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영적 가르침들이 '깨어 있으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도대체 깨어 있으라는 것이 무슨 말일까? 우리는 이미 눈을 뜨고 있는데, 이것이 잠든 상태이기라도 하다는 걸까?
나의 경험에 의하면, '깨어 있으라'는 말은 의식의 힘을 키워서 무의식적으로 처리되던 사건들에 대한 의식적 인식을 강화하라는 뜻이다. 무의식 속에서 벌이지는 일을 더 잘 의식하게 되면, 내 삶의 행복과 자유도가 그만큼 증가한다. 깨어 있으면 무의식적 영향을 어떻게 다룰지, 수용할지 거부할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말로는 의미가 제대로 전해질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마침 오늘 겪은 사건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오늘 모든 포털은 한 연예인의 자살 사건으로 뒤덮였다. 무심코 핸드폰을 켰을 때 기사가 눈에 띄어서 나도 그 사건 기사를 읽었다. 평소 관심이 있던 배우라서 조금 더 몰두해 몇 편의 기사를 연이어 읽었다. 그런데 기사 창을 닫고 몸을 일으켰을 때, 갑자기 마음에 불안이 가득 차 옴을 느꼈다. 최근 외출을 거의 하지 않고 책만 보느라 체력이 좀 떨어져 있었는데, 이러다가 예전 체력을 회복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도 들고, 어제 처리한 일이 잘 마무리되지 않은 것 같아서 빠뜨린 것은 없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기도 했다. 평소에 늘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었다면, 나이나 상황을 탓하며 크게 문제 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평소에 불안을 느끼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늘 관찰하고 있기 때문에 곧 불안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문제는 기사였다.
우리는 기사나 책을 읽을 때, 그 콘텐츠의 문자만을 읽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의식은 공간을 초월해 정보를 받아들이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때문에 신문 기사를 읽을 때, 특히 그 사람의 육성을 듣거나 사진을 볼 때면,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마음의 상태에 연결이 되기도 한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덕분에 나는 곧 불안의 원인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도 그 배우의 죽기 전 마음이 이러했던 모양이다. 내 마음에 느껴지는 불안의 크기로 봤을 때 그가 극단적 선택을 하기까지 얼마나 큰 불안에 시달렸을지가 느껴졌다. 억울하다고 호소하면서도 끝까지 견딜 수 없었던 힘겨움을 생각하니 그의 삶에 깊은 연민이 인다.
하지만 나의 입장에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를 이해하고 애도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불안의 역할은 끝났다. 그러니 더 큰 불안에 휩싸일 필요가 없다. 게다가 불안 심리는 그대로 두면 점점 더 공명을 일으켜 나의 의식을 잠식해 가기 때문에 곧바로 떨쳐버릴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문구로 잘 알려져 있듯이 우리의 뇌는 잊으려 할수록 기억된 정보를 더 강화하는 특성이 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뇌 활동을 중지시키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계획에 없던 대청소를 했다. 마침 날이 따뜻해 환기를 하기에도 더 없이 좋은 날씨였다. 덕분에 지금 나는 불안을 떨쳐버린 것은 물론, 상쾌하고 즐거운 마음이 되었고, 이런 마음이라면 글을 써도 좋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의식의 힘, 환경의 영향을 수용할지 거부할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란 이런 힘을 의미한다. 신문 기사 하나 때문에 종일, 혹은 내일까지 불안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자유, 내 시간을 내 의지대로 채울 자유. 이 모두가 내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던 변화를 의식할 수 있게 되면서 누리게 된 것들이다. '깨어 있으라'는 가르침은 이렇게 살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주체적이고 자유롭게, 나를 흔드는 무수한 환경의 일렁임 속에서도 길 잃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단단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