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융 Jung Sep 01. 2024

[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29화

가장 좋은 방법-2

{ 벗, 미치광이 - 제2권 28화 }에서 이어집니다.


 골목 쪽 문을 열고 나선 나는 청바지에 두 손을 꽂아 넣고 대학 부속초등학교의 정문을 지나 대학병원 장례식장을 지나고 담배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돌담 옆에 위치한 휴대전화 대리점으로 곧장 들어선다.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미소와 함께 어서 오세요-하고 인사하며, 머리를 보라색으로 물들인 대리점 사장이 나를 맞이한다.

 「전에도 오신 적이 있죠? 낯이 익습니다, 손님.」

 「, 안녕하세요. 전에도 여기서 개통했는데⋯⋯. 그런데 지금 제가 사정이 좀 안 좋아서 전화하고 문자만 되는 걸로 알아보려고 해요. 스마트폰 말고요.

 「문제없습니다, 손님. 이쪽으로.」

나는 적당히 사무적인 친절이 좋다. 이곳 사장은 손님에게 욕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교대로 출근하는 직원이 있을 뿐 그와 동시에 근무하는 직원 한 명 조차 두지 않는다. 사장과 교대근무 직원은 이따금 편의점에 와서 담배를 사고는 했는데, 이 둘은 오히려 편의점 직원인 나를 휴대전화 대리점 손님으로서의 나보다 더 상냥하게 대하고는 했다. 어쩌면 나는 이런 대면대면한 친절이 좋아서 고시원 근처의 대리점이 아니라 이곳까지 온걸지도 모른다.


 나는 사장이 최신 스마트폰이 놓인 유리 진열장을 지나 구석의 길이가 짧은 진열장 뒤로 걸음 하는 모습을 여전히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눈으로 좇다가, 그가 멈춰 서서 두 손을 배꼽 아래로 모아 포개는 것을 보고서야 진열장 맞은편에 다가가 선다.

 「손님, 여기 이 쪽에 있는 두 제품은 딱히 통신사 부가서비스를 가입하지 않으셔도 일 년 이상만 약정하시면 기계값이 무료입니다. 참고로 이런 폴더폰은 앱 설치나 터치스크린 같은 기능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 이 옆에 있는 조금 더 큰 제품은 같은 폴더폰이지만 터치스크린도 되고 메신저 설치도 됩니다. 카메라 성능도 나쁘지 않죠. 그래서 영상통화 목적으로 어르신들이 많이 씁니다. 흔히들 효도폰이라고 불리죠. 대신에 데이터 요금제를 써야 하고, 기계값은 이 년 이상으로 약정하시면 무료입니다.

물론 기능이 조금이라도 많으면 좋겠지만, 지금 내게는 사치다.

주저하는 내 표정을 읽은 사장이 말을 잇는다.

 「앱을 쓸 거면 스마트폰을 사는 게 맞죠. 앱을 안 쓰실 거면, 이렇게 화면이 큰 제품은 필요 없을 겁니다. 아무래도 주 사용자 층이 노인인지라 버튼도 지나치게 크고요. 손님에게는 먼저 보여드린 두 개도 아주 잘 맞을 겁니다. 성능은 차이가 없고 디자인만 다르니까 살펴보시고 골라보세요.」

하나는 폭이 좁고 두께가 큰 반면 다른 하나는 폭이 넓고 두께가 얇다.

 「이거, 초록색이요. 화면이 더 넓은 걸로 할게요.」

 「그 제품, 좋지요. 재고도 있습니다. 저기 모니터 앞 테이블에 앉아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내가 그가 이른 대로 유리로 된 둥근 탁상에 가서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 그는 입구에서는 보이지 않던 매장 안쪽에서 커피를 내린다. 나는 코로 숨을 느리고 깊게 들이마시며 매장 안 공기에 녹아든 긋한 커피 냄새를 맡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 손으로 턱을 괴고 눈을 감게 된다. 커피를 잔에 따르는 소리가 나더니 사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의 말과 동시에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뜬다.

 「손님, 신분증 챙겨 오셨죠?」

그가 쟁반에서 커피잔을 탁상으로 옮기며 묻는 말에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인다.

 「일단은 커피 좀 드세요. 저도 마시고 싶던 참이라 내렸어요.」

괜히 그의 시간만 뺏고 정작 전화기는 살 수도 없는 상황에 내가 커피를 편하게 마실 수 있을 리 없다. 게다가 당장 마시기에 커피는 너무나도 뜨거워 보인다. 신분증을 꺼내지는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커피잔만 노려보는 나를 향해 사장이 말한다.

 「제가 나쁜 놈이 되면, 손님한테는 도움이 됩니다. 들어보실래요?」

무슨 말인지 이해조차 되지 않지만 일단 아쉬운 건 나다.

 「뭐⋯⋯. 네.」

 「첫 번째는 제가 손님한테 선불폰을 파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차마 권하겠어요. 번거롭기도 하고, 전화로 할 수 있는 본인 인증도 어려우니까요. 돈을 내고 쓰는 전화기인데, 사실상 길에서 주운 전화기와 별 차이가 없어요. 이상한 연락도 자주 오고요.」

 「그럼, 다른 방법도 있나요? 신분증을 재발급받으려면 사진관에 가서 사진도 찍어야 하고⋯⋯. 있나요, 다른 방법이?

 「네, 있어요. 대신에 저를 신고하지 않는다고, 흉보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면 말씀드리죠. 불법이거든요.」

잠시나마 지난 며칠간의 일을 까맣게 잊고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의 일상에 젖어 있던 나는 그의 말에 순간 정신이 맑아진다. 고작 불법이라는 말 한마디에 꺼져있던 비상등이 머릿속에 탁-하고 켜지지만, 불법은 더 이상 내게 불리하게만 작용하지 않는다. 착한 사람들도 큰 죄를 지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온전히 구제받지 못하며, 그렇기에 그들 역시나 나쁜 사람처럼 숨기고, 숨고, 도망쳐야 한다.


 사장은 내게서 시선을 뗀 채 조용히 커피를 마실 뿐 대답을 독촉하지 않는다. 내가 그에게 작은 소리로 약속할게요-라고 말하자 그가 싱긋 미소 지으며 커피 잔을 유리 탁상에 내려놓는다.

 「아직, 주민등록증 분실신고는 하지 않으셨죠?」

 「네. 해야 하는 줄도 몰랐어요.」

 「그럼, 주민등록증은 유효하고⋯⋯. 미리 찍어둔 사진만 있으면 통신사에 넣을 개통서류에 첨부할 수 있겠네요. 그렇죠?」

 「아하⋯⋯. 그렇지만 저는 신분증을 찍어둔 사진 같은 게 없는걸요.

 「저한테는 있습니다.」

 내 개인정보 중에서도 가장 조심스러운 주민등록증을 이 사람이 사본으로 보관하고 있다니, 정말이지 어처구니없을 만큼 고마운 일이다. 내가 얼떨떨하게 코웃음을 터트리자 그가 계속한다.

 「지난번에 스마트폰 개통하실 때 신분증을 스캔했었죠. 원래 용도에 맞게 제출한 다음에는 폐기해야 하는데, 매번 그렇게 하기가 번거로워서요. 특별히 어디서 개인정보 취급관리 조사 같은 걸 한다는 공문이 나오기 전에는 지우지 않아요. 특히나 어르신들, 도통 민증을 들고 다니시질 않아요. 지난번에 보여줬지 않냐고 역정만 내고 말이죠⋯⋯. 어쨌거나. 어때요, 손님. 제가 나쁘기는 하지만 도움이 되지요?」

 「그렇네요. 정말로요. 제 주변에도 그런 고마운 사람들이 꽤 있어요.」

 「잘됐네요. 어디 그럼, 서류를 작성하실까요?」


 사장은 내가 매장으로 들어왔을 때 앉아있던 자리로 가서 키보드로 달그락 소리를 내며 서류를 준비한다. 그가 딸깍하며 마우스를 클릭할 때마다 프린터에서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서류가 인쇄되어 나온다. 딸깍, 노래방 도우미를 같이 하자던 언니의 얼굴을 나 대신 나서서 면도칼로 그어준 친구의 환한 얼굴이 떠오른다. 지지직, 육교를 내달려 까만 앞니를 절벽으로 내던지는 태호의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들린다. 지지직, 휴대전화 충전 케이블을 들고 병상에 누운 까만 앞니에게로 걸어가는 연홍이 엄마의 손에 맺히는 땀이 미끌거린다. 딸깍, 민머리 변태 놈의 머리에 드라이버를 쑤셔 박은 늙은 편의점 사장의 몰아쉬는 숨이 미지근하게 얼굴을 스친다. 딸깍, 태호가 약쟁이 형사의 뒤통수를 소화기로 때리면서 나던 둔탁한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너무나도 고마운, 미친 사람들.


 「오래 기다리셨죠? 자, 제가 형광펜으로 표시해 둔 곳 작성하시면 됩니다. 서명할 곳이 좀 많아요. 참, 이제 커피가 덜 뜨거울 거예요.」

멍하니 딴생각을 하던 중에 어느새 대리점 사장이 다가와서 두툼하지만 가지런한 서류뭉치를 내가 앉은 탁자 위에 올려둔다.

 「네,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손님, 조회해 보니까 지난번에 개통했던 스마트폰에 기기값 약정이 아직 년 넘게 남았더라고요. 전화기를 잃어버렸어도 요금은 매달 나가는데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그 번호는 제일 낮은 요금제로 변경하고, 휴면번호가 되게끔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뭐, 이건 불법이 아니니까 이번에는 합법적으로 도와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좋을 것 같기는 한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요. 통신사 계정도 기억을 못 하거든요.」

 「그 양식도 같이 드렸어요. 마저 서명하시면 됩니다.」


 과연, 내가 열심히 펜을 놀려 주소를 쓰고 서명을 하던 글자 빼곡한 양식들을 넘겨보니 전에 쓰던 전화번호의 요금제 변경신청서가 눈에 들어온다. 별생각 없이 형광색으로 표시된 부분만 찾다 보니 나는 제목조차 모르는 서류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득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양식들의 제목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지만 다행히 기우였을 뿐 뜻밖의 내용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다 할 이유 없이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나를 도와줬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을 믿기가 어렵다. 머리가 어떻게 돼버린 걸까, 원래 뭇사람이란 믿을 가치가 없는 존재인 걸까, 그도 아니면 단지 내게 해코지를 했던 몇몇 때문에 내가 인간 모두에게 질려버린 걸까. 무용한 생각을 하며 서류를 앞뒤로 넘기고 되돌아가기를 몇 차례, 서류의 작성이 끝난다. 사장이 종이뭉치를 가지런히 모아 스캐너에 올리면서 말한다.

 「아침 일찍 접수해 주셔서 다행입니다. 이제 삼십 분 정도 뒤에 개통이 완료될 겁니다. 오래 걸려봐야 한 시간, 빠르면 커피를 다 마시기 전에 될 수도 있어요.

네-하고 대답한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마시고, 스캐너는 분주하게 종이를 한 장씩 빠르게 삼키고, 사장은 다시 모니터 뒤에서 마우스를 딸깍거린다.


 「자, 다 됐습니다. 금방 됐네요.」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휴대전화 상자를 챙겨 들고 탁상으로 돌아온다.

 「새 제품인 거 확인해 드릴게요. 여기 봉인지 먼저 보시고⋯⋯.」

 「괜찮아요. 확인까지야, 뭐. 제가 열어볼게요.」

나는 사장이 열다가 만 상자를 마저 뜯어 전화기를 꺼낸다. 전화기와 충전기, 그리고 설명서가 전부다. 이어폰도, 보조 배터리도 없다. 무심결에 측면의 스위치를 누르자 진동과 함께 전원이 켜진다. 예전의 익숙한 손놀림이 떠오른 나는 폴더폰을 한 손으로 들고 중지와 약지로 열어젖힌다. 연락처에 저장된 번호는 단 하나, 나 스스로의 전화번호뿐이다. 어차피 내가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는 전화번호는 하나도 없고, 새 전화기에 저장할 연락처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내게 연락해 오는 사람과 대화를 하거나 무시하는 것도 나의 선택이다. 대리점 사장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이 번호를 알지 못한다. 어쩌면 새로 개통된 휴대전화처럼 나의 인생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육교에서 떨어지기 전으로 돌아가 다시금 평범하고 지루한 삶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되기 위해 내가 할 일은 그저 잊어버리는 것이다. 미친 사람들을 잊어버리면, 나는 원래의 나로 살아갈 수 있다. 형사들에게 연홍이 아빠의 이름과 위치를 알려준 것으로 빚은 갚았다. 전부 다 갚았다고는 할 수 없을지언정, 나도 나름은 한다고 했다.


계속…….

이전 28화 [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28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