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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Aug 18. 2024

[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27화

주인공-4

{ 벗, 미치광이 - 제2권 26화 }에서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서로 신뢰가 없을 때 마주하는 타인에게 친절하게 군다. 상대를 믿어도 되는지 검증하고 싶은 의심 때문이기도 하고, 상대가 나를 믿지 않을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상냥한 정도는 아니지만, 곰형사는 내게 친절하다. 반면에 허형사는 최소한의 예의조차 억지로 차리는 양 신경질적이다. 곰형사가 담배를 사러 자리를 비운 잠깐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까.

 「허형사님. 배형사님은 믿을만한 분이에요?

 「무슨 질문이 그래요?

 「허형사님이 배형사님을 얼마만큼 신뢰하는지 궁금해서요.

 「믿으면 믿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조금 믿고 많이 믿고 뭐 그런 게 있으려나. 저 양반, 내 은인이에요.

 「보증을 서 달라고 하면요?

 「그런 부탁을 절대로 안 할 사람이란 건 알죠. 그런데, 나는 누가 누굴 믿네 어쩌네 묻는 사람한테는 영 호감이 안 가더라고요. 오랜만에 한 잔 하자고 나오라고 연락하면 그 자리에 누가 누가 나오는지 물어보는 애들 있죠? 그런 애들처럼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무슨 말일까. 내가 어떻게 대답할지 망설이는 사이에 허형사가 말을 잇는다.

 「무례한 거라고요, 유지 씨. 혹시라도 나 없을 때 배형사님한테 날 얼마나 믿는지 묻고 그러지 말아요, 예?

그런 말이었구나. 내게 어른의 대화는 아직 어렵다. 나는 그의 말에 순간 주눅이 들어 입술을 앙다문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때에 맞춰 풍경소리가 울리고, 곰형사가 새로 산 담배를 손에 들고 나와 조금 전 자리에 앉는다. 그가 담뱃갑의 비닐 포장을 벗기고,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그는 만족한 듯 두 콧구멍으로 연기를 뿜으며 허형사를 향에 찡긋 눈짓을 한다. 그의 밝은 모습에 나의 경계심도 조금은 사그라든다.

 「저기요, 형사님들…….


 내가 당부를 무시하고 선배 형사에게 무례한 질문을 할까 봐서 그런지 허형사가 눈을 흘긴다. 끊임없는 짜증을 달고 사는 그의 삶도 꽤나 팍팍할 텐데 어차피 저만 손해다. 나는 말을 계속할 테다.

 「저는 두 분을 아직 신뢰하지 못해요. 아직이라는 말은, 그러니까 믿고 싶다는 뜻이에요. 다만……. 아직은 믿어도 될지, 아니면 더 의심하고 경계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은 거예요. 왜냐하면, 스스로를 형사라고 밝힌 사람이 저한테 나쁜 짓을 했거든요. 아주 나쁜 짓을요. 제가 두 분의 일을 도와서 나쁜 사람을 잡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오히려 두 분한테 제가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으니까, 제가 조심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거예요.

내가 틈을 두어 둘의 표정을 살핀다. 곰형사는 나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면서도 편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내가 정면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려 허형사를 바라보자, 그는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손바닥을 내 얼굴을 향해 펼쳐 보인다.

 「잠깐만요, 유지 씨. 인정합니다. 인정해요. 우리한텐 목격자가 필요해요. 아니 뭐 물론, 결과적으로 정말로 필요한 건 범인이지만, 목격자가 있으면 잡기가 훨씬 수월하죠. 그런데요, 우리가 유지 씨한테 나쁜 놈으로 오해를 사면서까지 일을 할 필요는 없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못 믿겠으면 아예 말을 마세요. 뭐 하자는 겁니까? 애도 아니고 말이죠. 믿음이 안 간다-라고 했죠. 아니, 저희가 왜 처음 보는 사람한테 믿음을 주고 그래야 합니까? 범인을 잡는데 경찰에게 협력하고 싶으면 112에 전화해서 신고를 하시던가, 지금 당장 저희한테 말을 하셔도 됩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저희 시간 그만 뺏고, 가세요.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그가 옳다는 생각과 함께 수치심이 몰려와 목과 귀가 화끈거린다.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할 줄 알아야 어른이다.

 「죄송……. 죄송합니다. 나쁜 의도로 두 분의 시간을 뺏은 건 아니에요.」

허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면서 약지로 눈곱을 뗀다. 그런데 곰형사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게 변해있다.

 「유지양. 살인사건인데, 괜찮겠어요?

 「괜찮겠냐니…….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다시 보니 곰형사의 얼굴에는 진지함 이상의 무언가가 서려있다. 나의 반문에 그가 차가운 어조로 대답한다.

 「살인사건을 목격했다. 범인이 누군지 안다. 적어도, 얼굴을 안다. 그런데 경찰에 말을 안 하겠다. 뭐야, 공범이에요?

 「무슨 말씀이에요, 아니에요. 공범은 무슨. 다만 경찰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래요. 그 인간은 경찰에도 줄이 닿아 있어요. 믿을 수 없는 건 당연해요. 경찰이라는 인간도 나한테 해코지를 했으니까.

 「때렸어요? 구타당한 거예요?」

 「그건……. 말 안 할래요. 안 할래요.

안된다. 나는 위기를 직감하고 대답을 하다가 서둘러 말을 멈춘다. 연홍이가 아빠라는 작자에게 당했던 일이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다. 내가 강간을 당했다고 경찰에게 말한다면, 어떻게 당했는지 말해야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혹은, 내가 아니라 나를 강간한 놈이 나를 마약중독자로 몰아갈 수도 있다. 내가 마약에 취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내가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신뢰를 잃는다. 고시원 연필꽂이에 든 주사기가 떠오르자 습한 여름의 더위는 온데간데없고 등골이 오싹해진다. 얼굴의 근육이 저절로 씰룩거리고 턱이 떨리면서 혀의 가장자리를 씹은 나는 입속에서 풍기는 피의 비릿한 맛을 느낀다. 나는 불편한 감정을 표정으로 숨기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이 사람들은 어른인 데다가 경찰이니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수습이 될까.

 「나 목격자 안 할래요. 나한테는 이만큼 말을 꺼내는 데에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어요. 알기나 해요? 모르잖아요! 공범이라고 몰아세우는 걸 보니까 형사님도 착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그래 뭐, 잡아갈 거예요? 그럴 거예요?」

비록 의도치는 않았지만 말을 하면서 복받치는 억울함에 나는 눈물을 터뜨리고 만다. 게다가 침과 섞인 피까지 튀기며 울부짖은 덕에 곰형사의 말문을 잠시나마 막는 데 성공한다. 여자의 눈물, 피 튀기는 절규의 힘이다. 곰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두 눈에 분노를 모아 독기 어린 시선을 곰의 미간에 꽂자 그가 고개를 돌리며 먼산을 본다.


 다독여 줘. 다 큰 남자 둘이서 뭐 하는 거야. 내가 울잖아. 나를 다독여 줘야지. 정말이지 남자들이란 답답하기 그지없다. 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시선을 선배 형사에게서 후배 형사에게로, 또다시 반대로 던져보아도 둘은 나와 눈을 마주치기는커녕 곁눈조차 주지 않는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내지도 않는다. 솟아나던 눈물은 이미 멈추었고, 나는 습관적으로, 사실은 일부러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모양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이마저도 조금씩 무안해져 간다. 어쩌면 두 형사는 이 사실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는 걸까? 무안한 마음이 불안함으로 변해가고, 이제는 내가 둘의 시선을 피하게 된다. 더 늦기 전에 나는 손등으로 남은 눈물을 닦아낸다. 손등에는 진득한 눈곱만 묻어난다. 손을 바지에 대충 문질러 닦고, 나는 차분하고 냉정한 사람들이 자주 짓는 표정으로 담배를 꺼내문다. 라이터의 가스불 너머로 둘의 얼굴이 보인다. 둘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울음은 사람을 차분하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똑똑하게 만들지는 않는 듯하다. 인사를 하고 일어서 떠나야 할지, 그들에게 잘 가라고 인사를 건네어야 할지 고민하는 중에 허형사가 헛기침으로 말을 꺼낸다.

 「그……. 저희는 시간이 많습니다. 그쪽을 불편하게 만들 생각은 없어요. 그렇잖아요, 선배님?

곰형사가 진동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후배 형사가 계속한다.

 「조금 전에 드라이버라고……. 말씀하셨지요. 네,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유지 씨가 알고 있는 것을 듣고 싶어요. 아, 물론, 저희를 신뢰하지 않으시니 독촉하지는 않겠습니다. 성실한 형사가 살인 사건을 조사하다 보면 이런저런 마찰을 겪기 마련입니다. 일 욕심이 많아서 저희 배형사님이 유지 씨한테 실례를 했어요. 나쁜 의도는 없었을 겁니다. 맞잖아요, 선배님?

곰형사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목례하고서 입술을 감춘 채로 나를 응시하다가, 허형사에게 계속하라며 턱짓을 한다.

 「어차피 저희 둘의 명함은 갖고 계시니까, 언제라도 말씀하고 싶으시면 연락 주시면 됩니다. 물론, 저희를 믿으셔야 가능한 일이지만요. 그렇죠, 유지 씨?

그가 내게 묻자, 나는 대답을 않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에게 무례하게 굴 계제가 아닌 것 같아 뭐라도 대답을 하려는 참인데, 그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을 계속한다.

 「신뢰, 중요하죠. 맞습니다. 그런데, 유지 씨. 조심하는 것 치고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버렸어요. 드라이버, 범행 도구 말입니다. 고작 한마디 말이지만, 너무나도 정확하잖아요. 아니, 드라이버가 아니라도, 스스로가 목격자라고 밝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무모한 행동이에요. 만약에요……. 저희가 유지 씨가 꺼리는 범인과 한 패라면, 범죄자의 돈을 받아먹는 부패경찰이라면, 그도 아니라 경찰을 사칭하는 범인의 패거리라면……. 유지 씨를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죽이겠죠.

 「그럴 수 있겠죠. 그게 걱정입니다. 제가 나쁜 놈이라면 이렇게 할 겁니다. 유지 씨한테 앞으로는 드라이버니 목격자니 함부로 말하지 말고 잘 숨어 계시라고 말할 겁니다. 112에 연락해서 말하면 부패경찰에게 노출될 수 있으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겠죠. 그런 다음에 아무도 모르게 찾아가서 죽이면 되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112에 전화해서 목격자라고 말할까요? 아니면, 형사님 두 분을 믿고 지켜달라고 부탁해야 할까요? 도망을 갈까요?

 「제 대답은 이겁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내가 잘 못 들은 건 아닌데, 이게 무슨 말일까. 나는 그의 의도를 간파하려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 그의 두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지만, 사실은 고민하는 표정을 지을 뿐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없다. 하릴없이 눈을 좌우로 굴리다가 이따금씩 허형사를 응시할 뿐이다. 그는 내가 스스로 깨닫기를 바랐던 듯 하지만, 이내 기대를 접고 말을 잇는다.

 「유지 씨가 저희를 믿는다면, 부탁을 하세요. 무슨 부탁이건 말이에요. 뭐든 다 들어드리지는 못하겠지만, 해보세요. 유지 씨가 저희를 믿지 않는다면, 차라리 제가 한 모든 말을 의심하세요. 그리고 아무것도 저희에게 묻거나 부탁하지 마세요. 물론 하라고 해도 안 하겠지만요. 당연하죠.

불친절하고 신경질적인 허형사가 이토록 말재주가 좋다니 놀랍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말은 나를 안심케 하지 못하고, 오히려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그를 믿기로 결심하고 부탁을 구했다가 배신당해 죽을 수도 있다. 반대로, 그를 믿지 않고 도움을 구하지 않은 탓에 내가 화를 입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아닌 나 스스로에 있다. 이 둘을 믿고 의지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진실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옳다는 확신 없이 누군가를 판단한다는 것은 나의 능력을 아득히 넘어서는 문제이다. 치밀한 전략을 떠올릴 지능도, 양심에 등을 돌릴 배짱도 내게는 없다. 그들을 이용해야 하지만, 그만큼 나도 포기해야 한다. 더 좋은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허형사님. 저는 경찰서에 안 가요. 진술도 안 할 거예요. 목격자 같은 거, 안 할 거예요. 저를 믿어달라고도 하지 않을게요. 보호해 달라고도 안 할 거고요. 대신에, 이 말은 꼭 해야겠어요. 범인의 이름은 윤덕영이에요. 나이는 몰라요. 운이 좋다면, 아직 역삼동 호텔의 팬트하우스에 있을 거예요. 그 사람이 범인이에요. 그 사람이 드라이버로 사람을 죽였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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