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헤어진 가짜 이유
광고 듣고 왔고요. 12.11MHz. 여러분은 어슬렁 라디오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나 오늘 힘들어.” 솔직하게 말하면 어리대요.
“아니야. 괜찮아.” 괜찮은 척 꾹 참으면 어른이래요.
그런 게 어른이면 그냥 저는 어른 안 할게요.
2020년 새 장의 첫 자락. 어떤 하루를 보내셨나요? 당신의 지난 계절이 궁금합니다. 오늘 어슬렁에는 시려진 계절만큼 멜랑콜리한 사연이 도착했어요. 26살 성동구 쌍무지개 님의 사연입니다.
헤어졌어요. 저는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첫 연애는 아니었지만, 제가 다가간 건 처음이었어요. 사실 이전 연애도 짧게 끝나서, 나이만 먹었지 제대로 된 연애라고는 해본 적이 없고, 당연하듯 모든 면에서 서툴렀죠. 누가 물어보면 대충 ‘모태 솔로’라고 말할까 봐요.
제 주변에는 오랜 연애를 하는 사람이 많아요. 십 년을 채워가는 사람도 몇몇 있고요. 저는 연애에 관심 없는 편이라 이렇게 남들 하는 걸 보기나 했지, 제가 한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전역 이후 주변을 보면서 ‘나도 오래 만날 그런 사람과 만나고 싶다.’ 생각했습니다. 남들보다 느린 나이에 처음 든 감정이었죠. 하지만 쉽지 않더라고요. 무슨 이유에서인지 상황적으로 제가 계속 밀어내고 있었어요. 누가 좋아한다고 말하거나 혹여 작은 티라도 내면 벽부터 치고, 소개해 준대도 내키지 않아서 거절하고, 감정적인 관계를 갖다가도 ‘이 사람과 오래 만날 수 있을까?’ 찾아오는 여러 생각에 그 이상의 진전을 막았거든요.
그런 제가 처음으로 다 잊고 만난 사람이 헤어진 전 여자친구입니다. 더없이 짧은 만남이었지만, 저희는 모든 지점에서 잘 맞았어요. 오랜만에 마음을 열고, 처음 느끼는 감정을 알게 해준 사람이라 보이지 않을수록 더 생각나는 사람이죠. 저희는 보통의 연애처럼 연극도 보고, 좋아하는 걸 공유하고, 밤새 서로 가진 이야기를 나누면서, 달과 별을 찾아 소원을 빌러 다녔어요.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대부분의 취향이 비슷했던 터라 순조롭게 잘 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이별이 눈앞에 있더라고요. 커가는 마음 앞에 어떤 마음은 꺼져가고 있었죠.
저희가 헤어진 이유는 예술 쪽 복수전공으로 바빠진 여자친구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많은 과제가 겹치고, 틈만 나면 실기실에, 아르바이트까지 하는 여자친구는 제대로 잠도 못 잘 만큼 피곤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어요. 그래도 저희 관계에는 딱히 문제가 없는 줄 알았어요. 바쁜 여자친구를 위해 제가 최대한 배려하기로 마음먹었거든요. 저를 조금이라도 덜 신경 쓰도록 하는 거였죠. 손 모델 아르바이트도 시작하고, 내외하던 학업에도 전념하는 척하고, 굳이 여러 약속을 막 잡기 시작했어요. 나는 다른 일정으로 시간을 잘 보내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말고, 미안해하지도 말고, 너의 일에 집중했으면 좋겠어! 그런 마음이었죠. 심지어 해가 지고 난 직후면 일부러 일찍 잠드는 날도 있었다니까요.
얼마 뒤 평소처럼 자정을 22분가량 넘기고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자취방으로 걸어가는 여자친구와 통화했습니다. 별다른 점은 없었어요. 그런데 30분 정도가 지나서였나, 오피스텔 정문에 도착한 여자친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하더라고요.
“요즘 너무 바쁜 것 같아. 정신도 없고. 이제 2년 동안 졸전(졸업 전시)도 해야 하는데 이런 상황에 내가 연애할 수 있을까?”
고작 몇 마디에 복잡한 심경과 며칠간 이어졌을 고민의 무게가 느껴졌어요. 사소한 말 하나도 쉽게 꺼낼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어떠한 대꾸를 얹기보다는 마침 내일 보기로 해서 오늘은 아르바이트하느라 피곤할 거니까 일단 잘 자고 내일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습니다.
맞아요. 침착한 척이었죠. 갑작스러운 말에 저는 당황했고, 엄청난 불안에 부딪혀 혼란스러웠어요. 어쩔 줄 몰랐죠. 메시지라도 남길까, 지금 만나서 얘기하는 게 좋을까. 아니야 피곤할 텐데 그건 안되지. 짧다면 짧은 새벽 동안 저는 지난 시간에 대한 수많은 자책과 후회를 반복했고, 늦은 시간이었던 만큼 누구에게 물어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어떻게 하면 내일 조금이나마 피로를 풀어줄 수 있을까?’라는 초점에서 다소 벗어난 생각뿐이었죠. 당장 필요한 게 뭔 줄도 모르고 말이에요. 그렇게 와중에 안마의자가 있는 힐링 카페를 예약하고, 여자친구가 좋아하는 피자집을 찾고, 피로를 덜어 줄 비타민을 챙겼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예전에 받고 싶어 했지만, 아직 써주지 못한 장문의 손 편지도 썼죠.
생각해 보면 그때 급하게 써 내린 주절주절한 편지와 행동은 여러모로 별로였어요. 달라지는 건 없었거든요. 다음날 얼굴을 봐도 혼란은 그대로였고, 이별을 통보받은 게 처음이라 그런지, 이게 이별 예고는 맞는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특히나 안마의자에 앉자마자 잠들어서 끝나고도 한 시간 반가량 꿈속에 빠진 녹초 같은 모습을 볼 땐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한편으로는 얼마나 피곤하면 고통의 안마의자 위에서 저렇게 잘 자나 신기하기도 했고요. 저희에게 몇 시간 남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죠. 어떻게 이런 애를 잡아요. 저는 더욱 모든 걸 참을 수밖에 없었고,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어요.
어쩌면 저희는 잦은 대화에도 마음속 이야기는 숨겨두기만 한 거 같네요. 어떤 일이 있었느냐고 매일같이 물으면서도, 어떤 생각과 감정으로 하루를 메꾸어가는지는 전혀 몰랐어요. 한순간도 거짓되지 않은 줄 알았는데, 사실 솔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날 뭐라도 물어봤다면 이렇게까지 후회하지는 않았을까요. 그때 전해 들은 상황적인 이야기들이 저희가 헤어져야 했던 진짜 이유가 맞을까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뭐가 문제였는지. 이별은 원래 이렇게 아픈 건지. 오늘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 의문이 풀리길 바라는 소원뿐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