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에서 야간근무를 다시 시작한 지 보름, 수중의 푼돈과 편의점 폐기 식품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차에 처음으로 월급을 받고 보니 기분이 묘하다. 마치 나의 시간이 두 달 동안 멈췄다가 다시 흘러가기 시작하는 것만 같고, 월급을 통해 보상을 받은 것도 같다. 내가 마음먹으면 앞으로도 원래 대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구태여 시간을 되돌려 엉망진창인 세계로 뛰어들 필요는 없다. 모든 게 평온하다. 연홍이는 펜트하우스 침대에서 새하얀 등을 드러내고 가쁜 숨과 함께 새된 교성을 내던 모습을 본 것이 마지막이다. 지나가 죽고 더 이상은 대학병원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진 그녀를 다시 볼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태호도그곳에서 침을 흘리며 의자에 묶여 있던 모습 후로는본 적이 없다. 그가 호텔을 무사히 빠져나왔다면 언젠가 편의점으로 버지니아 레드 한 갑을 사러 왔을 법도 한데 아직까지 그의 모습도, 그의 낡은 세단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나를 마주하지 않으려 일부러 다른 편의점을 이용하고 있을지도, 혹은 다른 수많은 주민들처럼 재개발 지역을 떠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의 마음이 불편한 진짜 이유는 그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그가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데에 있다. 그가 나타난다면, 나는 그에게 오빠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에게 안부를 물을 수 있을까. 아니, 어떤 말이라도 꺼낼 수가 있을까. 나라는 사람은 그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편의점 문이 열릴 때마다 나를 긴장하게 하는 것이 태호에 대한 염려 때문만은 아니다. 연홍의 아빠 밑에서 일하는 형사가 편의점으로 찾아오리라 말했던 것이 항상 나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차라리 빨리 나타나서 이 기약 없는 불안을 떨쳐내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하다. 예전에는 펼쳐놓은 수험서에 인쇄된 글자가 침에 녹아 얼굴에 묻어나도록 편하게 근무시간을 때웠던 나였지만 이제는 허리를 숙이는 것조차 쉽지 않고, 두 눈은 대로 쪽의 유리문과 골목 쪽의 유리문 너머로 오가는 사람을 좇느라 좌우를 바쁘게 오간다. 수험서를 한참 들여다볼 때와 같이, 문밖을 살피는 데에도 눈은 빠르게 건조해진다. 간혹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을 때에는 문틈으로 스미는 바람을 뺨으로 살피고, 혹시라도 울릴지 모르는 풍경을 귀로 좇는다. 문이 열리고 풍경이 울릴 때마다 곤두서는 뒷목의 잔털을 느끼고, 약쟁이 형사나 불사조 태호가 아님에 안도하며 손님을 맞이한다. 그렇게 나는, 본의 아니게 바른 자세로 일하는 직원이 되어간다. 오늘도 자정이 넘어가며 손님이 뜸해진다. 잦아들지 않는 긴장 탓에 몸은 더욱 빠르게 지쳐간다. 습관적으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지만, 내가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배형사와 허형사, 고시원 주인과 편의점 사장뿐이다. 그나마 이 넷 중에서 내가 새 전화번호를 알려준 사람은 고시원 주인과 사장뿐이다. 예전에 저장해 둔 연락처는 스마트폰과 함께 잃어버렸다. 어차피 공부가 잘 된 적은 없었고,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특별히 할 일도 없이 밤은 길어 생각만 많아진다. 팔짱을 낀 채로 잠시 선잠에 들었다가 뺨을 스치는 미지근한 바람에 두 눈을 부릅뜬다. 그와 동시에 대로 쪽 문이 열리고, 풍경이 울린다. 새하얀 피부의 낯이 익은 손님, 연홍이의 엄마다.
나는 인사를 건네지 않고, 그녀는 진열대를 둘러보지 않는다. 그녀가 곧장 계산대 앞으로 걸어와 말한다.
「가까운 사람한테 남자를 빼앗겨 봤어요?」
내가 태호에게 호감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뿐이었다. 그러므로 연홍이에게 남자를 빼앗긴 것은 아니다. 어차피 사람은 진열대에 놓인 물건 따위가 아니라서, 뺏고 빼앗기는 개념은 무의미하다. 나의 연인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돼서 떠난다면 비록 나는 비참하고 슬플지언정 그 누구도 탓할 수는 없다. 떠나가는 나의 연인도, 그가 향해가는 그녀도 나는 욕할 수 없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려는 노력은 스스로를 비참하게 할 뿐이다. 나는 가능한 짧게 대답한다.
「아뇨, 없어요.」
그녀는 나를 바로 보지 않고 계산대에 올려놓은 자신의 두 손만 만지작거린다. 미친 건가-하고 내가 의아해하던 중에 그녀가 말한다.
「나는 있는데. 딸한테.」
그녀의 자세한 사정은 모르는 편이 낫다고 나의 직감이 속삭인다. 갑작스럽게 연홍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지만 당장은 한가롭게 남걱정을 할 계제가 아니다. 연홍의 엄마는 평화로운 지금이 아닌 시커먼 과거에 속한 사람이다. 낮게 깔린 역한 안개를 맞대고 있는 끈적하고 질척거리는 오물 구덩이에서 새빨간 실지렁이가 꿈틀거리듯 나를 유혹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런 곳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콩알만 한 총알 한두 개로 전쟁이 시작되듯 그녀와의 대화에서 오가는 말 몇 마디가 나의 내일을 망쳐버릴 수도 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고, 전혀,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
「제가 잘 못 들었어요. 어떤 물건 찾으신다고요?」
「물건을 찾는 건 그쪽이겠죠.」
「그럴 리가요. 저는 여기 직원이고, 손님은……. 그쪽이 손님이잖아요.」
「그래요, 그래. 뭐 필요한 건 없다는 말이네요. 그렇죠?」
「그렇다니까요……. 저는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니까요.」
「그럼 나 헛걸음했네요?」
그녀가 왜 왔는지, 누가 보내서 왔는지 이제야 알겠다. 하마터면 아-하고 육성으로 감탄할 뻔했지만 다행히 그녀의 얼굴을 놀란 눈으로 잠시 바라본 것이 전부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라도 다시 찾아오세요, 손님.」
나는 일부러 '다시'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한다. 이만하면 제발 내가 풍기는 반감을 눈치채고 떠날 법도 한데-하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가 작고 나직한 목소리로 콧노래를 부르며 몸을 튼다. 내가 안도의 숨을 들키지 않게 내쉬고, 그녀가 말한다.
「직원 분, 이름이 유지 씨……. 아닌가요?」
어금니가 깨질듯하고 관자놀이에서 심장소리가 울린다. 단지 그녀의 입에서 내 이름이 튀어나왔을 뿐인데, 그녀를 죽이고 싶다.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마저 든다. 계산대 안쪽 선반에는 보루담배와 종량제 쓰레기봉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성의 끈은 너무나도 가늘게 당겨져 곧 끊어질 것만 같지만, 이내 그녀가 병원에서 나를 도와준 일이 기억나 분노가 다스릴 수 있을 만큼 잦아든다. 나는 근무복 조끼의 왼쪽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대답한다.
「아닌데요.」
「아, 그러네요. 그런데 이름이…… 가희아? 독특하고⋯⋯ 예쁜 이름이네요. 제가 잠시 사람을 착각했나 봐요. 실례했어요.」
「그러실 수도 있죠. 저, 흔한 얼굴이니까요.」
「그럼, 시간도 늦었으니까 그만 실례하고 가볼게요. 고생하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참, 퇴원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당했다. 그녀는 역시나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고, 처음부터 일말의 의심 없이 부여받은 역할에 충실했다. 정말로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대로 쪽 문으로 돌리던 몸을 틀어 다시 나를 정면으로 향해 고쳐 선다.
「숨기고 싶었던 마음, 이해해요.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은 내려놓아요. 나도 유지 씨를 해치러 온건 아니니까.」
말 한마디에 내려놓을 거라면 처음부터 손에 쥐지도 않았다. 나는 듬직한 산업용 커터칼을 선반 아래에서 더욱 움켜쥔 채로 말한다.
나는 부동의 자세로 기다린다. 내게는 그녀에게 대꾸할 말이 없고, 오직 바라는 것은 그녀가 떠나는 것뿐이다. 문밖으로 건 저승으로 건 떠나 주는 것, 오직 그뿐이다. 계속해서 떠들거나 침묵할지, 머무르거나 떠날지는 그녀의 선택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건 그녀 탓이다. 나는 자세를 바꾸지 않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선반 아래에 오른손으로 쥔 커터칼의 날을 한 칸 전진한다. 딸깍-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공기를 채우고, 그녀의 귓바퀴가 쫑긋하고 움직인다. 나는 그녀의 두 손에 들린 물건이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나풀거리는 블라우스와 스커트에 위험한 물건을 숨겼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천천히. 어깨에 맨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아요. 그리고 저기, 반대쪽 문으로 발로 차서 밀어요.」
「유지 씨, 이건 내가 아끼는 가방인데 왜 그렇게 해야 해요?」
「아주머니가 자초한 일이니까, 그러니까 나한테 묻지 마요. 나한테, 이제 질문 같은 거 하지 마.」
「아니. 그래도 그렇지, 우리 대화로…….」
말 한마디에 한 칸씩 딸깍, 한 번에 일 센티미터씩 딸깍, 딸깍, 날을 전진한다. 입술이 얼어 굳은 그녀가 말을 멈추고, 나는 칼을 선반 밖으로 꺼내든다. 두꺼운 종이포장을 가르거나 플라스틱 포장끈을 자를 때를 떠올리며, 엄지손가락이 닿는 곳의 둥근 다이얼을 돌려 칼날을 단단히 잠근다.
휘두르는 중에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열리고 뒤집힌 틈으로 피가 흘러내릴 것이다.이 자그마한 중년 여인의 피부가 두꺼워 봤자이다. 손바닥에 땀이 날수록 나는 칼을 더욱 세게 움켜쥔다. 계산대 입구를 위로 젖혀 올리고 그녀에게 다가설 준비를 마친다. 이제야 그녀가 몸을 파르르 떨며 어깨에 맨 가방을 두 손으로 들고 골목 쪽 문으로 던진다.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에 발로 차라고 했잖아. 왜 던져. 받는 사람 기분 나쁘게⋯⋯.」
나는 시선을 빼앗겨 말을 잇지 못한다. 그녀의 다리 사이로 소변이 흐른다. 어차피 빼앗길 가방인데 바닥에 고인 제 소변에 젖을까 속상하기라도 한 걸까. 그런 걸까.
「전화기는?」
「이러지 말아요, 전부, 전부 다 가방에 있어요. 옷에는 주머니 하나도 없어요. 제발, 날 죽이진 말아요. 나는 그냥 그 이가 시키는 일만 해요. 그냥 그 이 마음에 들려고 그런 거예요. 나 유지 씨한테 아무런 감정 없어. 그러니까 제발, 죽이지 말아요. 나 알잖아요, 나 연홍이 엄마. 친구의 엄마를 어떻게 죽여!」
그녀는 고개를 진동하듯 끄덕이며 힘이 빠진 다리를 어설프게 움직이며 도망쳐 나간다. 문을 나선 그녀가 왼쪽으로 서둘러 걸음 하고, 나는 그녀의 뒷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다가 편의점의 양쪽 문을 모두 잠근다. 바닥 청소를 할 때에는 손님을 받지 않는 편이 좋다. 그녀의 가방을 주워 계산대 안쪽으로 던져두고, 나는 대걸래를 들고 그녀의 소변을 닦아내고 방향제를 바닥 곳곳에 뿌린다. 그저, 또 한 명의 짜증 나는 손님이 방문한 것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대걸래를 뒤집어 널고 양쪽 문의 잠금을 푼 다음 나는 계산대 뒤로 넘어와 의자에 앉는다. 그녀의 가방을 계산대 위에 올리고 내용물을 쏟아내자 겨우 진정했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린다. 수첩 한 권, 카드지갑, 스마트폰, 그리고 주사기, 다발로 묶여 있는 액체가 절반을 채운 주사기⋯⋯. 가방에 더 든 것이 없을까 싶어 속을 들여다보니 안쪽에 지퍼로 닫힌 주머니가 있다. 신기하리만치 부드럽게 열리는 지퍼 주머니 속에는 지폐가 가득하다. 지폐는 종류별로 구분되어포개어져 있는데, 하나같이 위인의 얼굴이 한 방향으로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이'라고 불리는 그녀와 연홍의 아빠는 이런 취향인 걸까.상관없다. 돈은 다 똑같은 돈이다.
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각. 나는 나머지 물건들을 다시 가방에 넣고 안쪽으로 치워둔 다음, 계산대에 나란히 올려진 수첩과 스마트폰을 노려보고 있다. 수첩에 날짜별로 빼곡히 쓰인 것은 장소와 사람의 이름이나 별명, 약의 종류와 개수, 금액 따위로 짐작되는 숫자들이다. 어제 날짜에는 열명 남짓한 이름 가운데 내가 포함되어 있다. 내 이름이 포함된 부분부터 백지 사이의 두 장을 포개어 잡아 찢어내고, 안쪽에 지저분하게 남은 종이 끄트머리를 꼬집어 떼어내자 감쪽같다.내게는 소용없는 물건들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유용할 수 있다. 나는 폴더폰을 꺼내고 문자 메시지를 쓴다.
'형사님, 저예요. 유지. 전에 말씀드린 살인범과 관련된 증거를 찾았어요. 지난번 저를 본 곳으로 같은 시각에 와주세요.'
허형사에게 먼저 보낸 문자를 똑같이 배형사에게 보내려던 순간, 허형사로부터 전화가 울린다.
「여보세요.」
「예, 방금 문자 보고 전화 드려요. 허형사입니다.」
「네. 새벽부터 죄송해요. 제가 올빼미라서요. 다른 게 아니라, 제가 꼭⋯⋯.」
「유지 씨, 잠깐, 잠깐, 잠깐. 내 말 잘 들어요. 두 번 다시는 이야기할 기회가 없을 테니까 새겨들어요. 나는 강력계이지 마약계가 아니에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라고요. 그리고, 그 증거물⋯⋯. 뭔지 모르겠지만 아, 물론 알고 싶지도 않아요. 그거 전부 다 불살라버리세요. 당신이 말 한 사람⋯⋯. 무서운 사람이에요. 어쩌다 시비가 붙어서 동네 바보나 죽일, 그런 인물이 아니에요. 거물이라고요. 아무도 못 이겨요. 조만간 연예인 몇만 잡아넣으면 끝날 거예요. 알겠어요? 유명하고 돈 많은 약쟁이 몇 명만 잡아다가 처넣으면 끝나는 거라고요. 누가 만들고 뿌리는지 사람들은 관심 없어요. 누가 약쟁이인지, 사람들은약쟁이 주제에 감히 명성과 부를 누리는 게 누구인지에만 관심이 있다고요. 그리고⋯⋯. 배형사님이 죽었어요. 유서도 없이 갑자기 죽었는데, 자살로 종결됐어요. 부검도 못했는데 유족들을 닦달해서 화장부터 했고요. 알아들어요? 나도 이런 말 하기 싫지만, 다 당신 때문이에요. 유지 씨도 어느 정도는 지금 이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야 하니까 말해주는 거예요. 더는탓하지 않겠지만, 나는 무섭다고요. 죽고 싶지 않아. 자살당하기 싫다고요. 그러니까 유지 씨도 다 잊어버려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그리고 부탁인데, 정말 중요한 거니까 꼭 내 부탁 좀 들어줘요. 유지 씨 전화기에서 내 연락처 좀 지워줘요. 통화내역도 지우고요. 네?」
「네⋯⋯.」
「다시는 연락하지 마시고요. 알겠죠?」
불필요한 대답 대신 나는 조용히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그와 죽은 배형사의 연락처를 삭제한다. 남은 연락처는 단 둘이다. 지인이 없으면 주변에서 경사를 접할 일도, 조사를 접할 일도 없다. 누군가를 알게 된다는 것에는 그들의 죽음을 접할 기회가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화기에 저장된 연락처가 많을수록 삶은 피폐해져 간다. 생일, 결혼식, 돌잔치, 장례식으로 지출은 부담스럽게 커져가고, 오늘처럼 죄책감에 시달리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정말, 내게 배형사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걸까. 조용히 앉은 채로 뜬 눈으로 날을 지새운다. 순식간에 시계는 다섯 시를 지나고 고작 몇 번의 한숨을 쉬었을 뿐인데 어느덧 여덟 시를 가리킨다. 한 시간 반만 더 버티면 퇴근이지만 고시원에 사는 그 누구도 귀가를 손꼽아 기다리지 않는다.나는 몸을 털고 일어나 매장 진열대를 살피고 청소를 한다. 휴지통을 비우고 분리수거를 한다. 몸을 바쁘게 놀려 매장을 청소하는 만큼 머릿속 잡생각도 옅어지고 깨끗해진다.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가 파라솔 주변에 널브러진 쓰레기를 집게로 줍는다. 대부분의 쓰레기는 편의점 손님이 아니라 지나가던 사람들이 버린 것들이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부지런하구먼, 오늘도.」
사장이 뒷짐을 지고 걸어오다 한 손을 머리 위로 휘저으며 말한다.
「일찍 오셨네요, 오늘도.」
「그래, 간밤에 별 일은 없었고?」
나는 틈을 두어 네-하고 말하고 집게와 쓰레받기를 벽에 기대어 세운다.사장이 먼저 편의점으로 들어서고 내가 뒤따른다. 진열대를 대충 훑어보던 사장이 계산대 앞에 서서 말한다.
「그럼 퇴근해 보게. 오늘은 토요일이니 아침 손님도 별로 없을 테니 걱정 말고.유지 학생, 평범하게 산다는 게, 그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이것도 복이라면 복 아닌가? 고생했네. 그럼, 밤에 보자고. 허허허⋯⋯.」
깊은 주름으로 소박하게 웃는 사장에게 미소로 화답하며, 나는 계산대 위에 놓인 물건들을 숄더백에 쓸어 담고 퇴근길에 오른다. 월급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은 돈을 가졌으니, 오늘만큼은 01번 마을버스가 아닌 택시를 타기로 한다.
「좋은 아침입니다,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라디오도 음악도 없이 조용한 가운데, 상쾌하면서도 은은한 향을 품은 공기를 뚫고 기사가 묻는다. 가방 속에 한 손을 넣고 내용물을 만지작 거리며 내가 대답한다.
「역삼동으로 가주세요.」
아침 해가 눈부시다. 나는 눈을 감고 택시 유리창에 머리를 기댄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내 탓이 아니다.딸깍, 딸깍, 딸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