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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Aug 11. 2024

[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26화

주인공-3

{ 벗, 미치광이 - 제2권 25화 }에서 이어집니다.


 몸을 틀어 사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나는 결코 그를 향해 눈짓으로 신호하지 않는다. 의미심장하게 미간에 주름을 짓거나,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따위의 그 어떠한 신호도, 나는 보내지 않는다. 미숙하게 신호를 주다가는 사장이 눈치를 채기도 전에 내 오른쪽에 앉은 허형사가 먼저 낌새를 차릴 수도 있다. 사장이 알아서 행동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고, 이게 최선이다. 그가 말한다.

 「응, 그랬구먼. 그래. 아까는 여기 경찰 양반들이 시킨 일을 하느라 제대로 못 봤는데, 어째……. 낯이 익다 했어. 긴가민가하다가 나와봤는데 역시, 자네가 맞았네. 유지양, 오랜만이야.

역시나 기민한 사장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평소보다 행동과 말투가 느리고, 어리숙한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풍기고 있다. 그의 두 다리는 평소처럼 반듯하지 않고 무릎이 살짝 구부러져서 십 년은 더 늙어 보인다. 이런 노인이 덩치 큰 변태를 야밤에 드라이버로 찔러 죽였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가 말을 잇는다.

 「일자리를 구하러 왔다가, 여기 경찰 양반들한테 붙잡힌 모양이구먼.」

사장이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파라솔로 걸어오고, 나는 다시 몸을 돌려 곰형사를 마주 보고 앉는다. 뜻밖이게도, 사장이 헛기침을 하며 허형사의 맞은편 빈 의자에 아주 자리를 잡고 앉는다. 안 그래도 이미 불편한 자리인데 사장이 동석을 하자 불안감에 다리가 절로 떨려온다. 의식적으로 발 뒤꿈치를 땅에 대고 있지 않으면 자꾸만 들썩인다. 그나마 다행으로, 나뿐만 아니라 곰형사와 허형사 또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의 왼쪽에서 태연하게 웃으며 앉아있는 사장만이 오롯이 편안해 보일 뿐이다. 다들 그가 말을 마치기를 잠자코 듣는다.

 「나도 출근하자마자 이 양반들을 만났다네. 아, 그랬지. 아니 글쎄 살인사건이 났대요, 이 동네에.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지 몰라. 유지양은 그 나쁜 놈한테 당하고도 하늘이 도와서 살았지만, 이번 사건 피해자는 운이 따르지를 않았나 봐. 이거야 원, 무서워서……. 방금 말일세, 직원이 일을 그만두겠다는구먼. 방금 지문을 찍고 나서 하는 소리야. 어디 보자, 그래. 기왕 나온 김에 면접이나 볼 텐가?

내가 어떻게 대꾸할지 고민하는 중에, 곰형사가 끼어든다.

 「제가 듣기로는 유지양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용감한 사람 덕분이라던데요? 페라리를 몰고 육교 아래를 지나가다가 유지양이 떨어지는 걸 보고 멈춰 섰다고 합니다. 낯선 사람한테 화를 입었지만, 역시나 낯선 사람한테서 도움을 받은 거죠.

그 말을 들은 사장은 주름 깊은 얼굴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마치 혼잣말을 하듯 대꾸한다.

 「나는 말이오, 아침부터 낯선 사람 둘이 가게로 와서는 동네에서 살인이 일어났다느니 겁을 주고 지문까지 찍고 그래서 말이지, 성실하고 착한 직원을 잃게 생겼다오. 사람한테 화를 입은 거지. 그러면 이번에는 누가 도움을 주려나 모르겠구먼.」

사장은 말을 마치며 나를 쳐다본다. 나는 살짝 목례를 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잘 지내셨어요.

 「잘 지내기는 무슨.

그는 가려운 목에서 튀어나오는 기침처럼 대충 대답하고는 두 형사의 얼굴을 훑어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허형사가 또다시 짜증스러운 미간의 주름을 숨기지 않는 가운데, 배형사가 의자를 당겨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을 꺼낸다.

 「어르신, 죄송하게 됐습니다. 사실 탐문이라는 게 그래요. 그러니까……. 

곰이 후배를 대신해서 친절을 짜내는 중에도, 허형사는 입술을 왼쪽아래로 길게 늘어뜨리며 먼산을 볼 뿐이다. 배형사가 말을 잇는다.

 「그래요. 불편하지요. 탐문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어르신. 지문이라는 것이 또 용의자가 아니면은 말이죠, 협조를 구하는 것이지 억지로 받아내는 게 아니거든요. 이게, 워낙에 이 가게에서 가까운 곳이 사건현장이다 보니까…….


 「됐고!

사장이 형사의 말을 자른다.

 「여보시오, 경찰양반. 아까 가게 안에서는 지문을 찍어도 된다, 안된다, 그런 말 없었잖소? 우리는 그저 부탁한다-하고 말씀을 하시니까,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고 냅다 시키는 대로 했지. 게다가 아까는 이 동네라고만 말씀을 하셨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사건이 일어났다는 말은 없었잖소?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서 내 직원을 겁주고 말이지. 나는 뭐 어쩌란 거요?」

희한한 일이다. 사장은 목에 핏줄을 세워가며 곰형사에게 달려들 기세로 따지고 든다. 이제는 허형사마저도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한숨만 내쉬고 있다. 사장이 황소 같은 숨을 몰아쉬는 동안 허형사에게 도움을 구하는 눈빛을 보내는 배형사는 후배가 일부러 시선을 회피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멋쩍은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나 또한 두 눈썹을 추켜올렸다가 내릴 뿐, 그를 위해 할 말은 없다. 사장의 행동에는 이유와 계획이 있을 터였다. 배형사가 막 입을 떼려던 순간, 사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짜증을 부린다.

 「거, 얼른 짐이나 챙겨서 돌아들 가쇼. 직원이 가게에 들른 경찰들 때문에 겁을 먹어서 그만둔다고 하니, 이거 실업급여 대상이나 되는지 모르겠구먼. 직원이 없으니 하루에 절반은 가게 문을 닫아야겠지만, 하지만 말이오, 내가 가만있지는 않을 거요. 내가 직접 민원실에 가서 보상해 달라고 난리를 칠게요. 그러면 나한테 뭐라도 좀 떨어지겠지. 그리 아시고, 우리 경찰 양반들은 가 보시오. 민원실에서 내가 누구냐고 물으면, 직원하고 같이 탐문조사받다가 가게 문 닫게 생긴 이준호가 억울해서 왔다고 답할 거요. 암, 암. 아까 받은 명함이 제 역할을 하기는 하겠어!

사장의 휘몰아치는 역정에 곰은 하려던 말을 잊고 빈 담뱃갑만 만지작 거린다. 그런 모습을 곁눈질로 지켜보던 허형사가 마른세수를 하더니 말을 꺼낸다.

 「어르신.

노인의 화를 누그러뜨릴 생각이 있기는 한 것인지, 여전히 허형사의 표정은 누나를 위해 대신 라면을 끓이는 동생의 얼굴처럼 짜증으로 가득하다. 일부러 손톱의 떼를 긁으며 딴청을 부리던 늙은 사장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그제야 허형사는 말을 잇는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여기 배형사님은 제 선배인데, 원래 좋은 사람입니다. 좀 꽉 막힌 구석이 있기는 해도, 사람 좋고 일도 잘하고 서에서도 인정받죠. 다만 좀⋯⋯. 예, 융통성이 부족합니다. 다행히 제가 옆에 있으니까 방법을 좀 생각해 보죠. 어르신 하고 직원분, 이 두 분한테서 딴 채취자료,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직원분께 직접 사과도 드리고, 지역순찰도 강화할 테고 안전할 테니 일을 계속하셔도 괜찮다고 설득도 하지요. 어떻습니까, 이러면 민원실 방문은 재고해 주실 수 있을까요, 어르신?


 후배 형사의 중재가 아주 마음에 들지는 않는 모양이다. 배형사는 면도가 깔끔하게 되지 않은 입 가장자리를 긁으며 근심 어린 표정으로 허형사와 노인의 얼굴을 좌우로 살펴본다. 내가 생각하기에 허형사의 제안은 제법 괜찮다. 무엇보다 노인의 지문이 경찰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막을 수 있고, 편의점 직원도 일자리를 지킬 수 있으므로 사장의 노기 어린 겁박이 제대로 통한 셈이다. 직원이 일을 그만둔다면 내가 다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만 지금 상황을 고려할 때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다. 허형사의 말을 들은 사장이 목을 가다듬고 차분한 말투로 대답한다.

 「뭐, 그럽시다, 그럼. 직원은 내가 타이를 테니 마음 쓸 것 없어요. 괜히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영 마음이 불편하구먼. 젊은 형사양반, 내 사과하리다. 그리고⋯⋯.」

사장은 방귀를 뀌듯 엉덩이 한쪽을 의자에서 떼더니 바짓주머니에 손을 넣어 명함 두 장을 꺼낸다. 그는 잠시 손에 든 명함을 응시하더니 허리를 숙여 플라스틱 탁상 가운데에 올려두며 말을 잇는다.

 「퉁칩시다. 명함은 도로 챙겨가쇼. 민원실에 안 가겠다는 약속, 뭐 그런 거지.」

허형사는 먼저 본인의 이름이 쓰인 명함을 잽싸게 챙겨서 주머니에 넣는다. 배형사가 제 명함을 챙기지 않고 머리 뒤로 손깍지를 하고 가만히 있자, 허형사가 조용히 투덜거리며 선배의 명함을 마저 챙겨 주머니로 넣는다. 그제야 곰이 깍지를 풀고 두 손을 탁상 위에 가지런히 올리며 말한다.

 「신원조회는 할 겁니다. 아, 마저 들어주십시오, 어르신. 이건 업무상 절차예요. 심지어는 이렇게 미리 말씀드릴 필요도 없지요. 굳이 말하자면, 호의입니다. 문제없죠?」

 「살인 사건이라지 않았소. 범인을 잡아야 문제가 없어지는 거지. 이 동네, 재개발 때문에 사람이 얼마 남지도 않았어요. 남은 시간 무서워하지 않고 살게끔, 형사양반 둘이서 수고 좀 해주시오.」

 「예. 물론입니다, 어르신.」

곰형사가 대답하는 동안 사장은 플라스틱 의자를 뒤로 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살펴 가시오.」

사장이 허리를 펴고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틀어 편의점으로 걸음 한다. 한두 걸음을 바로 걷다가 이내 예의 늙은이의 불안하고 느린 걸음으로 바뀐다. 허형사가 사장을 뒤따르자 사장이 뒤로 곁눈질오 보고서 말한다.

 「왜, 뭘 좀 팔아줄 텐가?」

 「아니요. 가방이 안에 있거든요. 그런데, 아까 샀던 수박주스는 영 별로입니다. 그건 들여놓지 마세요.」

사장이 골목 쪽 편의점 문을 열면서 대답한다.

 「나도 알지. 그건 수박 냄새만 조금 나는 그냥 설탕물이지. 그런데 초등학생들은 아주 좋아해. 그러니 어쩌겠나, 계속 팔아야지. 동네가 망하면서 손님이라고는 요 앞 초등학교 학생들하고 장례식장 조문객뿐이라네.」


 문이 닫히는 풍경소리가 잦아들고 얼마지 않아 다시 문이 열린다. 상자처럼 생긴 가방을 두 팔로 안아 들은 허형사가 편의점을 빠져나오고, 안쪽에서는 사장의 조심히 가라는 말소리가 들려온다. 허형사가 가방을 플라스틱 탁상에 올리자 탁상과 파라솔이 통째로 휘청거린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가방에서 손을 떼지도 못하고 다시 들어 땅바닥에 내려놓는다. 저렇게 무거운 가방을 들고서 탐문을 다닌다니, 공무원 노릇도 녹록지는 않은 것 같다. 허형사가 옷의 가슴춤을 꼬집어 쥐고 펄럭이며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는다.

 「선배님, 날도 더워지는데 우리 어디 시원한 데 가서 이야기하면 안 됩니까? 아니, 그렇잖아요. 유지양이 이야기를 하기에도 이렇게 개방된 공간은 부담스러울 수 있잖아요. 아까 오는 길에 보니까 병원 정문 쪽에 카페도 있더만요. 예?」

내게 한 말도 아닌데 순간 나서서 대답할 뻔했다. 나도 시원한 곳이 좋다. 하지만 연홍이와 함께 갔던 곳을 가기에는 마음이 불편하다.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른다. 선배 형사가 대답한다.

 「좋은 생각이다, 허형사. 어떻습니까, 유지양? 카페로 자리를 옮기는 게.」

 「아니요. 저는 여기가 좋아요. 담배 피우기에도 좋고요.」

허형사가 인상을 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구직을 목적으로 방문했다는 대외적인 사실, 사장이 살인을 하면서까지 나를 구했다는 밝힐 수 없는 사실, 담배를 태우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달아나기에도 지하의 카페보다는 골목길 앞 평상이 낫다는 사실 등, 내가 이곳을 고수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많다. 자리를 옮기는 것은 내가 아니라 경찰에게 유리한 수단일지도 모른다. 나는 불안을 감추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을 곧장 행동에 옮긴다. 버지니아 레드, 불을 붙이기 전에 특유의 달큼한 향이 나를 안심시킨다. 연기가 폐를 채우고, 몸속의 근심은 연기 속에 녹아든다. 뿌연 근심을 조용히 입으로 뱉는다. 곁에서 누가 담뱃불을 붙이면 애연가는 마음이 동하기 마련이다. 역시나 곰형사가 탁상 위에 놓인 빈 담뱃갑을 들고서 편의점으로 들어간다.


 풍경소리가 날카롭게 울리고, 담배는 쓰다. 두 형사가 태호와 연홍이를 구하게끔 해야겠다. 사장과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세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나 혼자서 방법을 생각해 내야만 한다. 머릿속 칠판을 깨끗이 지우고 침착하게, 하지만 빠르게 계획을 세우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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