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영혼과의 조우 - 3
명상 중에 찾아온 ‘육체와 의식이 분리되는 경험’은 내가 소위 영성학에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앞으로 ‘초월적인 영혼에 관한 모든 탐구’를 영성학이라 부르려 한다. 이에는 물론 종교도 포함된다).
사람에게는 마음을 열고 닫는 능력이 있다. 그 대상이 사춘기 자녀였든 혹은 토라진 연인이었든 마음을 닫아 버린 상대의 마음을 여느라 진땀을 흘려 본 적이 있다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다가 지루해지기만 해도 마음을 닫는다. 하물며 나와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더 말해 무엇할까.
나는 극단적인 유물론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유물론에 가까운 세계관을 지니고 있던 사람이다. 그래서 종교에 귀의한 지성인들을 만날 때마다 합리적인 지성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저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까 의아해하고는 했었다.
그런데 그 날의 일상적이지 않은 경험 이후에 나는 갑자기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때로 보이지 않던 세계의 문이 열리면서 그 세계를 엿보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그들은 마치 ‘예-아니오(Yes or No)’ 질문지에서 하나의 답을 선택하고 다음 질문으로 나아가듯이, ‘물질 혹은 영혼’이라는 선택지에서 과감하게 영혼을 선택한 후에 다음 질문으로 나아가게 된다. 물론 그 다음 질문에서 어떤 답을 택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고 개인의 선택이다(나는 그 다음 질문에서 종교를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어떤 공동의 경험을 그들이 공유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 경험 이후에야 수천 년간 종교가 힘을 잃지 않고 이어져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철학과 종교 서적에 등장하던 수많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한 언급, 그것이 ‘무無’가 아니라 ‘존재하지만 감각할 수 없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였음을 갑자기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타고난 현실주의자였던 나는 ‘초월적 의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곧바로 ‘신’으로 연결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는 어떻게 그런 현상이 가능했는지를 합리적으로 밝혀보고 싶은 열망에 휩싸였다. 왜 누구에게는 보이는 세계가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을까. 혹시 그 육체를 초월한 의식이 우리 정신의 실체였던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나는 그 답을 찾기 위해 그간 마음을 닫고 살았던 ‘초월적 세계’에 관한 이야기에 마음을 열었다.
그것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세계였다. 하지만 마음을 여는 순간, 엄청난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영성학에 관한 책을 읽고 그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또 하나의 세계가 나의 세계 곁에 나란히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무협 소설에나 등장할 세계가 21세기 하늘 아래, 겉으로 보아서는 한없이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여전히 실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뷰하면서 일상적인 만남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그들의 비밀스러운 경험에 관해 들었다. 사람 주변에 방사되는 ‘오라(aura, 인체나 물체가 주위에 발산한다고 하는 신령스러운 기운)’를 보는 사람은 흔했고,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 유체 이탈을 경험한 사람, 가까운 미래의 일을 꿈으로 미리 보는 사람 등 판타지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사람들이 실제로 우리 곁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자신의 경험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알기 때문에, 티도 내지 않고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들은 회사원이고, 전문직 종사자이고,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스스로 말해주지 않는 이상, 그들에게 그런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은 눈치 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세계로 직접 걸어 들어가 마음을 열지 않았다면 평생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죽었을 세상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우리 시대에 과학이 이미 도그마가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세의 인류가 ‘교리에 맞는가 아닌가’를 진실 판별의 기준으로 삼았듯이 지금 우리는 ‘입증할 수 있는가 아닌가’를 진실 판별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래서 중세에 ‘과학적 진실’이 외면을 받았듯이, 지금 우리 시대에는 영적인 진실이 외면 받는다.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도는데’라며 진실을 함구했듯이, 지금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그 세계는 존재하는데’라고 생각하며 침묵을 선택한다. 하지만 중세가 이미 보여 주었듯이 진실의 외면은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다.
‘영혼’만을 바라보느라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불행했던 중세처럼, 지금 우리는 ‘물질’만을 바라보느라 정신적 존재로서의 불행을 겪고 있다. ‘물질적 인간관’은 개인을 감각적 쾌락과 무의미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없게 하는 것을 넘어, 물질만을 추구하는 사회 구조를 합리화함으로써 사회 구성원 모두의 정신을 불안하고 위태롭게 만든다. 입증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영혼의 문제’를 지성의 빛 밖에 방치하는 사이,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그릇된 영성과 사이비 종교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혼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지 ‘부정’이 아닐 것이다. 무작정 초월적 세계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를 조화시킨 새로운 인간관을 찾는 일이 시급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한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 한다. 영적인 체험을 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과학이 그것에 ‘환상이거나 착각’이라는 딱지를 붙여 준다고 해서, 자신에게 생생한 현실로 느껴지는 경험이 환상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음지로 향하지만, 내게는 그들의 경험이 오히려 인간 존재와 정신의 실체를 한 겹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지성의 임무가 우리의 생각과 행위가 미칠 수 있는 범위를 최대한 멀리까지 확장하고 드러내어서 우리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후 나는 두 세계 모두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통합적 세계관을 찾는 일에 나의 모든 지력을 쏟아부었다. 그것은 인문학과 과학, 영성학을 넘나들어야 하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한 분야를 대략 훑어보는 데만도 몇 년의 시간이 훌쩍 지나버리곤 했다. 하지만 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부터 풀어 갈 ‘영혼과 마음의 이야기’는 바로 이런 공부의 과정과 나의 경험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