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아이도 많이 성장했고, 엄마도 많이 성장한 것 같다
이제 아이가 태어난 지 4년 반이 다 되어간다.
3년 반 정도는 아주 잠깐의 시간을 빼고는 아이와 모든 순간을 함께 했다. 작년 봄에 처음으로 유치원에 보내기 전에 아이랑 떨어져 있었던 시간을 다 합쳐도 48시간이 안 됐다. 처음 위드 코로나를 시작했을 때 한 달 정도 1-2시간 어린이집에 보내다가 코로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다시 가정 보육을 했으니까. 코로나 덕분에 의도치 않게 세 돌까지는 엄마가 키우면 좋다는 이론을 몸소 실천한 엄마가 되었다.
그러니까 아이가 다섯 살이었던 작년에 처음으로 규칙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이 생겼다. 일 년 정도는 나름대로 회복의 시간을 가졌다. 처음에는 몸이 삐꺽 댔다. 몇 년 동안 돌보지 못한 내 몸에서 이런저런 신호가 왔다.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시기에 코로나가 유행해서 지독하게 힘든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몸도 망가졌지만 정신적으로도 많이 지쳐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잠깐도 생각할 겨를도 없이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으니.
제삼자의 눈에는 나와 아이가 함께 하는 순간이 행복해 보이기만 했을 수도 있겠지만, 주 양육자로서 아이와 하루종일 함께 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다.
돌에서 세 돌까지가 참 힘든데, 원빈 같은 남자친구가 우리 아이처럼 행동했다면 당장 헤어졌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하루 종일 자기만 바라봐 주기를 원하고, 끝없는 상호작용을 요구하고, 이런저런 것을 거부하는 예민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아무리 설득을 해도 행동의 변화가 없고. 어쩌다가 며칠 좀 문제가 없었던 양치질도 갑자기 하기 싫다고 거부하고. 매일 잘 씻고 물놀이를 좋아하던 아이가 샤워를 거부하고. 잘 먹던 음식도 갑자기 안 먹고. 이런다고 했다가 저런다고 했다가. 날씨가 추워지고 있는데 마음에 드는 얇은 옷만 고집하거나. 한 번 좋아하는 것에 빠지면 백 번 넘게 반복해서 해야 하고. 응가를 다 한 것 같은데 삼십 분 동안 안 닦는다고 하고. 이 모든 일들이 한두 번 정도 하루 이틀 정도 겪는 일이면 그러려니 할 수 있는데, 하나의 특이한 행동이 몇 달에서 몇 년간 나타난다. 아주 다양한 일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아이랑 함께 하는 일상은 매일이 롤러코스터에 탄 듯하게 지나간다.
내가 무슨 음식이 먹고 싶은지, 내가 좋아하는 식당이나 카페는 뭐였는지 내가 좋아하는 옷은 어떤 스타일인지 내가 좋아하는 향수는 무엇이었는지 생각도 안 났다.
어느 날 친구한테 육아의 힘듦을 토로하고 있었을 때 친구가 나에게 제시해 준 솔루션은 주말에 1~2시간이라도 남편한테 아이를 맡기고 카페라도 가서 커피 한 잔 하고 오라고 했다. 나한테 전에 걷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냐고. 조금 걷다가 들어오라고. 그런데 그때 나는 항상 같은 대답을 했다. 나는 그 말을 남편한테 할 수가 없어. 왜 말을 못 하냐. 이런 대화가 매번 반복 됐다. 사실 나도 이 조언을 누군가에게 해주고 싶다. 나는 못 했지만, 다른 사람은 이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서 충전을 하고 다시 아이랑 함께 하기를, 제발 나처럼 힘들지 않기를. 아이가 내가 있는 공간에 같이 있으면 엄마는 잠시도 쉴 수가 없다. 아주 잠깐 카카오톡을 확인하면 징징대는 것이 아이이니까.
돌 전후에 육아가 힘든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엄마는 아이를 보는 것 외에도 잠깐씩 집안일을 해야 하는데 그 시간에 아이의 징징댐이 시작되서였다. 이런저런 괴로움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을 시간도 없는데... 지금 놀고 있는 것이 아닌데, 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괴로워해야 하는 것인가. 아이와 함께 빨래를 널기도 하면서 집안일을 놀이로 승화시킬 수도 있지만, 이것도 매번 이렇게 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러다가 아이가 어느 정도 크면 엄마가 설거지, 빨래 등을 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는 때가 온다. 미디어 노출을 시작하면서 찾아온 평화이기도 했다. 두 돌 전에는 미디어 노출이 없었기 때문에 잠깐 시간을 끌 수는 있었다. 가끔 육아 조언 중에 미디어 노출을 할 경우, 엄마가 같이 봐주라고 하는데, 나도 이 조언에 대해 매우 동의하고, 이것이 얼마나 긍정적인 효과가 있는지도 누구보다 잘 알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겨우 시간을 확보해야 조금이라도 집을 살필 수 있다. 아주 최소한의 집안일 말이다. 대단한 청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미디어 노출을 시작하던 시기의 우리 아이에게는 여전히 엄마가 전부였다. 자신이 이해해 준 엄마의 일이 끝나면 바로 자신이랑 놀기를 원했다. 텔레비전보다는 엄마였다. 텔레비전을 틀어놔도 배경일뿐 엄마랑 책을 읽고, 엄마랑 역할 놀이를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엄마가 잠깐 숨 돌린다고 핸드폰을 들면 아이는 징징댔다. 아이는 왜 눈앞에 있는 자신이랑 놀지 않고 엄마가 다른 사물에 집중하는지 이해를 못 했다. 사실 이것은 화낼 일은 아니다. 내가 너무 잘 놀아준 탓이다. 내가 잘 놀아주지 않았다면 아이는 이 정도로 엄마한테 목매지 않았을 수 있다. 아이 눈에는 엄마가 얼마나 기대고 싶은 존재였을까 싶다. 하루종일 배고프지 않게 해 주고, 엄마와 함께라면 재미까지 있으니 말이다. 리얼 독박 육아의 숙명이다. 아이가 엄마한테 목매서 힘든 것은. 그래서 독박 육아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기도 한데. 돌이켜보면 리얼 독박 육아라서 지독하게 힘들었지만, 그만큼 아이는 나를 절대적으로 사랑해 주었다. 어떻게 이렇게 나를 사랑해 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이가 항상 나한테 "내가 엄마를 더 많이 사랑해."라고 말하는데, 그게 진심임을 안다. 나도 아이를 많이 사랑하지만.
여하튼 이러한 긴 시간 끝에 내 취향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장미 향을 맡고 아 내가 좋아하던 향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육아에 대한 기록을 잘 남겨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 내가 원래 잘하던 일을 어떤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내 능력을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엄마가 아닌 나 자신으로 돌아가 개인적인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은 나에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내가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꽤 많이 회복되었다는 신호이다.
그래서 이제는 나의 육아를 객관적으로 대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작년에 아이를 유치원에 평균적으로 4시간 정도 보내게 되면서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생겼지만, 그때는 육아 일기를 이렇게 정리할 힘이 없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에 육아라는 주제를 내 옆에 두고 싶지가 않았다. 잠시라도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보고, 밀린 청소 등을 하다 보면 어느새 아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 되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