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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독 Oct 20. 2023

정신과 의사도 정신과에 다닙니다

정신병을 안고 있어요

   앓는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잠깐 맞지 않는 조각을 안고 있다가 놓아줄 뿐이다. 자신을 알아가는 게 때로는 스스로 망가뜨리는 거 같았다. 배운 대로 나와 사랑하기 위한 오랜 밤을 보내왔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희미했던 우울까지 날로 깊어져 옥죄듯 자신을 괴롭혔다. 구체적인 감정은 아니었으나 느닷없이 그랬다. 강해지기로 한 사람은 아직 강하지 않으며, 사랑하기로 한 사람은 아직 사랑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그런 것처럼 행동했다.     


   “왜 슬픈 거 같아?” 해당 의문으로부터 일 년쯤 지났을 때였다. 조금 떨어져서 보니 새로운 표정이 보였고, 낯익은 듯 낯선 감정들을 되돌아보며 내가 누구인지 깨닫고는 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퇴근길 버스 안에서 하염없이 우는 자신을 발견했다. 각각의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 길가에 모든 브레이크등은 나를 향해 붉은빛을 쏘았다. 여러 소음이 주변을 감싸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혼자, 혼자, 혼자. 혼자만이 존재했다. 평소와 다를 게 없는 하루인데, 무언가 자꾸 괴롭히는 게 느껴졌고, 민망함에 휩싸이다가도 누군가 알아줬으면 하는 막연한 감정에 에워싸였다. 그렇게 나아질 거라면서 전처럼 자신을 달래다가도 오늘은 어디라도 내 상태를 알려야 할 것만 같았다. 해맑은 그들을 보면서 나의 기대가 지켜지길 바라는 욕심을 부리고는 한다. 주변에서 나를 별생각 없이 들어주는 사람으로 여겨왔던 만큼 와중에 그런 시선을 의식하느라 재차 아픔을 숨길 뻔했다. 망설이다 나는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친구 S에게 급히 메시지를 남겼다.

   “혹시 통화돼?”

   누군가에게 상태를 알리는 게 처음이라 그랬던 걸까. 전에 잎새의 물음을 웃음으로 무마했던 것처럼 무슨 일 있냐는 그의 걱정에 울컥하였지만, 괜히 창피하여 실없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었다.

   “너랑 애매하게 친해서 전화했어.”

   아! 이 말은 하지 말지. 다짜고짜 힘듦을 쏟은 나에게 S는 믿고 찾아줘서 고맙다고 그랬다. 때로 사과는 죄책감을 덜기 위한 도구가 되고는 한다. 불편했던 마음을 덜고픈 충동에 여러 번 사과를 내뱉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미뤄온 감정이 마침 수면을 넘쳐서 터진 것뿐이지, 꽤 오래전부터 울고 싶은 상태였다는 걸. 차라리 옛날처럼 인지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한편으로는 단단히 고인 눈물에 솔직해졌으니 좋아하는 게 맞나 싶었다. 태어날 때조차 소리 내지 못했던 내가 자신에게 기대어 힘차게 울음을 터트렸다. 무미건조한 바다가 처음 비에 젖었다. 언제부터 쌓인 눈물인지. 감정을 살피는 것에는 조금 익숙해진 나는 지난 계절을 역재생하였다.      


   설마 우울증이겠어? 아니나 다를까 간이 테스트상 다수의 증상이 양극성 장애, 즉 조울증을 가리켰다.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아플 때 병원에 가는 것은 별일 아니고, 우울이라는 단어가 나한테 잠깐 스몄다 해서 그게 나인 것도 아닌데. 쓸데없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디서 온 감정인지 자신을 돌볼 만한 지식 정도는 습득했고, 병원에서 선생님이 건네는 질문도 스스로 던질 수 있다는 교만이었다. 어딘가 응어리진 마음에 귀 기울여 달라는 건 똑같은데. ‘누군가에게는 나도 상담가니까!’ 같은 자기애적인 의미를 빌려와 합리화했다. 일 년 넘게 아득한 동굴을 쫓아 ‘왜, 왜, 왜.’ 질문을 던졌고, 여정 속에 지난 이유와 부단하게 부딪혀왔다. 그렇게 선망하던 우주를 향해 분명코 바뀌어 가고는 있었는데, 무엇을 잘못 설정했는지 자꾸 오류가 났다.

   그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종일 그들과 시간을 보내도 뒤돌자마자 외로웠던 이유는 간단했다. 관심도 없으면서 좋아한다는 소문에 오랜 짝사랑을 시작하는 기분. 관찰자를 좇은 게 그랬다. 사람이 셋만 모여도 입은 꾹 다물면서 자리는 끝까지 지켰다. 존재하고 싶었던 욕구가 그런 사람으로 단정 지었다. 그런 착각에서 기인한 관계들은 피상적이었고, 그것이 순간 회피에 불과했다는 깨달음에 본질적인 해결법만 좇았다. 그렇게 나의 새벽에는 지진이 일어났다. 문득 잠에서 깨면 침대가 흔들리고, 놀라서 거실로 나가면 집이 흔들렸다. 뉴스를 찾거나 밖을 확인해 보면 전에 없이 고요했다. 처음에는 꿈인가, 다음엔 집이 이상한가, 누차 반복한 후에야 몸이 떨리는 거구나. 그러고는 초점 흐린 눈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 잠들고 싶다.”

   “나한테 왜 이러지.”

   “아무도 이런 나를 모르겠지.”

   지속된 불면은 마음의 앙갚음이 분명했고, 의외로 실수는 회피조차 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한순간에 모든 생존법과 단절한 채 꾸준한 관찰자만 좇았다. 잠깐이라도 인정받는 안정감이 좋았던, 자기애적 대상으로 추정되는 관계라면 가차 없이 끊어냈다. 연락처에는 천 명을 넘어가는 인물이 다시금 사라졌고, 객석을 모두 비운 채 혼자만의 공간에서 자신을 관찰자로 두는 연습을 했다.


   나의 인내에는 갓 정보를 터득한 미생다운 모순이 있었다. 과거로부터 만들어진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는 견뎌냈으나, 변화하는 자신이 만날 날에 대해서는 어떤 가벼운 고민도 하지 않았다. 인지하고, 인정하고, 본질을 찾아서 연습하면 된다는 3단계 학습된 의미만 단순하게 따랐다. 이론상 본질을 찾았으니 이전 경로를 멈추고 목적지로 방향을 틀면 될 뿐이라는 오만한 판단을 부렸다. 나는 무섭게 달리는 차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결핍은 관성에 반작용 되어 빠른 속도로 빨려들었다.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공중분해 상태. 평생 의지해 온 생존법을 어떻게 한순간에 내려둘까. 심지어 트라우마 때문에 단기간 그런 관찰자도 못 만들면서…     

   그렇게 2021년 5월, 사기를 당하면서 나는 완전히 전복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 전이었다. 군대 선임 정현 형 집에 놀러 갔다가 홈시어터에 로망이 생겼고, 갖고 싶은 건 가져보기로 한 나라서 당장 빔프로젝터를 알아봤다. 그전에 비염 수술을 진행하려고 병원을 수소문하면서 결전의 날을 고심하던 시기였다. 이번에도 병원들의 진단은 비슷했다. 왼쪽 콧구멍이 아예 막혀있을 정도로 코가 휘어서 무너뜨리고 새로 세워야 한다고. 코끝을 받쳐줄 연골도 넣어야 한다고. 그럼 성형이잖아! 여러모로 내키지 않아서 수술을 포기했고, 수술 예정일이었던 5월 13일, 중고 카페에 저렴한 가격으로 올라온 빔프로젝터를 구매했다. 직거래하는 척도 했고, 금융 앱 인증도 되어있어서 또 놓칠까 봐 믿기로 했다. 그렇게 백만 원을 사기당했다. 그 순간 자신에 대한 배신감이 솟아오르면서 마침내 뒤집혔다.

   “이러려고 참고 견딘 게 아닌데.”

   실은 전부터 알아차렸다. 알면서도 천진난만한 이전의 모습은 저버린 채, 자각적으로 계산하고, 남 또한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이 시기만 견뎌내면 전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기대 하나로 버텼다. 그런 이유로 변해가는 자신이 괴로우면서도 괜히 옮기기라도 하면 어쩌나 주변에 그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나만을 관찰자로 두었다. 그런데 최선이 아닌 최악을 택해버렸다. 그로 인해 공격성 없는 주체의 쌓여온 분노가 애먼 자신으로 빨려들었다.     


   이 영화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인지적인 힌트를 전할 뿐,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만약 전한다면 그건 판단을 더한 오지랖이거나 마케팅 수법일 것이다. 자기 정답은 스스로만이 안다. 같은 도착지여도 목적에 따라 여행은 완전히 달라지는데. 나의 오류는 빠르게 도착해야 한다는 강박에 있었고, 그곳에 도착하는 데 있어 맞춤 경로가 무엇인지, 얼마의 속도가 적당한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순간 회피가 필요했다면 그게 맞을지도 모르는데. 남들이 다 틀렸대도 끌리는 선택이 최선일지도 모르는데. 중간에 경유지를 들리던, 휴게소에 머무르던 순간에 매몰되지 않고 나의 마음을 알고 선택한다는 게 주요했다. 명확한 최선과 약간의 유연성. 배운 걸 토대로 기계처럼 주입한다면, 맞지 않는 걸 억압하고 견뎌낸다면 이전과 다를 게 뭐가 있을까. 객관화의 본질은 이해한 순간이 아닌 변해가는 나에게 맞춰 시도하고, 수정하고 알맞은 최선을 찾아가기 위한 끝없는 여정에 있었다. 나를 알아가기까지의 인내가 결핍을 재차 느끼고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아픔이었다면, 이후 과정에서 필요한 인내는 시간이었다. 불 끈 직후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보일 텐데. 그걸 멈추는 순간 사랑의 수명도 끝났다.

   뒤이어 또 다른 사건이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외면하던 과거와 다르게 나아진 회복탄력성으로 짧고 굵은 회복 기간을 마쳤다. 나와 알맞은 속도를 찾아 곳곳을 살피고, 힌트도 얻으면서 유연하게 다음 경로를 나섰다. 서두르지 않고, 그렇다고 멈추지는 않은 상태. 중간에 잘못된 길을 들 수도 있겠지만, 전보다 커다란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돌아올 길도 가야 할 길도 안다. 이완되어봐야만 경직되었다는 현상을 알 수 있었고, 언제나 긴장으로 굳은 익숙함에 무감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 정도면 충분히 사랑받았고, 살만하다면서 몰아붙이듯 괜찮아야만 한다는 오만도 보내주었다. 이제 힘듦이 나를 찾을 때는 온전히 아픔을 느끼면서 그곳에서 파생될 새로운 행복을 기대한다. 소중하지 않다면 상처받을 일도 없었다. 더없이 소중한 나라서 아플 수 있었다. 그러니 이곳까지 잘 헤쳐온 나를 믿고서 그저 느끼기로 했다. 무슨 마음인지, 어디로 이끄는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언제나 내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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