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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독 Oct 16. 2023

거봐 사람은 고쳐쓰는 거 아니랬지

어떻게 사람이 변하니?

   헤어지라고 말했다. 군대에서 간혹 “여자친구랑 헤어질까?” 물어보는 애들이 있었는데, 그중 단 한 명도 헤어진 사람은 없었다. 그런 질문을 꺼낸다는 자체가 ‘이미 마음이 떠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여전히 그들이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에 이별을 쉽사리 결정하지 못했던 이유는 직접 느껴보고야 추측되었다.     

   생각할 시간 후에 다시 만나서 얘기하자는 상투적인 결말은 완전한 헤어짐의 약속은 아니었지만, 거리 두려는 노력이 현저해 불편하고 서먹했던 마지막 데이트에 우리는 사실상 헤어졌다. 처음으로 멀찍이 떨어진 두 손길. 눈도 한번 마주치지 않는 소원을 마지막으로 안아주고 싶었지만, 같은 극에서는 그조차 할 수가 없었다. 학교 앞 도시 숲길, 덜 빠진 젖살을 할퀴는 나직한 저녁 바람. 까마득해져 가는 소원의 7016 초록빛 버스를 여의고는 반나절 가까이 그곳을 감돌았다. 그날따라 버스 창밖에 달은 흐릿한 구름에 가려졌음에도 훤히 비추었는데, 흡사 샐 구멍을 찾아 헤매는 마음과 같았다. 그런 처연한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쓸쓸히 귀가하였다. 주머니 속 걸리적대는 영수증 하나만 잃어버려도 당황해서 어떻게든 찾으려는 나인데. 분명 무언가 크게 잃어버린 기분은 확실했지만, 실감이 안 나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슬프다는 사실은 친구 잎새가 우리 집 현관문을 여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민망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눈물이 터졌고, 절대 안기고 싶지 않은 남정네 품에 부둥켜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다음은 영민 형이었다). 동시에 “우리가 깊게 오래 만난 사이는 아니니까…”라고 말하던 소원이 떠올랐다. 이게 뭐라고 스물한 살 이후 멈춘 눈물샘이 이토록 열심인 건지. 그런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잣눈이 허옇게 쌓인 소나무들이 흐드러진 동네 공원 벤치에 앉아 오늘 있었던 일을 잎새에게 털어놨다. 언제나 괜찮다고 말하던 내가 연속된 그의 물음에 처음 아픔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그마저 서툴러서 시시콜콜한 마음까지는 털어내지 못했고, 금세 싱거운 농담으로 무마해 버리고는 했다. 오늘 간 피자집이 알고 보니 뷔페여서 처음 만난 날보다 한층 더 어색했다는 것부터 소원에게 보드게임 <다빈치 코드>를 4연속 완패한 것까지. 울음보에 성공한 이런 기념비적인 날에 진짜 저런 걸 했냐고 묻는다면 실화다. 한 마디라도 더 나누었어야 했는데, 회피하는 게 썩 보여서 몰려오는 궁금증에도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그저 모르겠다는 채로 흐트러진 온도를 어리숙하게 터벅거렸다. 그게 마지막일 줄, 이렇게 후회할 줄은 더더욱 몰랐으니까 말이다. 슬퍼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소원의 진심은 듣지 못해 여태껏 알 수가 없지만, 겉모습은 낯선 냉정함으로 가득했으니까. 나만 힘든가. 혼자만 과도한 반응을 뿜는 걸까. 말대로 우리는 오래 만난 깊은 인연도 아닌 어쩌다 스친 우연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때 잎새가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왜 눈물이 나는 거 같아? 슬퍼서? 힘들어서?”

   아까 이해되지 않음에서 끝맺었던 이 단순하고 쉬운 질문에 한참을 뜸 들이고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왜 슬픈 거 같아?”

   질문에 또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솔직히 내가 힘든 와중에 위로 한마디 없이 건조한 질문만 자꾸 던져대는 잎새가 조금 밉기는 했지만, 이유가 있겠지. 이유가 있겠지. 또다시 망설였다. 아마 내가 답할 수 없었던 건 정말 내 감정을 몰라서가 아니었을까. 그때 잎새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나에게 ‘자기 객관화’라는 단어를 내던졌다. 이후 여느 계발 서적이 알려주는 답안대로 정신을 돌리기 위한 헬스를 시작하였고, 바깥 약속을 끊으니 쓰디쓴 술도 마실 일이 굳이 없었다. 항상 바삐 돌아다니던 내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시선을 맞추어 말을 걸었고, 인사를 했고, 안부를 물었다. 줄곧 타인의 안부만 실속 없이 확인해오던 내가 오랜 감정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지면서 정작 스스로에게는 불친절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꼭 말해주고 싶은 게 있었는데, 지금 해줄 수 있을 것 같아.”

   사실 잎새는 모 관광기업의 서포터즈 협찬으로 함께 떠나기로 한 크루즈 여행에서 말해줄 계획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유효기간이 훌쩍 넘어버린 잎새의 단수 여권으로 3개국 해상 여행은 나 혼자 일주일간 떠났고, 몇 달이 지나고서야 듣게 된 것이다. 만약 그때 들었더라면 우리의 결말은 달라졌을까. 처음 듣는 잎새 이야기에는 나의 말에 함부로 담을 수 없는 그만의 삶이 묻어있었고, 덤덤히 말하는 모습에 마치 어른 같다고 생각했다. 나와 정반대 삶을 살아왔고, 곁에 나를 친구로 두고 싶었던 이유도 낱낱이 들려주었다.

   이내 잎새는 확신에 찬 입꼬리를 찬찬히 드높였다. 얼마 전부터 사람들 정신건강을 돕기 위한 사업을 구상 중이라고도 밝혔다. 근로장학생으로 대학에서 심리상담 비슷한 걸 다니는 듯했는데, 이때 얻은 깨달음을 알려주면서 겸사겸사 사업 데이터를 쌓으려는 듯 보였다. 아무리 가까워도 나는 사람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당장은 주저했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속이고 농락하는 것만 아니면 됐다. 그렇게 그간 힘들었던 이유를 살피고, 덜 아프고 싶은 마음에 약간의 경계만 남긴 채 잎새의 제안을 수락했다. 이게 소원이 이루어져 가는 방향일 거라고는 시시한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의문이었다. 흔히 듣던 말 중에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 사람은 변할 수 없는 걸까? 만약 변할 수 없다면 객관화도 굳이 할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의심쩍다는 나의 물음에 잎새는 각성 상태일 때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객관화를 시작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할 수 있다고 자신을 온전히 믿어줄 것. 인간은 현상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있어서 어떤 변화든 두려워하며, 자발적인 것만이 바른 힘을 가진다. 불안정하다가도 그런 마음가짐이 지지가 되어 내면에 안정을 남기고, 꾸준히 나아갈 의지의 발판이 되어준다.

   둘째, 말을 모양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의미에 담긴 본질을 알아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학습된 의미를 완전한 정답이라 착각하고는 한다. 그곳에 담긴 현상이 무엇인지, 숨겨진 것을 찾는 법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괜찮아’라는 말도 말투, 뉘앙스, 상황에 따라 전부 다른 의미가 되고, 각각 다른 말을 뱉는 책들이 알고 보면 같은 메시지를 던지는 것처럼. 또 누군가에게는 언제나 괜찮아 보였던 우리처럼 겉모습만으로는 무엇도 판단할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모든 대상은 관성을 가지고, 인간은 익숙함이 당연함이라는 속임수에 적응하여 살아간다. 의식의 반복이 자신조차 모르는 사이 무의식을 형성하여 믿도록 만든다. 하지만 어떤 사건이나 깨달음으로 인해 각성이 찾아오면 이전 관성을 깰 정도의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 이게 내가 알게 된 사람이 각성 상태일 때 변할 수 있다는 의미에 담긴 본질이었다. 게다가 세상은 예상외로 다양한 모습으로 둔갑한 힌트들을 곳곳에 이미 숨겨두었달까.   

  

   여하튼 사람은 변할 수 있다. 다만 그 방법을 알기가, 결심과 과정이 쉽지 않을 뿐이다. 그 이유로 나에게는 비슷한 과정을 겪은 사람의 뒷이야기가 필요했다. 오래도록 일렁여온 막연함을 실체적인 움직임으로 돌아 세워 줄 누군가의 인생 비하인드. 하지만 허구를 제외하고는 찾지 못했고, 오히려 존재하지 않을 만하다는 확신에 들어섰다. 요즈음 만난 사람들은 태초부터 내가 이랬을 거라고 간주하는데, 굳이 고되었던 지난날을 만천하에 알릴 필요는 없는 거니까. 누가 자신의 약점이 빼곡한 일기장을 세상에 내놓고 싶을까? 왜 나는 그 의문이 짙어진 외로움을 벗어낼 기회라고 여겨지는 걸까. 왠지 나라도 그런 영화를 내놓아야 할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주인공의 삶을 희생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해피엔딩을 맞이한 주인공이 기쁨으로 전하는 이 고백 글이 자신만의 최종적인 행복을 꿈꾸는 누군가에게 작은 선물이 되길 바랄 뿐이다.

   한 사람의 말과 단어 선택, 아니 모든 행위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묻어난다. 비록 다른 점들이 모여 다른 모양을 만들어왔대도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비슷한 삶의 궤도를 지나왔다. 바로 옆 선상에서 더불어 공간을 이루고, 나란한 시간을 채워가기도 했다. 심지어 근래에는 그런 살아감을 공유하고 포장하고 본보기로 삼다가 획일화된 개성을 이루어가기도 한다. 그러니 다른 듯 닮아있는 하나의 삶을 통해 누군가도 자기만의 묻어남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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