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상순 Sep 26. 2023

위치정보를 허용하시겠습니까

8. 문지기에게 들키기



“살고 있는 아파트가 몇 동이예요? 지금 한번 가 보고 싶다.”

  

옷을 잘 차려입은 한 떼의 주부들이 교양 있게 소곤거리다 나가고 나자 카페 분위기가 한결 심플해졌다. 그는 생강차를 마시다 말고 깜짝 놀라며 잔을 내려놓았다. 집에 딸내미가 있다고 했다. 

  

“있으면 어때요?”

  

그러면서 어떻게 생긴 딸인지 궁금하다며 눙쳤다. 실없이 꺼낸 소리는 아니었다. 그는 딸이 있어서 곤란하다는 식이지만 나는 딸이 있으니까 가 보고 싶었다. 지름길을 가로지르려면 문지기에게 들키는 것이 최선일 때가 있었다. 게다가 어느 딸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가끔 몇몇 지인들이 왜 일반소설이 아니라 청소년소설을 쓰느냐고 물으면 나는 내가 차일드교의 교주이기 때문이라고 너스레를 떨곤 하였는데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아이들을 좋아했고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그곳이 구덩이일지라도 기꺼이 나를 거기에 처넣으려고 하는 편이었다. 이런저런 기특한 생각으로 아침부터 나를 옥죄어 왔던 스트레스가 날아가고 즐거운 이벤트라도 앞둔 것처럼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은데 딸내미가 이해를 못 할라나?”

  

그는 그건 아니지만, 하고 뒤끝을 흐리더니 내가 다시 한 번 가 보고 싶다고 하자 하릴없이 몸을 일으켰다. 표정은 좋지 않았다. 

  

커피 두 잔과 생크림을 얹은 녹차라테를 들고 아파트 재건축과 최근의 부동산 흐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그의 집을 향해 걸었다. 4층짜리 유명 전자제품 상가와 이름난 대형병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고만고만한 약국들을 지나 지구대 골목으로 들어가자 저만치 돌아앉은 아파트 입구가 보였다. 꽃다발 하나쯤은 살 수도 있었으나 화원이 눈에 띄지 않았고 가까운 곳에 꽃집이 있느냐고 물어보자니 너무 번거로울 것 같아 그만두었다. 말 그대로 번화가인 거대 쇼핑몰에서 걸어서 7분 거리에 그의 아파트가 있었다. 지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둘이 살기에는 넉넉한 평수였고 집안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거실 가구는 색상이며 배치가 조화로웠고 티브이 드라마에서 부잣집 세트장으로 활용되더라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예상했던 대로 전처가 포함된 가족사진이 거실 한복판에 걸려 있었는데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권력을 잃어버린 여자의 형상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어떤 이유로 몸을 바깥에 내놓은 채 한뎃잠을 자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후좌우를 살펴보자니 누군지 도통 모르겠고 감정이입을 하자니 나의 오지랖이 너무 가소롭고 신파적이었다. 거실을 빙빙 돌며 외투를 벗고 났을 때 딸이 놀라며 방에서 뛰어나왔다. 깨끗한 인상에 날렵한 콧날이 단번에 시선을 끌었다. 아이가 입김을 후후 불 때마다 이마 위에서 까만 솜털이 가볍게 흩날렸다.  

  

“저녁을 안 먹었다고요? 라테가 아니라 다른 것을 사 올걸 그랬구나. 뭐 먹고 싶어요? 남의 집을 방문하면서 빈손으로 왔으니 치킨이든 뭐든 사고 싶어요.” 

  

이런 오지랖이야말로 요즘 젊은이들이 극혐 하는 진상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기왕 이렇게 쳐들어온 바에야 나는 나대로 예의를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유라고, 이름조차 예쁜 그의 딸은 조금 소극적이었다. 쑥스러워하는 아빠와 근본도 모르는 낯선 여자의 출현에 부정적인 감정을 얼굴에 실었지만 목소리로 도발하지는 않았다. 내가 몇 시간을 거기서 뭉개더라도 직접 전투에 나설 것 같지는 않았다. 뭐 시킬까요? 내가 거듭해 물어보자 딱 한 번 폭 꺼진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으나 끝끝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휴, 내가 차려 주지 않으면 언제까지라도 굶을 애예요. 그가 팔을 걷어붙이며 부엌으로 갔다. 나는 미유가 인터폰이 있는 벽면에 기대어 휴대폰으로 글자 치는 모습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다다다닥,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날렵한 손놀림이었으며 자신이 마시던 녹차라테에 휴대폰 카메라를 조준하기도 했다. 그때 내 입에서 끄억, 하고 트림 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장 먼저 소스라친 것은 나 자신이었다. 순대국밥이 나와 맞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소화는 되는 모양이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데 너무 심한 짓을 한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주춤하던 미유의 손놀림이 다시 빨라졌고 나의 소화기관도 활발한 움직임을 계속하고 있었다. 사실 그날 처음 만나다시피 한 여자가 집안을 급습하겠다고 하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어떻게든 그것을 처리하기 마련이다. 그에 대한 염려가 자녀에게까지 미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야말로 부모의 역할이었다. 그는 나의 트림 소리조차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대신 어느새 깎았는지 커다란 쟁반에 과일을 담아 소파 앞 탁자에 가져다 놓았다.       

이전 07화 위치정보를 허용하시겠습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