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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독 Oct 20. 2023

제발 이런 사람과 사랑하세요

이상한 이상형

   2019년 제주, 다음날 일출을 보기 위해 우리는 애월 바다를 뒤로한 채 숙소로 돌아왔고, 방에서 마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축제 봉사에서 알게 된 동생 유진에게 연락이 왔는데, 뜬금없이 우리는 서로 소개팅을 시켜주기로 했다. 육지로 돌아와서 처음 소개받은 사람이 동명이인. 그다음은 헤어진 지 4개월이 지나서였나. 무작정 밀어내던 과거와 상반되게 일단 나가보기로 했고, 일 년간 세 번의 소개팅에 다녀왔다. 잘된 유진과 달리 나는 전부 실패로 매듭지었으나, 그 과정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성공적인 만남이었다. 우리가 사랑이라 말하는 것들은 단순한 충동을 넘어 연쇄적인 파동이라는 이치를 기억해야만 한다.     


   첫 번째 소개팅. 객관화하기로 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여서 그랬던 걸까. 모든 사고회로는 심리학으로 돌아갔고, 이 만남은 줄곧 J에게 놀라움만 선사하다가 끝마쳤다. 나를 어떻게 보는지 걱정만 가득했던 예전과 달리 상대가 무엇을 지니고 있는지 관찰하는 게 주된 시선이었고, 은근한 대화에 비추어 J를 여러 번 맞혔다.

   “왠지 애니메이션 좋아하실 거 같은데… 지브리 같은 거?”

   나 뭐지? 왜 다 맞지? J는 자꾸만 나를 칭찬해 주었는데, 알고 보니 항공과였다.

   “우와! 진짜요?”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어요?”

   역시 서비스직. 묻어난다는 게 이런 거구나.   

  

   두 번째 소개팅은 이전에 사진으로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I와 나는 성격이 매우 비슷했고, 묻어남 하나하나에 이전의 내가 보여서였는지 어느새 I를 동일시하였다. 그래서 그동안 알게 된 것들을 최대한 알려주고 싶었는데, 열심히 떠들다 보니 그 자리에서 우리는 암묵적으로 친구가 되었다. 다행히 I도 말하기를 좋아해서 일방적 강의는 아니었다! 이후 눈에 띄게 변하지는 않았지만, I는 자기 이유를 찾으면서 의문스러운 불안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들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따금 불쑥 전화를 울린다.

   “사람은 변해?”

   “너 남자친구랑 시간 갖고 싶구나.”

   “어………….”

   어쩌다 상담 식구 한 명 확보. 이쯤 되면 친구 사귀러 나가는 게 분명하다. 위 질문에 나의 답은 이러했다. 한 사람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매듭짓는 순간 미지의 공간이 창출된다고. 누구나 환경에 따라 계속해서 변해갈 테니, 변함없이 사랑한다면 이전 데이터에 속기보다 각자 속도에 맞춰 방식도 바꾸어야 한다고. 얼마든 기다려 주겠지만, 작은 움직임이라도 멈추는 순간 끝나는 관계임은 어쩔 수 없었다. 변치 않는 마음이 아니라 변하는 마음 따라 함께 변해갈 뿐이었다. 아마 사랑은 통찰을 키워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작년에 유진은 대학 동기 중 내가 좋아할 만한 친구가 있지만, 일 년간 휴학하고 고향 부산에 내려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객관화가 어느 정도 되었다고 스스로 착각할 즘 유진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때 말했던 동기 소개받을래?”

   다만 타이밍이 왜 이리 애석한지. 최근 나에게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고, 정신은 온통 배신감과 회의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미안. 지금은 만날 상태가 아닌 거 같은데…”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번 주 일정이 여유롭다는 말에 괜히 후회할까 봐 만나보겠다고 했다. 지현의 첫인상은 어지간히 동안이었다. 그래서 이성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힘든 와중이라 그런지 야금야금 챙겨주면서 생각보다 큰 의지를 했다.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언어를 좋아하며,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어느 때보다 성심껏 관찰했다. 분명 지금의 나는 상대에게 필요한 걸 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여의도 한강길을 따라 무념했던 자전거를 타면서 적당한 물음과 속마음을 나누고, 도심 드라이브로 바람도 쐬고, 끼니를 못 챙겼을 때는 간단한 도시락도 싸다 주었다. 단, 이 모든 게 지현을 위한 게 아니었음은 만남이 끝나고서야 알 수 있었다. 뭔가 자꾸 잃는 것 같았던 힘겨운 시기에 감정 회피가 필요했고, 소원에게 해주지 못했던 걸 무의식에 만회하려고 했었다. 이것마저 이성적인 척 감정에 매몰된 행동이었다. 지현은 고맙다고 했다. 그만큼 시선 밖에서는 미안함도 키워갔을 거다. 미안함은 곧 부담의 씨앗인데, 사람마다 가진 속도가 다르다는 걸 모르고 혼자서 무작정 달렸다. 선택들 하나하나가 예전과 달라진 건 분명했지만, 여전한 서투름으로 받아들일 상대 감정까지는 헤아리지 못했다. 마음대로 채워주면서 받을 틈은 주지도 않는. 여지없이 일방적이고 뻔뻔한 관계였다.     

   사랑에는 수많은 방식이 있겠지만, 내가 알게 된 최상의 방법은 물음표다. 보이는 것 그 이상을 궁금해하는 것. 아니 마음을 꺼내도 될만한 대상이 되는 것. 듣는 건 다음이었다. 영상을 만들 때도 피사체를 사랑해야 보는 이에게 그것이 묻어났다. 언제나 플러스알파는 애정이었다. 묻어남에 비추어 자신을 알아갔던 것처럼 타인을 사랑할 때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들의 과거에 할 수 있는 건 추측뿐이니 오히려 더 많은 의문과 대화가 필요했달까. 이해하려는 노력이 동반된 대화에서 각각의 존재는 이어졌고, 그때의 나는 딱 거기까지만 할 줄 알았다. 충분한 물음은 던질 줄 알았으나 자기감정까지는 돌보기에 미숙한 상태. 재차 나는 결핍을 마주했고, 그의 감정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뻔하디뻔한 나를 사랑해야 남도 사랑할 수 있다는 얘기. 나와의 사랑이 넘치고서야 그 여유와 넘침으로 타인을 감쌀 수 있었다. 내게 열린 시야만큼 보이지 않는 그의 시간을 물을 수 있었으며, 완벽하지는 않아도 이해의 퍼즐을 맞춰갈 수 있었다. 그렇게 몇 차례 계절이 흘러 청명한 시야가 펼쳐졌을 땐 여느 것보다 우리가 사랑을 좇는 이유까지 스며들었다. 무언가 충족되고 있는 듯한. 들뜨기보다는 낯설고 불편한 감정이었다.


   돌아보면 우리의 결핍은 대개 사랑의 부재로부터 출발했다. 태어나기 직전이 가장 완전했었다는 괴담 같은 속설에 결핍을 채워가기 위한 여정도 떠나왔다. 생물학적으로는 완전한 유전자를 물려주기 위해서, 심리학적으로는 완전했던 과거로 회귀하려는 본능일지도 모르지만, 그 빈칸을 함께 채워갈 대상을 찾고 있었다는 게 이론의 핵심이었다. 불완전한 우리를 조금이라도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게 사랑이라서. 그런 사랑이라 특별한 거 아닐까. 여름이 시원함으로 완성되고, 겨울이 따뜻함으로 완성되듯. 나라는 존재를 일렁이게 하는 이상한 무언가로부터. 닮은 듯 다른 서로의 흉터를 각각 어루만져 완전해 보이는 하나를 이루는 것. 그게 사랑이었다.

   의존적 대상이 그랬다. 사랑하는 모든 관계는 채우고 있었고, 직관은 진작 알아챘다. 이 사람이 나의 결핍을 충족해 줄 수 있겠구나. 오래 풀리지 않던 의문 위로 해답을 내밀 듯 누군가에게 매력을 느꼈던 순간들도 묘하게 닮아있었다. 눈에 보이는 사랑이라면 이런 걸까. 내게 유독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다. 그의 비하인드 객석에 앉기 전까지는 무엇도 섣부른 판단에 불과하겠지만, 어떠한 순간만큼은 온 세상을 가진 듯한 표정의 존재에게 매력을 느꼈다. 나는 오늘은 어떻게 보냈느냐 물었고, 유심히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동그랗고 반짝이는 눈매와 씩 올라간 입꼬리로 해맑게 자신을 들려주었다. 사소한 재잘거림이 귀까지 걸린 해맑음과 의미로 넘치면서 내일의 얘기까지 기대하게 했다. 이 사람에게는 나의 이야기를 꺼내도 되겠구나. 어느새 충족되고 있는 그와의 계절을 사랑하였다. 반면에 그는 나를 되물으며 더욱 큰 행복감을 느꼈고, 그런 시간의 연속은 정적이 흐르는 찰나에도 연결돼 서로답게 닿아있는 사이로 만들었다. 설렘과 익숙함이 공존하는 어디쯤이었다.

   찰나에 충실한 존재는 맑고, 그런 면에서 요즘 지나가는 동물들 표정에 제일 큰 행복을 느낀다. 개도 진짜 이상하다. 나는 그들을 “걔 진짜 이상한 거 같아!”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그 모습마저 잃은 줄 알았던 나의 조각이었다니! 사람들이 평면적이라고 의미 짓던 나는 이미 그런 사람이었고, 미소 띤 내 얼굴이 괜히 어색하여 진심 가득한 웃음을 흠모하였다. 그런 내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까 불안함에 사무쳤다. 뽑기 한판에 세상을 가졌고, 점심 종만 기다리다 재빠르게 교실을 뛰쳐나가던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자신을 드러내는 선한 표정에 기분이 좋았던 이유는 단지 그 순간만큼은 그에게서 흐놀던 이전의 내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애틋하고 아팠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한때 조각 모음이 나의 기쁨이었다.    


   서로의 결핍을 충족해 주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아갈 최상의 시나리오이자 모든 관계의 기준일 수도 있겠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고, 세상에는 기껏 서로에게 좋은 사람뿐이었다. 꽃에 매일 예쁜 말을 해주는 게 사랑일지. 완벽하게 이해하는 게 사랑일지. 진실은 그 꽃만이 안다. 그마다 개화 시기와 필요한 양분까지도 달랐다. 사랑의 모양은 수없이 피어난 꽃만큼이나 다양했고, 당신과 나에게 필요했던 사랑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누군가 잘 사랑하는 법을 묻는다면 우선 그를 빤히 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무엇에 응하는지가 보인다. 자신을 사랑할 때는 좋은 면에 집중해야 했고, 그를 사랑할 때는 약점에 큼지막한 힌트가 있었다. 당신의 이상은 무엇일까. 결핍 다발이 다채로이 어우러질 때 우리는 무이한 사랑이 되었다. 이제 사랑하는 이들에게 함부로 참견하지 못한다. 내 시선에 별로인 사람이 나는 해주지 못한 당신의 결핍을 충족해 줄지 모르니까. 채워주는 행위가 즐겁고, 그런 자신마저 좋아하게 만드는 대상이 진심이라면 당신만 좋으면 된다. 이왕 그게 나라면 좋겠지만. 비 소식 있는 날, 가방 한구석에 자리한 우산처럼 존재만으로 안정이 되어줄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우리는 정의하려고 한다. 내가 나인 것처럼, 사랑은 사랑인데. 그게 무엇인지 정의하려고 한다. 여러 원자가 모여 당신을 이룬 것처럼. 그 닮은 감정들을 모아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뿐인데. 우리는 각자의 사랑법만을 정의할 수 있었고, 그래도 누가 묻는다면 채워주고 싶은 충동이 느껴질 때 그걸 사랑이라 부르기로 했다. 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이상이 채워진 듯한 느낌. 나를 사랑하는 또 다른 방식. 나와 서로를 채워 줄 당신은 누구이며, 어느 우연에 있을까. 삐끗하여 머무르는 이 찰나마저 그곳으로 가는 여정일지도 모르니, 왠지 오늘도 잘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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