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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Mar 30. 2023

랍스타

소설 


“축대 위로 올라오세요.”     

 

 우리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내가 하는 말이다. 축대는 흔한 지형이 아니다. 재개발 재건축 광풍 속에 웬만한 굴곡은 사정없이 깎아버리는 요즘 시대에 몇 안 남은 유적 같은 구조물이다. 축대 위엔 대략 예닐곱 채의 작고 오래된 단독주택이 자리 잡고 있는데 우리 집은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무려 3층 집. 그중 내가 사는 곳은 지층이다. 지층이라곤 하지만 축대 덕분에 웬만한 건물의 4, 5층 높이다. 이 건물엔 여러 가구가 살고 있는데 그들은 반대쪽 출입구를 통해 드나든다. 그곳은 커다란 철문과 드넓은 잔디밭을 통과하게 되어있다. 같은 건물임에도 우리 집은 뒤편 축대를 한참 걸어 올라가 쪽문을 통해 들어간다. 재미있는 구조다. 

 그런 독립성이 맘에 들었고 전망과 운치마저 있어 만족스러웠다. 한 가지 불편한 점은 우편물이나 택배가 우리 집이 아닌 반대쪽 주 출입구로 간다는 것이다. 잘못 배달된 물건을 찾아오려면 축대를 내려와 주택가 골목으로 한참을 들어가 커다란 철제대문에 붙어있는 초인종을 눌러야만 했다. 그래서 음식을 포함한 각종 배달원에게 미리 신신당부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배달 사고가 잦아들었다. 

 어느 날이었다. 아내가 전화기에 대고 화를 내고 있었다. 옆방에서 듣고 있던 나는 금세 상황을 이해했다. 택배기사와 싸우고 있다. 아내는 분명히 여러 번 강조했는데 왜 물건이 주인집으로 갔냐고 따졌다. 늘 오던 택배기사가 아닌 것 같았다. 오랜만에 직접 가지러 가면 되지 뭘 저렇게 화를 내나 싶었다. 그런데 상황이 심각하게 흘러간다. 아내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제가 배송 메모에다 분명히 적었는데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아니,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지금!”

“축대 위로 올라와서 갖다 주셔야죠!”

“방금 뭐라 하셨어요?”     


 궁금증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이었다. 택배기사가 뭐라 했길래 뭐라 했냐고 물을까. 옆방으로 건너갔다. 아내는 얼굴이 붉어진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뭔가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내가 나서야겠군. 하지만 싸움을 한다면 좀 더 명분 있는 싸움을 하고 싶었다. 하필이면 택배기사냐. 아내는 끊긴 전화를 내려놓고 거친 숨을 쉬고 있었다. 이윽고 상황을 묻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보고.. 씨발년이래.”


 난 말을 더 듣지 않고 전화기를 빼앗았다. 끊겨 있었다. 통화목록에서 최근 번호를 눌렀다.     


“너 어디야?”

“넌 누구야?”     

 

이렇게 한 마디씩 교환했다. 너무 흥분했나 보다. 하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좀 전에 너 뭐라 그랬어?”

“뭐라 그러긴 뭘 뭐라 그래, 젊은 놈이 싸가지 없이 어디서.”     


 내 목소리가 그렇게 젊어 보였나? 하긴 그쪽이 목소리로만 판단하면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긴 했다. 어차피 시작된 전쟁, 이렇게 통화만 할 순 없었다. 어디냐고 재차 물었다. 그 집 앞이란다. 그 집이란 우리 집 반대편 주인집을 말하는 거겠지. 난 꼼짝 말고 기다리라고 위협한 뒤, 경황없는 아내가 말릴 새도 없이 달려 나갔다. 문제의 장소에 도착했더니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탑차에서 물건을 내리고 있었다. 그는 다가오는 나를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마저 짐을 내렸다. 반말로 시작을 했지만, 막상 대면하니 애매했다.      


“방금 통화한 거 아저씨 맞죠?”

“잠깐만요, 배달 좀 하고.”     


 이런 식으로 만남이 시작됐다. 그는 골목에 있는 집들을 돌며 한 아름 안은 짐들을 하나씩 떨구고 벨을 누른 뒤 다음 집으로 이동했다. 다세대주택 안으로 들어가서 복도 계단으로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그걸 다 보고 서 있었다. 바쁜 건 알겠는데 다소 오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필요이상 많은 짐을 들고 낑낑거리는 모습이나 여러 번 한숨을 내쉬며 땀을 훔치는, 그러면서 나에게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는 모습이 그랬다. 이윽고 이 동네를 대충 끝낸 듯 한결 느려진 걸음으로 차로 돌아온 그는 여전히 나를 외면한 채 트럭 짐칸으로 올라가 짐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난 언제까지 저러나 보자 싶어 팔짱을 낀 채 계속 지켜봤다. 그는 생각난 듯 몸을 돌리더니 짐칸 한쪽에 치워져 있는 물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난 무시하고 계속 그를 노려봤다.     

“물건 여깄어요.”

“지금 물건이 문제예요?”

“그럼 뭐가 문제예요?”

“좀 전에 전화로 욕했죠?”

“내가 왠종일 이거 날라서 얼마 버는 줄 알아요?”

“욕했냐고!”

“안 했어!”

“들은 사람이 있는데 왜 거짓말을 해요?”

“내가 왜 거짓말을 해요?”
 “돈 적게 벌면 여자한테 막 쌍욕 해도 돼?”

“욕 안 했다니까!! 그냥 혼잣말이었어!”

“무슨 혼잣말이 씨발년이야?”

“누가 씨발년이래? 혼자 씨발 한 건데.”

“혼자 씨발 했다고?”

“그래!”     


 전형적인 회피 방식이었다. 당연히 믿을 수 없었다. 우리 집에 같이 가서 아내와 대질하자고 했다. 그는 바쁘다며 거부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업무에 대한 애로사항과 자본주의 계층 대물림에 대한 문제의식을 분노의 형태로 표출했다. 자기 아들도 이제 학교를 졸업하면 취직할 데가 없어 막노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아들이 어떤 종류의 학교를 졸업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과 무관한 내용이었다. 자식 얘기를 굳이 함으로써 연장자에게 대든 나와, 여자에게 욕한 자신을 퉁치려는 것으로 보였다. 

 그가 가진 문제의식에 동의할뿐더러 아까 집을 나설 때에 비해 화도 어지간히 식어 있었다. 그러나 화를 계속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세상에 분노했으면 대상을 잘 골라야지 이렇게 쉬운 방법을 택하나?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나이를 먹었어야지 평생 아무 생각 없이 어제를 반복하면 결국 나이를 항문으로 먹었다는 소릴 듣게 되지 않을까? 이런 내용들을 알기 쉽게 요약해서 욕을 섞어 풍부한 음량으로 전달했다. 

 그는 내 멱살을 잡고 쌍욕을 퍼붓는 것으로 대응했다. 바야흐로 원초기질들의 잔치가 시작됐다. 어차피 서로에게 치명상을 입히려는 게 아니라 자기 화를 푸는 짓이었기에 하릴없이 시각 청각적 효과만 극대화됐다. 사람들이 30대 남자와 50대 남자가 드잡이하는 광경을 재밌게 구경하며 지나쳤다. 나이 차이는 있지만 싸움 자체가 워낙 대등했기에 굳이 참견할 문제는 아니란 눈치였다. 나도 언젠가 스무 살 어린놈과 드잡이를 하며 모멸감을 느낄 수 있고, 그도 소싯적에 스무 살 연장자에게 모욕을 줬을 수 있다. 다만 여자라서 만만해 보였다면 이는 시간도 어쩌지 못하는 숙명적 모욕이란 생각에 난 더 힘을 냈다. 욕을 하면 모욕죄에 해당하고, 멱살을 잡는 것도 폭행죄에 해당하지만 난 법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 없었고, 그도 그런 듯했다. 우리는 서로를 쥐고 흔들며 친한 친구처럼 하염없이 쌍욕을 교환했다. 멱살을 놓은 무렵엔 정이 들 정도였다.

 결론은 나지 않았다. 다음부터 난 택배를 시킬 때 아내에게 내 전화번호를 적으라고 할 것이고, 택배기사는 물품 수령인과 통화를 할 때 지금보다는 조심할 것이다. 화해 없이 싸움을 끝낸 뒤 물건을 챙겨 뒤돌아섰다. 집을 향해 걷다가 문득 돌아보니 그는 내게 등을 돌린 채 짐칸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물건들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터벅터벅 걷다가 문득 내려다보니, 비도 안 왔는데 골목 한쪽에 물이 고여 있었다. 거기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참 재미없는 한때를 살았다고 생각했다. 잔잔하던 물속의 내 얼굴이 갑자기 수십 갈래로 찢어졌다. 트럭의 굉음이 뒤따랐고 나는 구정물을 뒤집어썼다. 멀어지는 후미를 보니 방금 그 택배 트럭이었다. 일부러 그랬다는 확신이 들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는 트럭을 쫓아 달렸다. 트럭은 무서운 속도로 골목 끝을 향해 멀어졌다. 자기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는 움직임이었다. 살의에 가까운 분노가 치밀었지만 계속 쫓는 건 바보짓이었다. 트럭이 언덕 지평선 아래로 사라진 것을 확인하며 아내에게 전화해서 택배기사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아내는 내 다급함을 읽었는지 바로 가르쳐줬다.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열 번 넘게 계속 걸었다. 계속 받지 않았다. 전화를 포기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선 채로 본능과 당위 사이를 방황했다. 옷이야 빨면 되고, 시간낭비하고 스타일 구긴 것만 빼면 딱히 손해 본 것도 없다. 집에 가서 잊으면 된다. 하지만, 저렇게 직업적 피로를 애먼 사람에게 유아적 방식으로 푸는 놈들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만들어야 한다. 전화번호도 알고 소속 회사도 안다. 아무리 귀찮아도 할 일은 해야 한다. 난 일단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골목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축대길이 맞물려 있다. 난 골목을 빠져나와 기계적으로 좌향좌를 하여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언덕이 유난히 힘들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그만두자. 이번만 특별히 용서한다. 다음부터 조심해라. 난 좀 쉬어야겠다. 

 그때였다. 갑자기 뭔가를 놓친 기분이 들었다. 난 땅만 보고 걷다가 골목 끝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른쪽은 집 방향이 아니기에 쳐다볼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쳐다봤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늦지 않았기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돌아서서 이젠 뒤쪽이 된 문제의 오른쪽을 봤다. 

 세상 난리도 아니었다. 조금 전의 택배 트럭이 옆으로 넘어져 있고, 서슬에 열린 짐칸으로 쏟아진 물건들이 내장처럼 사방에 처참하게 널브러져있었다. 운전석은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걸 설명하듯 구급차 한 대가 급히 떠나고 있었다. 그제야 수많은 구경꾼이 눈에 들어왔다. 경찰도 와 있었다. 나는 마치 범인인 양 고개를 홱 돌리고 집을 향했다. 사고가 났다. 급하게 핸들을 꺾다가 옆으로 넘어진 것으로 보인다. 정황상 내가 강력한 원인 제공자다.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집은 쉽게 가까워지지 않았다. 오늘따라 오르막길이 유난히 힘이 들었다. 그는 어떻게 됐을까. 설마 죽었을까? 무심한 구경꾼인 척 상황을 좀 더 살폈어야 했나? 만약 죽거나 심각하게 다쳤다면 나는 어느 정도의 가책을 느껴야 하나. 아니다. 이런 식으로 가면 택배를 주문한 것부터 이 집에 이사 온 일까지 죄다 후회해야 한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빨리 언덕을 올라 집에 가는 것이다.      

 깜짝 놀랐다. 나 말고 언덕을 오르는 이가 또 있었다. 오늘따라 잔뜩 좁아진 시야 덕분에 그것을 스치는 순간에서야 알아챘다. 검은색에 가까운 갈색의 생명체가 힘겹게 오르막을 전진하고 있었다. 바닷가재였다. 그 뒤로 사람의 발자국처럼 물 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오르막 초입에 뚜껑 열린 스티로폼 박스가 채 녹지 않은 얼음덩어리들과 함께 나뒹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가야 할 음식일 터였다. 원래 저렇게 산 채로 배달되는 거였구나. 속도는 느렸지만 움직임이 자못 필사적이었다. 박스에서 본의 아니게 탈출한 뒤 뭐라도 해야 했을 거다. 저 위로 올라가 봐야 우리 집밖에 없는데 어떡하냐. 잠시 생각하다 난 조심스럽게 그걸 집어 올렸다. 어차피 집게발엔 고무 밴드가 감겨 있어 위험하진 않았다. 

 당연히 아내는 황당해했다. 기세등등 나가서 한참 뒤에야 살아있는 랍스터와 함께 나타난 나는 설명할 게 너무 많았다. 어떻게 둘러댈까 고민할 시간이 없어 무성의하게 거짓말을 했다. 택배기사와는 적당히 실랑이하다가 헤어졌다. 걸어오다가 랍스터를 발견했다. 상자에서 탈출한 듯 보이는데 상자는 보이지 않았다. 끝. 아내는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아내의 최대 장점은 뚜껑이 열리지 않은 판도라의 상자를 기꺼이 방치한다는 것이다. 아내는 난감한 내 표정을 읽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이상한 손님으로 관심을 옮겼다.     

 

“누가 택배로 시킨 모양인데 남의 걸 이렇게 덥석 집어오면 어떡해?”

“누구 건지 알면 갖다 줬지. 바로 집 앞에서 꿈틀거리는데 그냥 두고 오라고?”     

 또 거짓말을 했다. 상자를 보면 주소를 알 수 있었을 것이고 바닷가재는 집 앞까지는 미처 오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내는 수긍했다.      

“먹을까?”     

 마음에 일말도 없는 말을 했다. 거절당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아내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걸 산 채로 쪄야 하는데…. 도저히 못 하겠어.”

“새우는 산 채로 잘만 찌면서…. 그럼 키울까?”

“어떻게?”

“어항 사서 물 붓고 먹이 주면 되지.”     


 아내는 난감해하면서도 재밌는 일이 생겼다는 표정이었다. 계획대로 됐다. 바로 실행에 옮겼다. 집 근처의 대형마트에 열대어 매장이 있었다. 마침 할일 없던 직원을 붙잡고 갑각류 사육에 대해 자세히 교육받은 뒤, 필요한 물품들을 샀다. 돈이 생각보다 많이 들었다. 평소 기분파도 아닌 내가 이렇게 닥치는 대로 지출하는 것이 새로운 반려동물을 들이는 소싯적 흥분의 소환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다. 진짜 이유를 떠올려내기가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만 난 외면하고 바삐 움직였다. 어항에 수중 모터를 설치하고 수온이 낮아야 한다 해서 냉각기를 달았다. 물 오염 방지를 위해 여과기도 달았다. 어항 바닥에 모래를 깔고 항아리 조각으로 은신처도 만들었다. 수초도 심었다. 마지막으로 어항에 바닷물을 채웠다. 비중계로 염도를 체크한 후 집게다리의 족쇄를 끊은 뒤 바닷가재를 어항에 넣었다. 가재는 잠시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항아리 조각 밑으로 몸을 숨겼다. 새집이 어떤지, 그리고 죽음의 위기를 벗어나 제2의 생을 살게 된 기분이 어떤지 알 길은 없었다. 다행히 만 하루 가까이 물밖에서 버틴 후유증은 없는 듯했다. 

 그날부터 틈만 나면 멍하니 어항 속의 랍스터를 관찰하는 게 주요 일과가 됐다. 쉬는 날엔 온종일 들여다보기도 했다. 아내는 그런 나를 놀리기도, 걱정하기도 했다. 뭐라 말하고 싶지만 새로 생긴 건전한(?) 취미를 지적할 일은 없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랍스터가 들어온 날 밤 택배기사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항을 설치한 날도 전화를 걸었다. 그는 받지 않았다. 그가 받는다고 해도 할 말은 없었지만 – 이제 와서 구정물을 튀긴 걸 따질 건 아니었다 – 난 습관처럼, 그걸로 무슨 도리를 다하는 양 틈날 때마다 랍스터를 멍하니 보면서 전화를 걸었다. 응답이 없는 족족 묘한 안정감을 느꼈고 새로 생긴 이 질서가 계속되길 바랐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오이와 당근을 잘게 썰고 마른 멸치를 섞어 어항에 뿌렸다. 그리고 랍스터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쟤는 날 알아볼까? 알아본다 한들 꼬리를 흔들진 않을 테니 난 끝내 모르겠지. 생각해보니 성별도 나이도 모르는구나.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어차피 세상엔 모르는 것투성이고 그걸 하나씩 알아서 깨우치는 것과 내 삶의 질은 사실상 무관하겠지. 굳이 얘기하자면 반대일 것이다. 언제나 번뇌는 뭔가를 알게 되어 생기니까. 아 참, 전화를 해봐야지. 자연스럽게 전화기를 들어 발신 버튼을 누르려던 손을 멈칫했다. 어항 앞에 앉아 전화를 거는 행동이, 자연스러워도 너무 자연스럽다. 도대체 뭐 하는 짓인가. 인제 그만두자. 의미도 목적도 없는 행동을 반복하기엔 내 인생이….

의미 없는 행동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될 만큼 내 인생이 그렇게 가치가 있나 하는 의문이 들 때 전화벨이 울렸다. 무심코 받을 수가 없는 타이밍이었다. 타이밍보다 더 놀라운 건 발신자였다. 내가 그동안 무수히 시도했던 그 번호였다. 

 받고 싶지 않았다. 쓸데없이 심장이 뛰는 게 맘에 안 들었고, 당연한 얘기지만 할 말도 없었다.      


“여보세요?”

“예. 저 XXX 씨 아들인데요, 부재중 전화가 많이 찍혀서요, 아버지 친구분이신가요?”

“아, 음…. 예. 그게..”

“만난 지 오래된 친구신가요? 다른 분들한테 연락을 못 받으셨나 보네요.”

“예? 무슨...”

“돌아가셨어요. 한 달 전에.”     


 그동안 날 괴롭혔던 모호한 불편함이 이렇게 해소됐다. 아니 해소라기보다 폭발이었다. 당장 전화를 끊고 싶었지만, 그저 퍼즐들이 맞춰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 어쩌다가,”

“교통사고로. 휴대폰 처분하기 전에 부재중 전화 목록 보고 전화드렸어요.”

“아, 예.”

“혹시 아버지가 남긴. 뭐,”

“예?”

“채무라든가….”

“아, 아뇨.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러면….”

“....”

“더 할 말 없으시면…. 이만 끊겠습니다.”

“아, 예.”   

  

 전화를 끊고 처음 든 생각은 내 진술에 문제는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난 조금 전까지 취조실에 있었고 거기에도 랍스터가 담긴 어항이 있었다. 

 몇 년 전에, 한 초등학생이 아파트 옥상에서 장난으로 던진 벽돌에 맞아 40대 여자가 죽었다는 뉴스가 있었다. 사건이 어떻게 처리됐는지, 보상은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형법상 미성년자인 가해자에겐 어떤 조처가 내려졌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불확실하게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로 가해자의 부모가 고인의 장례식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과 자기 자식에게 생긴 트라우마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그 가족 모두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 내 상황은 어느 정도에 끼워 넣을 수 있을까. 그날 하루를 온전히 여러 각도로 기록한 CCTV가 있다면 법정에 서도 난 무죄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니었다면 그는 지금도 살아있을 것이다. 법이란 게 이렇구나. 벽돌을 던진 초등학생의 평소 행실은 어땠을까, 그 부모는 이후에 아이에게 사람의 도리에 대해 어떻게 가르칠까. 죽은 여자의 인성은 어땠을까. 내가 아무 일 없던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까. 

 스스로 꺼낸 질문들이 하나같이 비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이 위안마저 너무 저열하다고 지적할 사람이 없다는 건 또 다른 위안이었다. 한번 들어선 길에 속도가 붙어가는 게 놀라웠다. 그날의 내 행동이 시시각각 정당해졌다. 그리고 택배기사의 최후는 영락없는 악인의 그것이었다. 권선징악 영화에서의 빌런들은 결국 자기 꾀에 넘어가 최후를 맞이하고 주인공은 대개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품위를 유지한다. 이제 나는 주인공답게 불필요한 과거는 잊어야 한다. 주인공이 고통 받는 트라우마는 가족이나 연인의 죽음에 국한되어야 하니까. 

 그날 밤늦은 시각에 전화벨이 울렸다. 문제의 그 번호였다. 아까의 내 태도가 석연치 않았음을 고인의 아들이 감지한 것인가.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만지작거렸다. 안 받을 순 없다. 그런데 신호가 끊겼다. 발신자가 전화를 바로 끊은 것이다. 잘못 눌러서일까 아니면 눌러놓고 이건 아니다 싶어 그만둔 걸까. 나는 두 번째 전화를 계속 기다렸다. 벨은 더는 울리지 않았다. 새벽녘에서야 울리다 만 전화벨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살던 대로 살되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나대진 말라는 뜻일 거다. 집행유예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사람의 감정은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 잘못을 한다. 죄책감을 느낀다. 죄책감을 느끼는 자신을 느낀다. 죄책감을 떨쳐낸다. 죄책감을 떨쳐내는 자신을 느낀다. 혹은 죄책감을 가진 상태에서 죄책감을 떨쳐내는 자신을 느껴본다. 층위들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느끼는 것과 느껴보는 것과 느껴야 하는 것이 모두 다를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럴 때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다고 쉽게 말한다. 해법은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문제가 생겼다. 내가 원인 제공을 했다. 후회된다. 끝. 다시 다음날 일어났을 때 죄책감이 옅어진 걸 느꼈다. 옅어진 죄책감에 대한 개운함과 불편함이 공존했다. 다시 감정의 층위. 서둘러 개운함을 선택했다. 신기하게도 불편함이 줄어들었다.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난 평온한 일상으로 완벽하게 복귀했고 달라진 건 랍스터의 존재뿐이었다. 집에 놀러 오는 손님들은 어항 속 랍스터를 경이롭게 쳐다봤다.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랍스터의 출처가 왜곡됐다. 그저 나의 독특한 취향. 아내 역시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아내는 궁금한 걸 잘 참는 성격이다. 의문점을 탐구하다가도 벽에 부딪히면 주저 없이 손을 털었다. 예술가 정신엔 어긋날지 몰라도 본인의 평화에는 언제나 기여했다. 그래서 아내는 늘 정신이 건강했고 그 건강은 주변에도 영향을 끼쳤다. 배우자로서 꽤 훌륭한 조건이다. 어느 날 둘이 나란히 앉아 랍스터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아내가 물었다.      


“쟤 수명이 얼마나 되지?”

“음... 그때 어항 사면서 물어봤는데 엄청 오래 산대. 100년도 더 살걸?”

“그럼 우리가 먼저 죽으면 누가 쟤를 보살피지?”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가슴 아픈 참사도 거리가 멀다는 이유 하나로 남의 일이 되고 늘 건강한 자들이 죽음을 쉽게 입에 올린다. 우리 역시 즐겁게 미래를 설계했다. 먼 훗날 둘 중 하나가 병에 걸려 생명이 꺼져갈 때쯤 저 녀석을 데리고 바닷가로 여행을 가서 아직 앞길이 창창한 랍스터를 방생하기로 했다. 꽤 근사한 계획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고 그것으로 우린 제법 낭만적인 부부가 되었다.      


*    *     *     *     *     *     *     *     *     *        


“한다 한다!”     


 다급한 아내의 외침이 들린다. 화장실에 있던 나는 다급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달려가 어항 앞 아내 옆에 자리를 잡는다. 랍스터의 등 갑이 열렸다.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않고 땅을 파거나 다리로 자기 몸을 긁는 등 이상 행동을 보여왔고 우리는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이번이 벌써 네 번째다. 처음 탈피를 했을 때의 충격은 경이를 넘어선 어떤 새로운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어항 속에 두 마리의 랍스터가 있었고 하나는 죽어 있었다. 갑각류의 생태에 관한 지식이 없던 나는 밤새 누가 들어와 죽은 랍스터를 집어넣었거나 아니면 산 놈을 넣었는데 둘이 싸우다 하나가 죽었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자세히 보니 죽은 놈은 내가 아는 애였고 산 놈은 초면이었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고 죽은 놈이 껍데기였다는 걸 알게 되기 전까지의 내 심리적 공황은 그날 모퉁이를 돌아, 사고 현장을 목격했을 때만큼 심각했다. 

랍스터가 옆으로 누워 다리를 버둥거린다. 잠시 후 열린 등 갑 안에서 투명한 머리가 삐져나온다. 우리는 혹시 방해가 될까 봐 호흡도 조절하고 한 장면이라도 놓칠까 봐 눈 깜박임도 자제한다. 어쩌면 개기일식보다 더욱 귀한 순간이다. 

 랍스터는 온힘을 다해 껍질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새 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아주 조금씩 빠져나온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덕에 긴박한 효과음이 환청으로 들려온다. 몸이 절반 정도 빠져나온 상태에서 랍스터가 다시 심한 경련을 일으키더니 몸을 뒤집는다. 놀란 아내가 내 손을 덥석 잡는다. 두 개의 손은 하나같이 흠뻑 젖은 상태다. 아내는 남은 손으로 자신의 불룩한 배를 더듬는다. 지금 랍스터는 출산의 고통을 느끼고 있을까,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분만실이다. 

 마침내 랍스터의 온전한 몸체가 샴페인 뚜껑처럼 튕겨 나간다. 우리는 탄식을 내뱉는다. 이제 랍스터는 마술처럼 쌍둥이가 되었고 하나는 옆으로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 아내와 나는 마치 우리가 해냈다는 듯 마주 보고 웃는다. 


 초인종이 울린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는 만삭의 아내를 제지하고 현관으로 갔다. 예정일은 두 달이나 남았지만, 아내는 요즘 무척 힘겨워 보인다. 그래서 조금 서둘러 출산용품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이미 아기침대와 아기 띠, 기저귀와 배냇저고리 등이 속속들이 집으로 배달되었다. 오늘 온 건 아마 방수 매트와 수유쿠션일 것이다. 

 문을 열었다. 처음 보는 젊은 택배기사가 두 개의 큰 상자와 탄산수 한 묶음을 내민다. 아, 탄산수도 시켰었지. 그는 축대 위까지 물건을 들고 걸어온 듯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차가 올라올 수 있는 길인데 그는 처음이라 몰랐나 보다. 온몸은 땀으로 젖었고 해쓱한 얼굴엔 눈그늘이 깊었다. 괜히 미안해진 나는 잠깐 기다리라 하고는 냉장고에서 시원한 음료수 한 캔을 꺼내 내밀었다. 그는 공손히 받고 나서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날 쳐다봤다.      


“저기, 죄송한데. 화장실 좀 써도 되겠습니까?”     


선뜻 허락했다. 마음 같아선 샤워도 시키고 갈아입을 옷도 내주고 싶었다. 뒤에 서 있던 아내도 나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가 화장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 아내는 서둘러 냉장고에서 수박을 꺼내 썰었다.      


“이것 좀 드시고 가시죠.”

“아, 예. 감사합니다.”     


 그는 사양하지 않고 수박을 집었다. 씨가 많지는 않았지만 뱉어내지도 않고 전부 삼켰다. 숨도 쉬지 않고 연두색 속살이 드러나도록 우걱우걱 먹는 모습이 어떤 감정을 불러들일 만큼 인상적이었다. 먹는 광경을 보고 있는 것도 뭣해서 우리는 옆방으로 잠시 자리를 피했다. 먹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수박이 저렇게 맛있을까. 소리가 멎은 걸 확인하고 열을 센 뒤 거실로 나갔다. 수박을 다 먹은 그는 랍스터가 들어 있는 어항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택배기사가 물건을 배달한 집에 들어가 뭔가를 얻어먹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지만, 집주인인 나의 응대도 이례적이었다. 연민이 호감으로 변한 것일까, 수박을 먹고 바로 가지 않는 그를 반기며 랍스터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방금 탈피를 했어요. 원래 이런 종류의 애들은 주기적으로 껍질을 갈아입거든요.”

“정말 둘이 쌍둥이 같네요.”

“그렇죠. 처음엔 저도 무슨 마법이 벌어진 줄 알았어요. 얼마나 놀랐는지….”

“그럼 저 껍질은 그대로 두시는 건가요 아니면,”

“치워야죠. 자연 상태에서는 먹기도 한다는데.”

“그럴 필요 없겠죠. 어차피 먹이를 잘 챙겨주실 테니.”

“예. 지금이 보호막이 없어서 제일 약할 때예요. 이때 많이 죽는다 그러더라고요.”

“어항이 안전 가옥이네요.”

“하하. 예. 그렇죠.”

“이름은. 안 지어주셨어요?”

“글쎄요. 내가 불러봐야 이 유리랑 물을 뚫고 쟤한테 들릴 것 같지도 않고.”     


 내가 시작한 대화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남의 집에 갔는데 어항 속에 금붕어나 열대어가 아닌 바닷가재가 있다면 보통 나오는 질문과 대답들이 있다. 취향, 동기, 출처, 비용 등등 이 모두 생략됐다. 오직 직관으로 보이는 것만 말하고 있다. 조금 비일상적인 대화가 답답할 정도로 내가 틀에 박힌 인간이었나 반성하면서도 입으로는 주류의 화법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원래는 이렇게 취향이 독특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예. 어쩌다가…?”

“그냥, 갑자기 랍스터를 키우고 싶어지더라고요. 4년 전부터.”

“4년 전부터 랍스터를 키우고 싶어지셨다고요?”     


 처음엔 착각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후로 침묵이 이어진 걸로 보아, 이건 분명히 정색이었다. 갑자기 랍스터를 키우고 싶었다는 말이 설마 충격적인가? 흡사 평소 나를 알아왔던 사람처럼 그는 생각에 잠긴 듯 눈의 초점을 제거했다. 침묵이 계속 흘렀다. 말을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타이밍을 놓쳤고 그저 어항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랍스터는 껍질과 본체 둘 다 미동도 없었다. 택배기사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잠시 거실로 나왔던 아내는 견디지 못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내 집에서 내가 이런 불편함을 감당해야 하는 게 부당하다고 느꼈다. 반대로 내가 자초했으니 감수할 일이기도 했다. 어항의 안쪽과 바깥쪽 시간이 모두 멈췄다. 

 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은 내게서 시작된 것인가 아니면 상대방에서 내게 전달된 것인가. 여전한 침묵 속에서 후자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그는 지금 내게 말하고 있다. ‘어느 날 문득 바닷가재를 키우고 싶어졌다는 거, 거짓말이잖아.’

 시간이 빠르게 역행하여 몇 년 전으로 돌아가 멈췄다. 이제는 고인이 된 어떤 중년 남자가 쏟아냈던, 기억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진 어떤 말이 마법처럼 부활했다. 조사와 어미가 포함된 완벽한 문장이 아닌 몇 개의 단어들뿐이었지만 뇌리에 상기되는 선명함은 소름끼칠 정도였다. 건당 700원, 월세. 입에 풀칠, 아들, 학교 졸업, 취직. 막노동. 

 시간이 귀환한다. 이번엔 소리가 아닌 이미지들과 함께. 주마등처럼 스치는 게 아니라 슬라이드 필름처럼 하나하나가 고통스럽도록 구체적이었다. 깨진 앞 유리, 떨어져 나간 문짝, 나뒹구는 박스들, 결백하고 떳떳한 구경꾼들, 필사적인 랍스터, 아내의 얼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던 휴대폰 액정, 랍스터의 첫 탈피, 아이의 초음파 사진. 

 말없이 어항을 바라보는 이 남자가 누구를 닮았는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너무 생각하기 싫었다. 그랬더니 그게 뜻대로 됐다. 그저 이상한 이방인이 내 집에 들어와 나가지 않고 있다. 마음 상태를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는 건 내가 강인한 정신력을 가져서가 아니다. 치명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도 그랬다. 과연 죄책감이 화두였을까? 내가 과연 고뇌했을까? 어쩌면 감정놀이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오는 마지막 슬라이드 필름이 아이의 초음파 사진이라는 게 그 얄팍함에 대한 증명이다.   

   

“수박 좀 더 드릴까요?”     


 결국, 내가 침묵을 깼다. 대꾸를 안 하거나 이상한 소리를 하면 내쫓을 생각이었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수박 말고……. 죄송하지만 이걸 주시면 안 될까요?”     


 그가 가리킨 손가락의 끝엔 조금 전 탈피를 끝낸 랍스터가 쉬고 있었다. 죄송하다고 말했지만 죄송한 말투는 아니었다. 나는 경악하지 않았다. 당장 내쫓지도 않았다. 대신, 마치 지나가는 사람처럼 건조하게 되물었다.      

“뭐 하시게요?”

“바닷가재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서요.”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숨죽이며 듣고 있던 아내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뛰쳐나온 것이다. 그러나 거실에 흐르는 정체 모를 무거운 공기를 직감한 아내는 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난 아내의 이런 신중함을 좋아한다. 곧 태어날 아기가 아내의 기질을 물려받기를 바란다.     

 

*    *    *    *    *    *    *    *    *    *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이란 가치에 집착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행복이 어떤 짜릿한 무아지경이나 넘치는 기쁨으로 하루하루가 신명나는 상태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고통을 포함하여 나를 성가시게 하는 모든 요소가 제거된 상태. 내겐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행복해지고 싶었던 나는 랍스터를 커다란 플라스틱 밀폐용기에 담아 건네며, 집을 나서는 젊은 택배기사에게, 껍질을 자기가 알아서 벗었으니 먹기 편할 거라고 웃으며 말해줬다. 그 말에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고 아내는 결국 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가 간 뒤 아내는 문을 꽝 닫고 방에 틀어박혔다.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상태로 우리는 대화 없이 각방을 쓰기 시작했다. 이 냉전이 끝나는 시점에 결국 난 아내에게 모든 걸 털어놓아야 할 것이다. 난감한 심정으로 며칠을 보낸 끝에, 냉전의 종말보다 진통이 먼저 찾아왔다.      

 팔삭둥이로 태어난 아들은 인큐베이터로 들어갔다. 의사는 스트레스나 충격으로 유산을 할 순 있지만, 조산과는 관계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아내와 내가 몇 개의 호스를 꽂고 누워있는 1.3kg짜리 아이를 보며 드는 생각은 비슷해 보였다. 인큐베이터가 모여 있는 방의 이름이 ‘신생아 중환자실’이란 것도 끔찍했다. 그 방에는 다섯 명의 아기들이 누워있었는데 그중 가장 작았다. 다른 아이의 부모들이 면회 시간에 들어와 우리 아이를 보며 위안을 얻어가는 눈치였다. 행복이 무서운 속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의사는 상태가 좋지 않다고만 할 뿐 더 이상의 예측은 삼간다. 곧 나아질 거라든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든가 일절 말하지 않는다. 아내는 별다른 절규 없이 하염없이 눈물만 흘려댄다. 며칠 만에 옷도 갈아입고 랍스터에게 먹이도 주기 위해 집에 들어갔다. 텅 빈 어항을 보고서야 내가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진짜 랍스터를 먹었을까? 그가 통에 어항 물을 채워서 조심스럽게 들고 갔다는 것이 나로서는 희망이다. 랍스터를 준 대가로 지금까지의 모든 경로 - 그가 날 찾아오게 된 4년의 여정 - 를 속 시원히 묻고 싶었다. 하지만 난 질문을 꿀꺽 삼켜버렸고 그는 그 점을 치하하는 듯 미소를 보여줬다.      

 정의가 아닌 균형에 대해 생각한다. 한 사람의 목숨과 바닷가재의 목숨이 맞바꿔진다면 인간과 갑각류 앞에 어떤 수식어들이 필요할까. 형편없는 인간과 고귀한 바닷가재, 흔해빠진 인간과 멸종위기의 바닷가재, 살 만큼 산 인간과 꽃도 피우지 못한 바닷가재….

 만약 수식어가 모자란다면 아직 부모와 미처 교감하지 못한 신생아의 목숨이 거기에 얹혀야 할까? 

 아이를 가슴에 묻은 수많은 부모를 떠올린다. 만약 부모보다 먼저 가는 것으로 아이의 운명이 정해진다면, 꼭 그래야만 한다면, 그나마 최적의 장소는 인큐베이터 안이 아닐까. 필사적으로 생각을 이어간다. 운명은 받아들이는 것인가 극복하는 것인가. 행복을 위해서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가. 혹시 운명이 장난을 친다면 웃어넘겨야 하나 화를 내야 하나. 우리가 축대 위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게 운명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엔,     

여기까지 왔다. 이다음은 알 수 없다.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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