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옆구리 찔러 사과받기
좀 드세요.” 그가 나를 쳐다보았고 미유에게는 곧 상을 차릴 테니 이거 먼저 먹고 있으라고 했다. 난 사골은 더 이상 안 먹어. 미유는 부엌으로 가서 그가 켜 놓은 가스 불을 끄고 왔다. 과일 쟁반을 중심으로 우리는 자연스레 둘러앉은 모양새가 되었다. 사골이라니, 남몰래 몸서리를 치고 있을 때였다.
“이지선 작가님이셔. 너도 읽어 본 책이 있어.”
그가 수분이 많은 배를 소리 나게 씹자 미유는 새치름하니 “뭐?”라고 반문했다. 제목이 뭐였더라. 그가 잘 생각이 안 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때야 내 머릿속에 떠 있던 의문 부호 하나가 처리되었다. 나는 얼른 끼어들었다.
“『목욕하러 갑니다』 맞죠?”
“어?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가 정색을 했다. 눈치를 보니 지금은 그 책이 집에 없는 모양이었다.
“찍었어요. 책이라고 해 봐야 세 권뿐이어서 맞힐 확률이 33%는 되거든요.”
그러고는 웃음을 과장했으나 분위기를 살리는 효과는 전혀 없었다. 사실 찍어서 맞춘 것은 아니었다. 『목욕하러 갑니다』라는 책 ‘작가의 말’에 결혼과 관련된 나의 신상정보를 적어 두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 남자가 무분별하게 찔러댄 칼끝에 죄 없는 내가 걸려들었을 뿐이라는 생각은 그날 줄기차게 나를 괴롭히고 있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알리바이가 갖추어지자 조금은 견딜 만해졌던 것 같다. 누군가는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무분별’이라는 단어 하나가 해체된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였다. 이제 퍼즐은 맞추어지고 남아 있는 의문 부호도 없었다. 20대를 독특하게 보낸 탓에 인생의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디서 무엇을 했더라도 쓸모없는 것에 경도되고, 고비가 닥칠 때마다 어리석은 선택으로 고난을 자초했을 나였다. 하지만 하나같이 내가 시작하고 내가 끝낸 일들이었다. 그의 라이프스타일은 여러 면에서 그런 나에게 이질감을 안겼지만 이해 못 할 것도 없었고 이해하지 말아야 할 일도 아니었다. 내가 편안한 느낌을 뿜어내자 부녀의 표정도 다채로워졌다. 미유는 테이블을 탁 치면서 소리 나게 웃었다.
“운동권 연대모임에서 만난 사이라고요? 대박! 학교에서 한 사람씩 대표로 나와 시위나 구상하고 막 그랬다는 거잖아. 진짜 웃겨.”
“웃기기는······”
“웃기잖아, 슬기롭게 감빵생활을 할 것도 아니면서.”
미유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목에 탁 걸리는 글자가 있었다. 미유는 왜 감방생활을 ‘한 것도 아니면서’가 아니라 ‘할 것도 아니면서’라고 말한 것일까. 나는 약간 굳은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야, 그건 정말 네가 뭘 몰라서 하는 소린데······ 우린, 나름 슬기로웠어.”
그가 말을 하다 말고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 피이. 콧방귀 뀌는 미유의 표정이 너무 생기발랄해서 나는 방금 목에 무엇이 걸렸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가까스로 고립을 면할 수 있었던 그 타이밍에서 필름이 딱 끊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느새 나는 손끝으로 탁자를 톡톡 치면서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었다.
“말 나온 김에 연대모임과 관련해 나한테 뭐 할 말 같은 거 없어요?”
그냥 옆구리를 찔러서라도 사과를 받고 보자는 마음이 컸다. 그거면 충분하지 뭘 더 바라랴 싶었다. 살면서 사건이 내 뜻대로 풀린 적은 별로 없었고, 내가 뱉은 말의 의미가 내가 원하는 지점에 도착한 적도 거의 없었다. 편지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죄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지금 이 순간 긴히 필요한 것은 마무리를 하고야 말았다는 자족감이 아닐까.
“뭔데요? 그런 게 뭐가 있을까요?”
처음에는 ‘와우, 밀당을?’ 하며 속으로 웃었다. 하지만 내가 “건대사건 때 말이에요, 그때 나를 따돌린 거 기억 안 나요?”라고 했을 때 그가 무슨 소리냐며 도리질을 치자 나도 모르게 넋이 나갔던 것 같다.
“무슨 소리예요. 그런 일이 있었나요?” 그가 정색을 하며 자신의 상체를 의자 등받이 깊숙한 곳으로 쑤셔 넣었고, 나는 “아, 그게 말이에요.” 하다가 흐지부지 말끝을 뭉개고 말았다. 목이 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