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이의 사실상 첫 기관은 세돌 반 즈음 입학한 유치원이다. 그전에 어린이집을 보내려다가 코로나 때문에 안 보냈다. (2021년 11월, 위드 코로나가 시작될 무렵 한 달 정도 한두 시간 보내긴 했었지만, 결국 코로나가 다시 폭증해서 유치원에 갈 때까지 그냥 집에만 있었다. 겨울에 코로나도 극심했던 시기라 정말 집에만 있었다.) 코로나 공포감이 최고조였던 2020년 봄, 약 세 달정도 돌이 지난 아기와 독한 마음 먹고 집콕 육아를 해보니, 왜 이 시기의 아이에게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지 나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코로나가 웬만큼 잠잠해지지 않으면 어린이집에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 아주 오래도록 코로나는 잠잠해지지 않았다. 계속 코로나 핑계를 대고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았다. 내 손으로 키울 수 있게 해 준 코로나에 다시 한번 감사하다.
오늘 또 이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집에 오는 길에 마주친 어린이집 일행 때문이다. 어린이집 아이들이 산책을 마치고 어린이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두 돌 전후로 보이는 아이들 10명 정도를 세 명의 선생님이 인솔하면서 걷고 계셨다. 한 명이 '아빠한테 갈래. 엄마한테 갈래.'라고 하면서 칭얼대기 시작하자, 다른 아이도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엄마한테 연락해 줄게라고 하시면서 차분하게 달래주셨다. 선생님이 잘못하신 것도 없고, 아이들이 잘못한 것도 없다. 그냥 시기가 그런 것이다. 엄마, 아빠가 생각나는 시기.
이런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면서 사랑으로 돌봐주시는 선생님들께 그저 감사할 뿐이고, 얼마나 힘드실까 걱정도 되고 그렇다. 가끔 뉴스에 안 좋은 어린이집도 나오지만, 사실 좋은 선생님이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혹시 선생님이 아이에게 안전 상의 이슈 등으로 소리친 경우, 엄마 스스로 아이에게 그렇게 소리친 적이 있는지 없는지 돌아보면 바로 부끄러워지지 않을까 싶다.
지금이 4월 중순이니까 아이들에 따라서는 어떤 아이는 이미 어린이집에 적응해서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어떤 아이는 아직도 엄마를 찾을 수 있는 시기일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어린이집을 보낼지 말지 고민할 때 이 '적응'이라는 단어가 가장 걸렸다. 두세 살 아이는 자연스럽게 엄마랑 떨어져 지낼 수 있는 시기가 아닌데, 왜 엄마 없이도 몇 시간씩 잘 지내는 것을 목표로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인가. 왜 정해진 시간에 낮잠을 자는 규칙적인 생활에 적응하도록 해야 하는 것인가. 난 이 질문에 대해서 계속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코로나가 여전히 유행함에도 불구하고, 어린이집을 보내야 하는 것인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될 때마다 나는 계속 '아직은 안 되겠다.'라는 대답만 계속하게 되었다. 아이가 세 돌이 될 때까지.
우리 아이도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와 헤어지는 연습이라는 것은 결국에는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것을 적응한다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보다 내가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은 낮잠 시간이었다. 어린이집에서도 낮잠 시간을 가지는 이유는 이해한다. 어린이집에서 돌봄이 필요한 시기의 아이들은 낮에 어느 정도 잠을 자줘야 하는 경우가 많고, 아이들을 여러 명 케어하다보니, 정해진 시간에 아이들이 잘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고, 그 시간에 애들이 자기 싫어한다고 해서 안 재우면 어떤 아이는 두시에 졸리다고 울고, 어떤 아이는 두시 반에 잠투정이 시작되면서 오히려 아이들을 돌보는 난이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좀 자기 싫어도 자고 일어나면 아이들 컨디션도 리프레시되는 부분도 있고 하니까. 선생님들께서 그 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쉬시면 좋겠지만, 이런저런 잡무를 처리하시기도 하고 그래서 이래저래 낮잠 시간은 필요해 보였다. 이 부분은 어린이집마다 다르겠지만.
우리 아이는 참 잠을 재우는 것이 어려운 아이였다. 깨어있는 시간을 너무 사랑하는 아이랄까. 나도 아이도 깨어있는 시간에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 노력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런 아이가 매일 낮 한시 경에 낮잠을 잔다는 것이 상상이 좀 안 됐다. 남들이 가면 다 하고, 아이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는 워킹맘의 주 양육자와 이야기를 나눠보거나, 엄마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 어린이집을 쭈욱 보냈던 엄마도 "아이가 낮잠 시간 때문에 힘들어했어요."라고 말했다. 내가 이야기를 나눠본 케이스가 모두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평소에도 재우기 어려운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나에게는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이가 낮잠 시간 때문에 괴로워하는 일은. 돌, 두 돌에도 아이가 피곤하다는 신호를 보내서 잘 수 있도록 도와주기 시작해도 또다시 깨서 놀고, 다시 피곤하다고 하고를 두 시간쯤 반복하다가 겨우겨우 낮잠을 자는 아이였고, 두 돌 즈음에는 낮잠을 자지 않는 날도 생기기 시작했었으니까. 가끔은 특정 어린이집에서 강제로 재우기 위해서 좋지 않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엄마인 나도 애 한 번 재우려면 잠투정을 두 시간쯤 받아줘야 자는데, 이런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면 낮잠 시간에 선생님께 너무 큰 짐이 되겠다 싶었다. 실제로 너무 자지 않는 아이는 엄마에게 이 아이는 낮잠 시간이 되면 데려가라고 하는 어린이집도 있다고 들었다. 아이에게 강제로 자라고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줄 수는 없으니까. 오히려 이렇게 말해주는 곳이라면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고 싶지 않은 시간에 단체 생활의 일부이니, 정해진 시간에 반드시 자야 한다고 규칙을 정하고 이것을 따르게 해야 하는 것인가. 이것이 정말 규칙인가. 이것을 잘 해낼 필요가 있을까.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싫어하는 것도 해야 한다는 것을 아이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는 관점에서 자고 싶어 하지 않는 아이를 정해진 시간에 자도록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이 부분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물론 엄마가 사회생활을 병행하면서 지내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어린이집에 보낸다고 해서 이런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닐 테니. 나는 이 걱정이 크게 다가왔고, 아이가 나와 있을 때 가장 편안해하다 보니, 아이는 하루종일 할 수 있는 것이 참 많았다. 편안한 환경에서 많은 경험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러려면 엄마가 부지런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엄마는 어린이집 선생님보다 아이 한 명에게 줄 수 있는 관심과 사랑이 더 많을 수 밖에 없다. 선생님은 적어도 혼자 세 명 이상의 아이를 돌보셔야 하기 때문에.
어린이집을 보낸다는 것은 그저 나의 육아의 수고로움을 덜고, 내 시간을 가지기 위한 것인데, 그러기에는 코로나 상황 등을 고려할 때 굳이 어린이집을 택하고 싶지 않았다. 코로나 때문에 어린이집을 보내고, 내가 바로 사회 생활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이런저런 상황이 여의치 않은데, 조금 편하자고 어린이집에 보내기가 망설여졌다.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아주 여유로운 것도 아니고, 나는 원래 일을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다. 여전히 육아보다 일이 좋다. 하루 빨리 일 하던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 아이랑 함께 한 시간이 긴 만큼 아이를 사랑해서인지 아직도 결단을 내리지는 못하고, 아이의 삶에 끌려가고 있는 중이다. 여튼 코로나 상황에서 주변 도움 없이 아이를 키우는 것이 나를 이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게 만들었다. 그런데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나는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텐데, 코로나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해보니까, 아이를 한 번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에서 키워보니까, 아이가 어릴 때는 함께 해 주는 것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이 길을 걷지 않아본 사람은 진심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다. 아이와 엄마만 알 수 있는. 엄마가 행복해서 아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엄마는 아니었지만, 아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서 행복한 엄마였다.
난 내가 줄 수 있는 것도 많고, 그만큼 아이도 나에게 많은 것을 줬기 때문에 경력 단절의 후폭풍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그냥 육아에 올인할 수 있었다. 이제는 코로나 핑계를 대고 엄마가 키울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보니, 대부분 어린이집에 보내는 분위기이다. 이 와중에도 여전히 엄마가 직접 키우는 쪽을 택하는 엄마들이 있기는 하다. 그분들이 얼마나 외로운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진심으로 응원해주고 싶다. 키워보니까 정말 힘들지만, 세 돌 전후까지는 엄마가 어떻게든 해 내는 것이 결국은 아이에게도 엄마에게도 좋은 것 같다고 말해주고도 싶다. 하지만 정말 힘들다. 두 돌까지 키운 엄마들은 이미 너무 지쳐있고, 한 편으로는 엄마가 키우는 것에 대한 소중함도 이미 잘 알고 있는데, 두 돌에서 세 돌이 또 얼마나 힘든지는 모르는 상태일 것이다. 세 돌 전후까지는 육아가 쉬워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 누적된 육아 피로감도 커져 가는데, 아이와 소통은 점점 더 잘 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부분은 더 늘어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육아라는 것은 들어서 다들 알고는 있지만, 직접 겪어보면 정말 이렇게 마음대로 안 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어찌어찌 그렇게 키우고 나면 점점 더 손이 덜 가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지고, 육아에 대한 노력을 확 줄여도 아이가 알아서 잘 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도 말해주고 싶다. 충분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시간이라고. 우리 경력에서도 중요한 시간이지만. 정신 차리고 사회에 눈을 돌리면 답답함과 먹먹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지만 있다면 뭔가 해볼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하는 세상이라는 생각이다. 나도 지금 슬슬 시동을 거는 중인데, 반드시 사회적으로도 다시 무언가를 해내서 나와 비슷한 길을 택하는 엄마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
어린이집의 장점은 또래 친구들을 계속 볼 수 있다는 것인데, 나도 이 부분에서는 아쉬움도 있다. 우리 아이는 세 돌 전후까지 또래 친구들을 많이 못 봤기 때문이다. 날씨 좋을 때는 공원이나 놀이터에서 매일같이 놀았기 때문에 성장에 지장이 있을 만큼 사람을 못 보고 살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세 돌 전후까지 가족 외의 사람과 매일 지속적으로 관계를 형성해 본 적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어린이집에 보냈었던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세 돌 전후까지의 어린이집 내 교우관계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이기는 했다. 오히려 아이들끼리 장난감 공유 등의 문제로 때리거나 상처를 주는 일들이 생겨서 엄마들끼리 싸움으로 번지기도 하고. 이래저래 불필요한 잡음이 꽤 있었던 듯 했다. 어떤 경우에는 어린이집 친구들과 오래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지만, 아이 주도로 형성되는 교우관계는 세 돌은 지난 아이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관계가 아닐까 싶었다. 상대적으로 정신적으로 천천히 성장하는 남자아이들의 경우는 네 돌은 되어야 유의미한 친구 관계가 형성되는 것 같다.
그리고 유치원을 보내보니, 어린이집을 다녔던 친구와 그렇지 않은 우리 아이와 친구랑 소통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때가 되면 다 알아서 하는 것 같았다. 친구와 대화하는 것도. 친밀감을 쌓는 것도. 오히려 엄마랑 있는 것이 편안한 시기에는 엄마가 함께 해주고, 세 돌 즈음 되어서 분리 불안 없이 엄마랑 헤어질 수 있는 시기가 왔을 때 친구들이랑 지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면 꽤나 많은 부분들이 부드럽게 흘러간다. 등원하는 시간에 전쟁하는 듯한 느낌도 들지 않는다. 우리 아이가 나에게 준 선물일지 모르겠지만, 유치원에 처음부터 웃으면서 갔다. 엄마랑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말한 적은 있지만.
물론 단체생활 부분의 이런저런 소소한 규칙을 지키는 측면에 있어서는 처음에 시간이 좀 걸린다. 갑자기 규칙이 타이트한 기관이나 영어 유치원에 보내면 아이는 해당 기관의 심각한 부적응자가 될 수도 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 중에서 어린이집을 보낼지 말지 고민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을 것이다. 세 돌이 지나서 스스로 어느 정도 친구와 소통하는 것이 가능해졌을 때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좋은 것 같은 생각이다. 그전까지 엄마와 함께 있으면 아이는 정말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다. 나는 아이와 함께 걸어온 길에 매우 만족한다. 정말 잘 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코로나 시기에 아이에게 매우 치우친 의사 결정을 내린 엄마 입장에서 적은 것이니, 어린이집을 보내기 꺼려졌던 결정적인 이유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엄마라면 한 번쯤 읽고 참고만 해보시기를 바란다. 사실 저도 너무 괴롭고 힘들었어요.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세 돌 정도까지 키운다는 것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기 때문에 진짜 독한 마음 먹고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