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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독 Oct 20. 2023

애당초 정해진 해피엔딩

사랑한 나와의 이상법

   한날의 의문에서 출발한 이 여정의 세미 결말. 이곳에는 정답이 없다. 무엇을 만나냐에 따라 다음 장면은 계속 달라질 것이며, 나는 그것을 운명이라 부른다. 모든 건 우연을 가장한 필연, 필연을 가장한 우연이고, 운명의 또 다른 이름은 선택이다. 스쳐 가는 파동을 입자로 만든 건 분명 나였으니, 그 선택이 곧 숙명인 것을. 오래도록 움츠려 있던 겨울 정거장을 넘어 나에게도 봄은 있었다.    

 

   우리의 가정은 현재가 최선이 아니라는 전제로 내려진다. 운 좋게 첫 드라마를 찍은 내가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오늘도 매니저가 바뀌었네요?”

   “네! 친구들이 번갈아 가면서 해줘요!”

   서울로부터 4시간가량 걸리는 지방에서 진행된 촬영은 역시나 겁의 연속이었다. 다른 배우들과 달리 혼자만 매니저가 없던. 모든 것이 처음인 나에게 불안할 요소는 넘쳤지만, 그중에서도 아침에 못 일어날까 봐 제일 겁났다. 스스로 믿지 못해서인지 약속 전날이면 잠을 통 이루지 못하던 나였으니까. 하필 촬영 날짜도 유동적이라 부탁하기도 애매했다. 그때 다행히 나에게는 언제든지 본인 시간을 내어주겠다는 친구들이 있었다. “됐고, 너는 가서 연기만 해!”라면서. 양면 중 굳이 단점을 보는 습관은 이룬 성과마저, 노력마저 운으로 치부해 버렸다. 흰 도화지에 점이 하나 찍혔다는 이유로 남은 공간은 모두 배척한 채 현 상황의 자신을 탓했다. 투덜거리는 내가 오점이라며 새 도화지를 찾는 동안 누군가는 그 점을 중심으로 다음 그림을 그려갈 텐데. 나를 도와준 매니저 친구들은 학교, 군대, 대외활동 등 결핍에 쫓겨 후회하던 과거에서 이어진 우연들이었고, 스치던 우연을 인연으로 붙잡은 것도, 다가올 장면을 결정짓는 것도 오로지 나였다. 내가 내 객석에 없으니, 누가 어떤 표정으로 영화관에 앉아있는지, 어떤 맥락을 가졌는지 알 노릇이 있나.      


   24년 만에 찾은 객석이었다. 한참을 떠나온 열차 따라 첫 정거장부터 되돌아온 이 시간 여행을 여기서 마치기로 한다. 도약을 꿈꾸는 여느 마이너스 통장처럼 불행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행복하지도 않은 0을 좇던 이 영화는 이윽고 자신을 되찾아 생존법을 내려두었고, 터득한 사랑법과 더불어 이상을 향해 나아갈 일만 남았다. 말도 안 되는 확률로 한시 같은 정거장에 머물렀던 그들과의 계절은 긍정과 부정을 넘나들었다. 사라지고픈 마음은 지극히 살아지고픈 마음을 대변했고, 미워하는 마음은 사랑받고픈 욕망을 대리했다. 우유를 소화 못 하는 줄도 모르고 학창 시절 가스를 뿜을까 봐 걱정하던 나는 여전히 가스가 두렵다. 이처럼 모든 감정은 이전 데이터에서 온 반응일 뿐이었으니 나를 사랑하게 된 이상 우유를 먹을지 말지 선택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다음 생에 써먹기에는 아직 이 여정이 너무나 많이 남았으니까. 어떻게 하면 남은 여정을 더욱 만끽할 수 있을지에 지나온 계절을 온통 활용하기로 했다.

   예를 들면 선택할 수 있는 영역에서는 마음대로 한다거나. 충분히 준비한대도 새 나이, 새 사람, 새 찰나를 맞이할 것이고, 그곳에서 새 사건, 새 결핍을 마주하여 제어 불가능한 변수로 가득할 것이다. 그런 하나하나의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맡겨두되 사전에 정해둔 나만의 결말대로 마저 나아가기로 했다. 변치 않는 건 L열 13번에 자리한 나니까. 그것은 그 자체로 단단한 안정을 남겼고, 자신을 위한 게 무엇일지 나다운 환경을 옹골차게 꾸려간다. 그렇게 완벽한 이기주의자가 되기로 했다. 여전히 세상이 이타적이기를 바라지만, 가끔 완벽하게 이기적인 것도 나쁘지 않겠다. 사소한 이타주의마저 욕망이었던 것처럼 어차피 주체의 충족 욕구가 빠진 행동은 없으니, 자신에게만 충실하다면 부정적 에너지도 생산될 일이 없었다. 그러니 그게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길이었다. 악을 다룰 수 있는 상황에서도 서로 각자를 위한 오롯한 선을 택하면서.     

 

   작년에 관련하여 방송 프로그램 섭외로 인터뷰를 요청받은 적이 있었다.

   “요즘 세상이 개인 중심인 게 문제인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게 왜 문제죠?”

   괴짜 같은 내 일상 유튜브에 90년생 대표로 나를 섭외하려고 했던 작가는 당연히 개인이 희생하고 집단이 중시되어야 한다는 유도 질문으로 답을 끌어냈다. 그러나 주체적인 삶이 문제인 세상, 과정을 삶에도 결과주의적인 세상에서 나의 의견은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뭐든지 당연하게 여기는 게 문제 아닐까요? 사실 저는 반대 의견도 이해해요. 그분들 세대에는 그게 맞는 거였잖아요.”

   예상대로 섭외는 취소됐다. 너무 중립적인 입장이라나. 빼빼로끼리는 빼닮았지만, 닮았다고 한들 다르다는 게 현상이다. 막대 길이도, 묻어있는 초콜릿의 모양도. 그런 빼빼로를 먹은 사람들끼리 감상이 다른 게 어때서? 사람마다 환경도 다르고, 배움도 다르고, 그래서 결핍도 다르니 지니는 가치까지 달랐다. 유일하게 정해진 건 다르다는 사실뿐이었고, 그들을 존중해야, 나도 존중받을 수 있었다. 남을 미워한다는 건 나를 미워한다는 말이었으며, 완벽히 이기적이라는 건 오롯이 자신을 위한 선택이어야 한다는 거다. 타인을 따라가고 경쟁하는 건 눈앞 안정감을 얻는 쉬운 방법이었으면서도, 어쩌면 나라는 존재를 지워가는 지름길이었다. 색을 잃으니 PR 시대가 왔고, 각자가 되었을 때는 다정함을 좇았다. 반복이었다. 의미의 흐름으로 죽여놓은 가치는 희미해졌을 때쯤 다시 떠오른다. 학습된 정답에 휩쓸려 자신을 소비하기보다 나로서 살아가다 보면 어쩌다 맞아있는 날의 선구자가 되어있을지도 모르는 거였다.


   이기적이어도 좋다. 이기적이래도 좋다. 다만 삶이 진짜 영화로 상영될 때 떳떳할 정도로만 이기적이기로 했다. 그들이 나를 떠난 것마저 그런 거였다면 선뜻 받아들일 것이고, 좋다는 말은 못 해도 응원은 할 것이다. 착하기에 급급했던 나도 누군가에게는 꿀밤 먹이고픈 나쁜 놈이었을 수 있으니. 오는 배려도 가는 거절도 겁먹고 망설이고 밀어내기보다 맡겨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영영 알지 못할 그들에게 앞으로도 의도치 않게 아마 그럴 예정이다. 그들이 말하는 호구가 되지 않는 선에서는. 마음껏 이기적으로, 다정하게.     

   보통 사랑 얘기는 사랑하는 것으로 결말을 지으며, 다음 이야기는 상상에 맡긴다. 보이지 않아도 그들이 계속 살아가듯 나의 멈추지 않은 열차도 마저 나아갈 예정이다. 새로운 우연을 만나 맞닿은 지점에 동승하기도 하고, 내려 즐기기도 하고, 낯선 정거장에 부딪히고 실패하면서 마음껏 아파하고, 더 마음껏 사랑할 것이다. 영화의 해피엔딩이 아름답게 여겨지는 이유는 거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고되었는지 지켜봤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인공답게 시련을 겪어왔을 뿐이다. 혹여 다음 여정이 두려울 때는 조금 더 성장해 있을 다음 우주의 나를 믿고 보이는 곳까지만 가서 잠깐 머무르기로 했다. 그런 선택은 결코 방치나 방관이 아니었으며, 가끔은 멈추어 그런 계절을 되돌아볼 때 다음 시야가 차츰 펼쳐지기도 했다.

   사랑한다는 건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 그를 위해서는 물음을 던져야 했고, 얻어진 ‘이해’는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두었다. 마침내 안착한 여유는 ‘확신’이 되었고, 머지않아 안정이 되어 ‘믿음’으로 탈바꿈했다. 믿는 이유는 단지 나니까. 그 순간 ‘자기 사랑’은 존재했다. 이 공식만 알아도 행복은 가까워졌다. 잠깐의 비가 내렸고, 넓게 뜬 쌍무지개가 가져다준 건 단지 마음을 따라갈 용기였으니. 상처받은 사람은 살아남는 법을 안다. 어느 순간에는 어떤 감정이 나를 찾는다는 게 웃기고 어이없고, 괜히 머쓱하여 유해지기도 한다. 이토록 나약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날이 흐르고 흐르다 보면 어느새 단단해져 있었다. 이것이 사랑의 여정일까. 오는 감정을 나답게 잘 보살펴 이끌어가는 것. 그것이 나와의 사랑이었다.     


   360도 고개를 돌려보라. 이미 구심점에는 내가 있으니. 고속터미널역 5, 6번 출구로 나가는 통로 벽면에는 이런 대형 스티커가 붙어있다. 5,171만 명의 주인공, 5,171만 개의 영화. 주인공이라고 적힌 프레임 안에는 눈부시게 내가 비쳤다. 그러니 더는 치우쳐 있지 않게 주인공을 중심으로 찬찬히 흐르면 될 뿐이다. 다음 발걸음을 내딛기로 한 것도 나였고, 모든 건 스스로 이루어 낸 나만의 여정이었다. 이제부터는 당신의 영화를 어떻게 알아갈지, 만들어 갈지. 추상에서 이상으로, 이상은 일상으로. 당신들이 주인공인 그 영화에서 부디 자기와의 사랑을 당신답게 이루어가기를 염원해 본다. 나라는 영화가 여러 번 되돌아보고픈 자신만의 명작이기를 바라며. 나의 우주를 잃어버리지 말 것. 그리고 사랑하는 내가 될 것. 진심 다 해 사랑한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한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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