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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구의 엄마 Aug 10. 2023

어쩌다 나들이

가정보육을 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다


올해 봄, 아이와 내가 많이 피곤했던 어느 날, 진짜 힘들어 보여서 유치원을 하루 쉰 날이 있었다.


3년 넘게 아이와 하루종일 함께 해봤기 때문에 아이랑 하루종일 함께 하는 것이 이제는 아주 많이 힘들지는 않지만, 솔직히 이런 상황이 되면 여전히 쉽지 않다.





그래도 다행히 그날은 날씨가 참 좋았다.

발길 닿는 대로 놀기 참 좋은 날이었다.


사실 그날은 아이가 유치원에 가면 중고 책을 사러 조금 먼 곳까지 지하철을 타고 다녀오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아이랑 같이 중고 책을 사러 갔다. 20권 정도 들고 와야 해서 아이랑 같이 가면 왠지 좀 더 힘들어질 것 같았지만, 약속 변경은 싫어서 아이랑 함께 가기로 했다. 아이에게 "오늘 유치원을 안 가는 대신 엄마랑 한 가지 같이 해 줘야 하는 일이 있어. 지하철을 타고 가야하는데 괜찮지? 엄마가 이미 약속을 한 거라 그래."라고 말했다. 아이는 괜찮다고 했고, 즐겁게 함께 나서주었다.


별다른 계획 없는 날이었는데,

아이랑 참 많은 것을 하고 돌아왔었다.


평범한 일상이 아이에게 좋은 기억이 되었는지 그 이후로 아이는 그곳에 또 가고 싶어 한다.


이 날 문득 '3년 넘게 아이와 붙어 지냈을 때 지독하게 힘들었지만, 매일매일 이렇게 아이와 함께 많은 것들을 했지. 그래서 정말 후회는 없어. 참 소중한 시간들이지. 다시 생각해도 참 잘했다. 가정 보육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정말 힘들지만, 충분히 가치 있다고. 작지만 하나하나 그냥 지나치기 아까운 이런 일상이 가치 있게 생각되면 꼭 시도해 보라고 말해 줘야지.'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어쩌다 좋은 기억으로 남은

중고책 사러 가는 길.


집을 나서서 집에 돌아오기까지

세 시간 반 조금 넘게 걸렸는데,

아이와 나는 이렇게 보냈다.


지하철 타고 신도림까지 가서

엄마아빠가 맨 처음에 어디에서 살았고

같이 수영도 배우고 치킨 먹은 이야기도 해줬고

도림천 징검다리도 건너고

ktx도 보고

운동기구도 한참 하다가

달리기 트랙 주변에서 달리기 시합도 실컷 하고

바닥에 튀어나온 철사 주변에서 한참 개미놀이 하고

언덕 달려서 오르내리기 몇 번 하고

어떤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다가

아이스크림 사서 또 다른 아파트 놀이터를 찾다가

5살 동생 만나서 같이 얼음과자 나눠먹고 놀다가

책 찾은 다음에

바닥에 앉아서 책 두 권 읽고

다시 놀이터 가서 노는데

6살 유치원 친구들 만나서 신나게 놀고

(경찰 놀이, 철봉, 동동동대문 등등)

집에 가는 길에 킨더조이 하나 사고

도림천에 다시 들리자고 해서 또 내려갔고

그늘 아래 벤치에서 킨더조이 먹고

징검다리 다시 건너서 가는 길에

엄청 큰 물고기도 보고

요구르트 아줌마 만나서 거꾸르트 두 개 사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기다리다가

졸려해서 택시 타고 돌아오는데

중고로 산 '멋지다 멸치' 책에 꽂혀서 잠은 달아나고

집에 와서도 계속 잠을 이기고 놀았다.

중간에 엄청 졸려 보였는데 언제나 그렇듯 잠을 이겨내는 아이.


그리고는 게임을 하자고 했다. 예전에는 집에 와서도 또 놀이를 하고, 책을 봤지만 이제는 이렇게 놀고 들어오면 TV, 게임과 함께 한다. 이런 날은 게임 좀 해도 괜찮다.


요약해서 시간 흐름대로 적자면 이렇고

하나하나도 나름대로의 스토리가 있다.


생각보다 알찬 하루였다.


아이는 이 날 친구들이랑 했던 동동동대문 놀이가 재미있어서 유치원에 가면 친구들이랑 해야겠다면서 한참을 이야기했었다. 또 그 유치원 친구들이랑도 놀고 싶다고도 하고. 잠깐 같이 놀았는데, 금방 마음이 열렸나 보다. 아이들은 참 순수하고 이쁘다.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선물 같은 하루가 되었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도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이이다. 의미 없는 주변 사물도 의미 있어지고, 평범한 것들도 아이의 신체적 정신적 성장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그런 느낌도 함께 느낄 수 있다. 아이한테 온전히 집중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가정보육을 하면 매일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 아이와 자연을 벗 삼아 놀 수 있는 날도 많고, 아이들을 위한 공간에 놀러 가서 놀 수도 있고, 집에서 이런저런 아무 놀이를 하면서 보낼 수도 있고, 책을 실컷 읽을 수도 있고, 매일 가던 집 근처 놀이터, 공원에서도 매일 조금씩 다른 발견을 하거나 놀이를 하면서 좋은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아이와 함께한 소중한 순간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는 몇 년의 시간들. 내가 기억력이 유독 좋은 건지 그 기억이 너무 강렬한 것인지 정말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순간들이 많다. 덕분에 온전히 아이를 사랑하는 법을 체득할 수 있었다. 참 소중하고 또 소중한 시간들이다. 오늘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괜히 더 소중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 아이에게 직접 상처를 주는 절대 횟수는 증가하기도 한다. 이것은 가정보육의 어두운 면이라 할 수 있다. 엄마가 아이에게 직접 주는 상처의 횟수가 증가하는 것. 사실 하루종일 혼자 아이를 돌보다시피 하면 엄마도 인간인지라 특정 순간에는 화가 난다. 이를 컨트롤하는 데 도움을 주려고 하는 여러 가지 컨텐츠, 책이 넘쳐나지만, 솔직히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지속적으로 성숙한 엄마,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아이도 성장을 하니까 서로 노력할 뿐이다. 여전히 나는 종종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엄마이지만, 전보다는 확실히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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