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의 첫 경험
어떠한 관계를 유지해도 괜찮을지 의심이 들 땐 그 존재를 떠올려 보기로 했다. 무슨 단어가 떠오르는지. 그곳에 담긴 에너지는 어떠한지. 긍정적이라면 만나도 좋을 시기였고, 부정이 과반이라면 적어도 쉬어가야 할 관계였다. 의미 쌓인 이성이 합리화하기 전 날것의 묻어남. 단순하게 그 언어가 그들에게서 비친 나의 의미였다.
어쩌면 관찰자를 좇던 나에게 불가피한 변화는 누군가를 객석에서 방출시키는 일이었다. 옛날에는 나를 함부로 대해도 “좋아서 그러는 거지.” 한마디에 사그라들었고, 신경 쓰여도 내가 예민한 걸까 억눌러냈다. ‘이수민이 싫다고 할 정도면 정말 별로인 사람.’ 같은 논리가 상실된 명제도 충분히 돌 만했다. 여전히 사람을 잘 싫어하지 않는다. 딱히 밉지도 않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의심이 아닌 규칙에 따른 조처를 한다. 누구나 입장할 수 있지만, 웬만해서는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다음 장면과 객석에서 과감히 삭제되기도 한다. 객석에 방문한 그들의 묻어남은 어떠한지. 어떠한 태도로 영화를 관람 중인지. 하나둘씩 마주하면서 나만의 기준을 만들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라 해도 내게는 아닐 수 있다는 걸 알았고, 혼자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에 불과했다. 모든 걸 사랑하기보다는 함부로 미워하지 않겠다는 마음. 기왕이면 그 에너지, 나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소비할 뿐이다. 이 영화는 내 비중이 백 퍼센트인, 선택에 따른 책임마저 모두 내 것인 내 영화니까. 타의로 주저하기보다 우리만의 장면을 그려가면서 관객들과 무엇을 어떻게 즐길지에만 몰두한다.
이런 영화에 특별 출연해 주었던 ‘자만’과 ‘붕어’를 소개한다.
자만은 안하무인(眼下無人)이다.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아는 사람이 있다. 한때 같은 계열에서 일하는 자만의 부탁으로 나의 연기 선생님을 소개해 준 적이 있었다. 내 수업이 끝나도 연습실에 아무도 오지 않아 의문이었던 어느 날, 다음 수업이 자만이었다.
“형, 왜 아무도 안 와요?”
“몰라. 전화해 봐야지.”
늦을까 봐 항시 30분은 여유를 두는 나라서 이해할 수 없었다. 의외로 형의 반응은 덤덤했다. 첫 수업부터 그랬고, 그다음에는 연락 불통, 어떤 날은 갑자기 연락 두절 되거나 직전에 핑계를 대며 수업을 취소했다고 한다. 이미 형은 연습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뭐지? 그렇게 참고 참다가 딱 한 번 자만에게 부탁한 적이 있었다.
“형한테 사과라도 해줄 수 있어?”
그런데 어째서인지 부탁이 뚱딴지 하게 바뀌어서 도착했다.
“수민 오빠. 원래 이래요?”
어떤 삶을 살아온 건지 내 데이터로는 분석조차 할 수 없었다. 평소에 무조건 괜찮다고 말하는 형이 기겁할 정도면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하고 다닌 걸까. 자기랑 수준이 안 맞는다면서 백날 주변을 은근히 무시하고, 평가하고, 본인 연기 못하는 것까지 형에게 소리쳤다. 새삼 사람은 단어 하나에도 묻어난다는 걸 실감했다.
붕어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다. 탓하기 바쁜 그의 행동은 어디서 온 생존법일까. 이쯤 되면 기억을 잃은 건 아닐지 걱정될 지경이다. 나는 진로가 고민이라는 붕어의 토로에 필요하면 도와줄 수 있으니 생각해 보라고 했고, 도움을 요청받아 상담해 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 급발진한 붕어는 인신공격하며 주체 못 할 화를 냈다.
“도와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왜 난리야?”
이전이었다면 기억을 의심했을 거고, 억울함에 화도 났을 거다. 하지만 자신을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앞뒤 안 맞는 그의 행동에 도리어 호기심이 생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담스러울 만큼 휘황찬란한 감사 인사를 분출하며 뭐라도 보답하고 싶다던 붕어였다.
“그러면 네가 저번에 말한 피아노 알려줄래?”
마침 연기 특기를 위해 악기를 다시 다뤄볼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어쩐 일인지 나의 제안에 붕어가 더 열정적인 모습을 띠었다.
“그럼 주 4회는 배워야 해!”
“그건 좀 미안한데, 주 1회만 할게. 얼마에 배울 수 있어?”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그냥 해줄게. 대신 열심히 해!”
심지어 붕어는 거절하지 말라면서 자신과 똑같은 피아노를 사주겠다고 선포했다. 겨우 두 번 본 사람에게 어떻게 67만 원짜리 피아노를 받을까. 끊임없는 강요에 다섯 번이나 거절하면서 간신히 붕어를 말렸다. 집 주소를 자꾸만 캐물어서 그가 알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도 쓸어내렸다. 결국 우리는 매주 토요일마다 수업하기로 했는데… 붕어는 약속 당일에 취소했고, 미루고, 계속 미루다가 갑자기 안 된다면서 통보했다. 열흘쯤 지나 내가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언제부터 가능할까?”
“내가 도와주는 건데 왜 나한테 뭐라 해?”
“…나도 알아야 시간을 맞추지 않을까?”
역시 책임은 돈과 비례하는지. 피아노라도 받았으면 어땠을지. 오랜만에 친구 장훈을 만났을 때는 익숙한 얘기가 들려왔다. 소재만 다르고 등장인물과 구성, 결말까지 똑같은 기이한 이야기였다.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사람 관계를 양자역학에 빗대어 설명할 때가 있다. 우리는 관찰과 동시에 존재하는 전자고, 전자들은 핵을 중심으로 수많은 띠를 이룬다. 또 같은 에너지 준위를 가진 전자는 같은 띠에 존재한다. 그러면 우리도 같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끼리 모이지 않을까? 하는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아우라가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우울감으로 가득한 사람이 있다. 그만의 분위기. 그게 한 사람이 가진 에너지 아닐까. 부정은 덜고, 긍정은 채우고. 그럼 나와 띠를 이루는 존재들은 좋은 에너지를 가졌지 않을까? 누군가를 바꾸려고 애쓰기보다 기존 회로에서 벗어난 환경적인 변화로 좋은 에너지를 채우는 게 스스로 사랑하는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반대로 자존이 미미한 이들은 자기보다 좋지 않은 에너지를 곁에 두어 비교 우위에 서기도 한다.
나의 객석에는 ‘사랑하려는 마음이 있는가?’ 정도의 가볍고 엄중한 규칙이 정해졌다. 사랑은 주관적이라 꽤 유연한 기준이지만, 자기 세상만 고집한다는 건 사랑이 아니었음이 명백했다. 바라보는 대상을 향한 물음과 유연은 빠진 채, 자기 이유에만 빠져있는 태도에는 최소한의 존중이 없었고, 인정도 없었다.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내가 그들까지 사랑할 필요가 있을까. 이해와 인정은 개별의 문제였다. 어떤 묻어남으로 어떤 의도였는지 안다는 게 받아들일 근거가 될 수는 없었고, 조건 없는 받아들임은 자기 존중의 박탈이었다. 자신은 이해받으려고 하면서, 상대의 언어가 궁금하지는 않은. 그의 상황을 들었다면 차분히 나의 감정을 꺼내어 본다. 우리의 다름에 어떠한 반응을 하는지 살피기 위해서. 아니나 다를까 절연으로 이어진 대부분은 숨김없어진 나를 잽싸게 부정했다. 서로에게 알맞은 거리를 조율해 낼 틈도 주지 않았다. 그만의 싸움이었다. 배반한 약속과 뒤늦은 사과들. 나의 죄목은 진심이었던가. 기분 상해죄였던가. 사정과 변명의 타당성은 느슨함을 주어도 피해자의 연락 직전까지만 유효했다. 시간 없다는 말이 어딨나. 중요도가 없는 거지. 안 지킬 약속이라면 안 하는 게 낫지 않나 싶었다. 어차피 나서지 않으면 자연히 끊길 관계들. 쏟아낸 중요도가 무안해지는 횟수가 늘어날 때는 그만의 길로 아주 잘 보내준다.
어떤 대화에도 승자와 패자는 없다. 관계와 흐름만 존재한다. 굳이 따지자면 어떠한 감정을 가져가느냐. 사랑하는 자가 이기는 게임이었다. 약속, 즉 서로의 의미를 기준 삼아 만들어 가는 둘만의 나란한 법. 이를 어겼을 때 처분이 없었던 게 오류였고, 버림받을까 불안함에 항상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내 그들의 무례함은 당연하게 돌아왔다. 왜 나한테도 결정권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무응답을 싫어해서, 변화를 기대해서 무슨 말이든 이어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해하는 그들에게 따로 해명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조차 두려웠지만, 이제는 고맙달까. 덕분에 얻은 경험치로 서로에게 노력하고자 하는 사람을 찾아 서로 가진 언어의 힘과 신뢰를 키워간다. 완전한 경계를 나눌 수는 없지만 간단하게나마 나라는 원칙을 만들어 가는 중이다. 오는 상처를 그대로 흡수하지 않게, 그들이 던진 돌을 주워 담아 문 달린 자그마한 벽을 세울 건축 기술 정도는 터득했달까. 오래 알았던 사이라 해서 이어갈 이유는 없었고, 짧은 기간이라고 얕다고 판단할 수는 없었다.
단지 중요한 건 서로를 궁금해하는가. 나와 잘 사랑하고픈 사람만 곁에 두기로 했다. 어떠한 태도도 한순간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고, 그건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포함이었다. 객석 분위기는 오롯이 영화가 주도할 테니 잘 흘러가는 영화를 해칠 이유도 없었다. 애정 어린 관심을 보내주는 나의 관객들을 위해서라도 좋은 에너지로 듬뿍 채워 계속해서 보고픈 그런 영화만을 상영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