며 대답한다.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그러면, 형사들한테 말한 이름은 뭔가? 형사들이 떠난 걸로 봐서는 우리 둘 다 아닌 것 같기는 하다만.

노인은 골목 쪽 문 앞으로 걸어가 뒷짐을 지고 서서 말한다.


 짜증이 밀려온다. 제 발로 찾아온 나를 믿지 못해 문을 잠그고 있는 사장의 모습도 기분 나쁘고, 가 호텔을 떠난 뒤에 일어난 일들을 설명하기도 귀찮고, 그냥 다들 좀 질문을 멈추고 알아서 내 기분에 맞춰주면 좋겠다. 잠깐 연필꽂이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가 사라진다. 진정할 필요가 있다. 눈을 감고 입을 다문채 코로 심호흡을 한 다음 다시 눈을 뜨면서 내가 대답한다.

 「연홍이 아빠. 그 사람 이름을 말했어요.」

골목 쪽 문을 마저 잠그려고 문의 위쪽으로 손을 뻗던 노인은 내 말에 머뭇 거리다가 손을 내리나 싶더니 다시 손을 뻗어 기어코 문을 잠그고야 만다. 이제는 괜찮겠다 싶어서 대로 쪽 문을 열려고 걸음 했던 나도 그의 행동을 보고서 포기하고야 만다. 사장이 몸을 틀어 골목 쪽 문에 등을 기대고서 묻는다.

 「연홍 양의 아빠를? 어째서 그랬나⋯⋯. 이 친구야, 형사들, 그 양반들만 그냥 조용히 돌려보냈으면 됐을 일이잖아. 왜 그런 게야?」

이해는 간다. 그에게 나는 그저, 목숨을 구해줬더니만 일만 키우고 있는 철부지일 뿐이다. 짜증이 난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상한 일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솔직한 감정을 숨기거나 참기가 힘들어졌다는 말이 더 사실에 가깝다. 예전의 나는 아무리 신경질 나는 일이 있어도,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뺨을 맞아도 묵묵히 참았다. 흐르는 눈물이나 코피, 붉게 부어오르는 뺨이 내가 처한 상황을 표현해 주었을 뿐, 나의 입은 항변할 줄 몰랐고 눈은 감히 상대를 바라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만 불편한 상황이 벌어져도 표정조차 숨길 수가 없다. 언제부터였을까? 보육원을 떠나야 했을 때 혹은 자립생활관에서 떠나야 했을 때? 아니다. 언제부터였을까-하는 잡념을 헤집고 사장이 다그친다.

 「아니, 유지 학생. 왜 그랬냐고 묻지 않나. 응?」


 그러고 보니 사장은 연홍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는 그저 선량한 살인자일 뿐이다.

 「사장님이 저를 구해준 바로 다음날, 그 호텔에서 저⋯⋯ 강간을⋯⋯ 당했어요. 연홍이 아빠 밑에서 일하는 사람한테.」

 「아니, 무슨 그런⋯⋯. 그래, 자네 그래서 몸은 좀 괜찮은 게야? 경찰에 신고는 했고? 응?

 「방금 했잖아요. 그 사람이 살인자라고.」

 「유지 학생, 자네 충격이 컸던 모양이야. 자네한테 몹쓸 짓을 한건 연홍 양 아비 밑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뭣하러 연홍 양 아비를 걸고넘어지는 건지 도통 모르겠구먼. 아무튼 자네, 그런 일을 겪고 몸도 성치 않은데 병원을 나오자마자⋯⋯. 아휴 가여운 이 사람아. 자네 팔자 한 번 해괴하구먼. 내가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일단은 차차 이야기하도록 해. 여하 간에 경찰한테 내 이름을 말한 건 아니란 말이지?」

결국 사장은 스스로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는 것, 그뿐이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때로는 이기적이라고 오해받는 바로 그 일. 스스로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는 이상, 남들의 문제는 관심 밖의 일일 수밖에 없다.

 「안 했다니까요. 벌써 잊었어요? 제 덕분에 사장님 지문도 안 들켰잖아요. 타살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게 마무리했다고 그래놓고선, 엉터리예요. 단번에 살인사건이 돼서는 이 꼴이잖아요. 고마운 건 고마운 건데, 어차피 저는 그날⋯⋯. 아니, 됐어요. 문이나 열어요. 있다가 형사들이 내려오는 길에 또 들를 수 있잖아요. 편의점이 잠겨있으면 이상하잖아요.」


 설명도 귀찮고, 머릿속은 뒤죽박죽이다. 어찌어찌해서 일자리는 다시 구했지만, 아침의 상쾌함은 온데간데없고 짜증만 남았다. 내가 까치발을 하고서 대로 쪽 문의 잠금을 풀고, 사장은 기대고 서있던 골목 쪽 문을 말없이 연다.

 「사장님 저 이만 가볼게요. 휴대폰 하나 개통해야 해서요.」

 「기다려 봐.」

사장은 음료 냉장고로 걸음 하더니 커다란 이온음료를 꺼내서는 내 손에 쥐어준다.

 「더위 먹기 딱 좋은 날이니까. 자, 그럼 훌훌 털고 또 하루 시작해 보자고. 밤 아홉 시 반에 보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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