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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허물이 만들어낸

가족이란 완전체

by 유우미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기 싫어했던 삶이었습니다. 가족에게조차 들키려 하지 않았고 그저 혼자서 짊어지는 게 어른이 되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마음에 품는다는 것도 제겐 버거운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랬던 제가 지금은 가족이 된 이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약함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그 약함을 더 이상 나무라지 않는 삶을 말이죠.




약함이 누군가에게 짐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마치 '당신에게 불편함을 줄 순 있겠지만 날 책임지진 않아도 돼'라고 여기면서도 한편으론 약간의 연민과 이해받고픈 마음이 공존했던 것 같습니다. 남이 뭐라 한 것도 아닌데 이미 스스로 건강한 판단을 내리고 있지 않아서인지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기 일쑤였습니다.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던 엄마의 무심한 태도 공감해주지 않는 말투는 점점 더 스스로를 초라하고 나약한 사람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학교생활은 친구들로부터의 열등감,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동료들 간의 시기와 질투 등으로 감정소모에 힘쓰는 자신을 볼 때면 약함에 허우적거려 남아있던 자존감은 바닥을 향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어딘가에 속해져 함께 어우러 지낸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 밑바닥을 보였을 때 제가 살면서 유일하게 존경했던 어른, 친할머니께서 이렇게 얘기해 주셨습니다. "그랬구나 네 마음이 많이 힘들었겠구나 속상했겠구나 딱한 것."

그 어떠한 조언도 다 괜찮아질 거란 기약 없는 약속도 할머니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자신의 약함, 허물을 받아내 주셨습니다. 너만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서 내게도 그러한 허물이 있다면서 90이 넘은 할머니께선 그런 저를 가만히 바라만 봐주셨습니다.

그렇게 할머니 앞에선 자신의 약함이 드러나고 또 드러내져도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자신마저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포옹 그리고 단단함마저 생겨버렸습니다.


사랑은 받았을 때 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제가 받은 할머니의 '있는 그대로적 사랑'은 지금의 남편을 만날 수 있었던 통로가 되었고 아이를 키우며 육아 참 어렵다 생각될 때마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초심으로 돌아가게끔 도와주었습니다.




가족을 이룰 수 있다는 것 결국 내가 어떤 사랑을 품고 다른 이들과 어떠한 사랑으로 관계를 맺느냐에 달린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의 사랑만을 강요하기보다 날 사랑한다 택한 이들의 허물을 진정으로 안아줄 수 있는지 말입니다.


서로의 허물을 안아준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약함을 나눠지겠다는 것과 같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나에게 있는 허물을 누군가 대신 메꿔주는 삶, 그에게 있는 허물을 위해 나의 사랑으로 메꿔가는 삶 이러한 삶이 결국 가족을 이루고 이만한 완전체를 이뤄가는 공동체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 제게 허락한 가족, 제 허물마저 사랑해 주고 제게 없는 걸 채워가며 보다 더 완전해져 가는 공동체가 보입니다. 남편이 그러하고 딸이 제겐 그러한 존재입니다. 연하인 남편이지만 나무보단 숲을 그릴 줄 아는 넓은 시야를 갖고 있어 통찰력과 결단력이 강합니다. 쉽게 흔들리려 하는 자신의 약함을 남편은 잘 알기에 이를 감싸 안고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제게는 없는 사랑의 표현, 노력해야 드러나는 나만의 사랑법이 약함이었는데(여전히 냉소적일 때가 많기에) 딸아이는 이런 엄마를 두고 온갖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해 줍니다. 부모로서 줬던 사랑일뿐였는데 아이는 몇 배로 되돌려주려 하는 사랑보따리덕에 저희 집은 늘 웃음꽃이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저희 가족의 '있는 그대로적 사랑'은 요즘 들어 다른 이들에게조차 전해지고 있습니다. 양가 부모님에게, 친인척 식구들에게, 교회 지인들에게 그리고 우릴 알고 있는 주변의 모든 분들에게 이 같은 사랑이 진짜 사랑임을 대신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약함은 비난과 놀림거리, 숨겨야 하는 부끄럼이 아님을 또 누군가에게 짐이 아니라 그저 각자의 짐 같은 허물을 서로가 함께 안아주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하였을 때 우리 모두는 완전체 같은 가족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누구에게나 허물이 약함이 있듯이

먼저는 자신을 포옹해 주고 다른 이들의 약함마저 안아주는 오늘의 하루가 돼 보는 건 어떨까요?

그리했을 때 우린 서로 어우러 가는 법을 배울 수 있고 함께 안아주기에 경험할 수 있는 가족 같은 공동체는 언제 어디서는 충분히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당신의 사랑에 허물마저 덮고 안아줄 수 있는 사랑이 깃들길 소망합니다.



오늘도 읽어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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