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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독 Oct 20. 2023

“내가 기다려 달라고 했잖아!”

소원의 이유

  이 영화를 마무리하던 어느 날 새벽, 짜인 각본처럼 십 년쯤 지난 한 영상 클립이 알고리즘을 스쳤다. 여전히 소원은 미스터리하고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열린 결말이었다. 저 클립이 무엇을 내세우든 소원의 진심을 헤아리려는 엄연한 판단에 불과하겠지만, 내 탓으로 나에게서만 찾던 이유가 아닌 잊었던 소원에게서 묻어난 조각들은 그날을 대변해 줄 꽤 높은 확률지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소원에게 다른 확신을 남겼고, 단지 소원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한 사람을 떠났을 뿐이다. 우리가 헤어진 진짜 이유는 그뿐이었다.     


   이십 대 초반의 한 커플이었다. 그중에서도 여성 출연자는 이미지와 표정, 말투, 목소리, 단어 선택까지 소원의 묻어남과 닮아있어 어느새 동일시됐다. 관찰 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징은 속마음 인터뷰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을 쌓아온 데이터로 단정 짓다가도 뒤이어 들리는 진심에 오만이었음을 깨닫곤 한다. 영원을 꿈꾸는 여자는 남자의 끝없는 표현에도 수없는 걱정을 보였다. 겨우 마음 연 자신 곁을 떠나지 않을까 두려움에 자신을 숨기고 진심을 확인했다. 방송으로라도 속마음을 들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을까. 확신이라는 단어에 매몰돼 억누르기만 했던 나와는 달리 남자 출연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여자 출연자를 의문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고, 훗날의 선택마저 맡겨두며 자신의 이유를 들려주었다. 이미 동일시된 목소리를 들을 때는 마치 소원의 이유를 전달받은 기분이었다.

   우리 관계가 정립되기 전이었다. 딱 한 번 소원이 지난 계절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이전 상처로 인해 확신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 확신이 무엇인지는 묻지도 않았고, 내가 줄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 여느 날처럼 나는 틀렸고, 후회할 거고, 잎새가 주입하던 정답에 갇혀 위태하던 불안에 매몰되었다.

   “아직도? 너 이러다 놓친다.”

   “소원이 기다려 달라 그랬는데…”

   “그런 게 어딨어. 후회하기 싫으면 빨리 잡아.”

   몇 주간 반복된 다그침에 후회할까 불안했고 떠날까 무서웠다. 이때 정립된 관계로 잠깐 안도감을 얻었지만, 망가진 본질을 인지하지 못하고 놓쳐버린 긴장에 방심을 불렀다. 그걸 상대가 몰랐을 리가 없다. 특정 언어에 고립돼 누구도 전달받지 못한 배려를 쏟아내면서 확신과는 멀어졌다. 실수인지 기회인지는 언제나 이어진 선택들로 결정된다. 방전 직전에 채우면 훨씬 가득해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런 기회를 마지막까지 줄곧 실수로 매듭지으면서 또 앞서서 혼자 결론을 내렸다. 다음 선택까지 그의 감정이 보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버림받아 마땅한 아이라고 스스로 재단해버렸다.

   “내가 기다려 달라고 했잖아.”

   모든 찰나가 확인이었고, 이기적인 배려가 거듭될수록 의심은 다른 확신을 남겼다. 마음을 표현한다는 건 당신도 그래도 괜찮다는 무언의 신호다. 사랑을 가졌다면 사랑을 나누고, 누군가는 미움을 나누는 것처럼. 나는 오랜 불안을 소원에게 선사했고, 그의 표정을 알면서 연일 모른척했다. 어린 시절 표현에 인색한 부모님을 그렇게 의심해 놓고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거라면서 합리화했다.     


   방송을 떠나 그곳에서 여성 출연자는, 아니 소원이 말하던 확신은 진심에 관한 믿음이었다. 믿음을 갖도록 용기를 돋우는 것. 이내 안정이 되어준 남자와 달리 닮은 계절에 머물렀다는 이유로 나만을 생각했다. 나만 생각한다는 건, 그의 행동까지 뻔뻔하게 내 탓을 하는 거였고, 자기감정에만 매몰되어 상대를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소원의 묻어남을 마주하고 있는 건 나인데. 거짓 한 톨 섞이지 않은 진심이라고 해서 곧장 믿음이 되는 건 아니었는데. 내 마음마저 안중에 없으니 사소한 감정조차 흐르지 못했고, 사전 맥락이 감춰진 표현은 필연적으로 오해를 불렀다. 어떠한 의견도 취향도 내세우지 않은 솔직하지 못한 감정에 비추어 오는 마음마저 저버렸다. 서로 버려질까 두려워서 취하던 방어적 태도. 틀어진 균형을 맞추어 가기 위해서는 어쩌면 필연적인 갈등임에도, 나와 잘 싸우고픈 사람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하필 우리는 싸우지 않았고, 하필 우리는 닮아있었다. 찰나에 스친 감정은 배제된 채 이성이 정리한 새로운 단어만 끄집어냈다. 무엇을 지키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스스로가 아니었음은 명백했다.     

   곧이어 이런 관계성이 소원뿐만 아니라 이미 곳곳에 퍼져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수십 개의 클립을 타고 지난 계절로 돌아간 나는 솟아오른 각성 상태로 경찰서 동기를 만났고, 한양도성으로 오르는 성균관 대학길을 걸었다. 이때 동기가 솔직한 얘기를 꺼냈다.

   “수민아. 너는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

   소원은 물음표를 던지고 나면 항상 되물었다.

   “혹시 나한테는 궁금한 거 없어?”

   나는 늘 성실히 답했고, 되묻지 않았다. 하나의 질문에 열 가지 답하는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자부했고, 상대 영역에 의문 품지 않는 행동이 존중이라고 자만했다. 남 이야기를 그만큼 들으면서 정작 자신까지는 들려주지 않았고, 또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상대까지는 묻지 않았다. 그러니 그게 어떤 확신인지 알 리가 없었다.

   “음… 다음에 생길 때 물어볼게!”

   함축된 언어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로 전달됐을지 모른다. 데자뷔처럼 합쳐진 두 장면에 흩어졌던 조각들이 한데 이어졌다. 아직 모든 빈칸이 채워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어떤 그림을 가진 퍼즐인지는 선명해진 순간이었다. 마침 소원이 애착하던 단편 애니메이션이 떠올랐다. 제목은 <구름 조금>. 주었던 마음이 반환될까. 또다시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단지 우리는 나의 진심을 내버리지 않을,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 줄, 떠나지 않을 듯한 안정된 존재가 필요했다. 귀만 열고 있으면 뭐 할까. 마음을 안 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란히만 걸은 채 서로의 표정은 살피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물음도 사라졌다. 그런 면에서 누구도 사랑한 적이 없었고, 그런 감정을 바라는 소원만 품어오면서 그리워했다. 그래서 누구와도 어우러질 수 있었고, 누구와도 어질러질 수 있었다. 나를 좋아한다면 관계는 자연히 형성됐고, 그렇지 않다면 금세 고립됐다. 내 사정은 오롯이 빠져있었다. 상대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지. 상대는 내게 어떤 존재인지. 아무도 나를 묻지 않았고, 앞뒤 다른 그들 모습에 가꿔진 능력은 앞서 통찰하여 판단하였다. 묻어남을 맞혀내는 보드게임 <딕싯>에서는 언제나 압도적인 선두를 달리면서도, 나에 관한 질문은 혼란과 불편을 주는 불안이 되었다. 이후에는 남들도 그럴 거라면서 공감적 투사를 해왔달까.

   아직도 엄마는 초등학교 때 내가 탈모였는 줄 안다. 여전히 숱이 많아 고민이지만, 이미 얇아져 버린 한쪽 모발에 탈모 출신이 되었다. 그들은 드러난 모습으로 판단할 뿐 맥락은 묻지 않았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뽑았다는 진실은 영원히 마음에만 머물렀다. 물론 던지지 않았다고 해서 처음부터 없었던 건 아니다. 한동안은 넘실대던 물음들이 사람들을 이끌었고, 중요도가 커질수록 줄여갔다. 내면에서 올라오더라도 주춤대고 외면하느라 끝내 표출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실수와 상처를 다시 만들지 않기 위해 혹여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없던 일로 만들기 일쑤였다. 내가 혼자인 이유, 외로웠던 이유,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존재하지 못했던 쓸쓸함은 그들에게 내가 배제당한 것이 아니라 영화관 뒤에서 이별만 줄곧 해왔기 때문이었다. 내 사랑이 10이라면 그들에게는 3을 주었다. 그러면서 실망하고, 상처받고. 반 넘게 남기는 습관은 3을 최대치로 여기게 해 평소에는 그마저도 미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꺼내지 않은 마음 가지고는 어떤 모양을 가졌는지 알 수가 없으니 뜨거웠던 그들도 점차 식어갔다. 그들이 나를 떠난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지 않았고, 나보다는 그들을 조금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    

 

   마지막 날 소원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헤어지자는 언어조차 오가지 않았던 이상한 이별. 몇 번 더 이어진 만남에도 끝까지 속으로만 물음을 새겼던 나는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찬 공기로 뒤덮이는 시기면 여전히 그때로 돌아가고는 한다. 추후 그마저 다른 날로 뒤덮인대도 저 짧은 계절이 유일하게 완전한 듯 위로된 이십 대의 시간이었기에. 지레 겁먹어 제대로 된 노력조차 못 한 내가 그에게 악역은 아니었기를 바라며, 나와의 계절이 잊히기를 감히 소원한다. 유난히 차가웠던 겨울에 핀 이른 프리지어 같았던 나의 서투름이 누군가에게 상처 줘도 될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쌓아온 결핍의 의미가 현상보다 커져서 섣불리 놓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얘기를 꺼내기까지 셀 수 없는 걱정과 망설임이 있었던 만큼 부끄럽기도 하고 근심으로 차면서도 덕분에 꽤 근사한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말해본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이 같았던 마지막 순간에 함께해 주어서 고맙다고. 모든 장면을 오케이 컷으로 살아가는 지금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감정에 자유로운 이가 되어 수많은 사람이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는 이 영화를 써 내려가고 있다고. 소원했던 존재가 마지막 소원을 흘려보낸다.

   “역시 운동화 선물 때문에 도망간 게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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