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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짜미 Jun 18. 2024

어쩌다 한 달짜리 신혼여행

"저희한테 그런 상품은 없습니다."

<이전 이야기>

  결혼에 대해서 무지하기 그지없는 나에게 결혼은 1년 전부터 준비하는 거라며 지금의 아내는 나를 웨딩박람회에 함께 가자고 했다. 웨딩 플래너와 상담을 나누고 진땀을 흘리며 스튜디오를 골랐다. 아내와 나 각자 한 곳씩 골랐는데 고른 그곳이 마침 같은 스튜디오였다. 아내와 나는 천생연분이라는 눈빛을 서로 주고받으며 웨딩 플래너에게 이 사실을 말하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스튜디오에 관하여 어떻게 촬영을 하는지 어떤 걸 준비해야 하는지를 물어보고 이야기하다 스튜디오의 위치가 어딘지 듣게 되었다. 여기서 한 시간 반 거리. 쌓여있는 저 앨범 샘플북 업체 중에 가장 먼 곳인가. 다시 고른다고 해서 엄청 마음에 드는 곳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우린 낭만이라도 챙기기 위해서 첫 선택을 따랐다. 스튜디오를 골랐으니 다음은 예물반지 상담이다. 웨딩 플래너는 예물반지 부스에 상담이 진행 중이라 허니문 상담 먼저 받아도 괜찮겠냐고 물었고 우리는 괜찮다고 말했다. 우리는 머쓱한 걸음으로 쭈뼛쭈뼛 허니문 상담 부스로 이동했다.


  허니문 상담 부스에 가서 앉았다. 인사를 하고 상담사는 나에게 한마디 건넸다. "많이 힘드셨나 봐요, 하하하". 차마 맞다고 답할 순 없었지만 나는 이미 지쳐버린 상태. 상담을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생각해 본 여행지가 있냐고 질문을 하셨다. "혹시 생각해 오신 신혼여행지가 있으실까요?" 아내와 나 둘 다 신혼여행을 간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어디를 갈 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해 본 적이 딱히 없다. 더군다나 해외는 더더욱. 우리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고 상담사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해외를 가보신 적은 있으실까요?" 아내는 태국을 다녀와봤고 나는 미국을 다녀와봤다. "두 분 다 좋은 곳에 다녀오셨네요! 그래서 다녀오신 소감은 어떠셨나요?". 아내와 나는 쭈뼛쭈뼛 서로의 눈치를 봤다. 그건 적어도 '내가 더 좋았어'라는 긍정의 말보단 '그냥 그랬어'정도의 약한 부정의 눈치였으리라. 이내 아내는 "그냥 그랬어요"라고 말했고 나는 "그냥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더라고요"라고 말하며 소감이라는 거창한 단어에 찬물을 끼얹기에 충분할 만큼 시시하고 심심한 답변을 내놓았다.

 

 상담사는 우리가 여행의 위치에 큰 흥미가 없었다고 판단했는지 질문의 형태를 바꿨다. "그럼 예산은 어느 정도 생각하시나요? 예산이 애매하다면 기간이라도 괜찮습니다." 이에 우리는 또 서로 눈을 마주친 후 이야기했다. "기간은 상관없어요. 어차피 백수라서 얼마나 가는지는 상관없습니다. 길게 가도 상관없으니 한 달 정도 갈 만한 곳도 있을까요?" 상담사는 '오...' 하는 놀라운 표정을 지으시며 그렇냐며 하지만 해외로 한 달을 가게 되면 비용이 만만치 않을 거라 이야기했고 우리는 가장 가볍게 갈 수 있는 곳에 대해서 물었다. "그럼 제주도를 가게 되면 비용이 얼마나 들까요?"라고 물었다.


  상담사는 표정이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해외를 묻지 않고 제주도를 물어보니 상담을 끝내고 싶었으리라 생각한다. 상담사는 우리에 대한 상담을 마치고 싶었는지 아니면 더 이상의 답을 내릴 수 없었던 건지 이렇게 답했다. "시간적 여유도 많으시고 해외에 대해서 크게 생각이 없으시다면 제주도를 편하게 다녀오시는 게 좋겠네요." 우리는 다시 한번 물었다. "비용은 어느 정도 나올까요?" 이 물음에 상담사는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비용은... 저희에게 그런 상품이 없어서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제주도 한 달 신혼여행은 다른 곳을 알아보셔야 할 것 같아요."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냥 '아...'스러운 표정만 지은채 한 동안 정적이 흘렀고 우리는 정적을 깼다. "네, 그럼 상담이 끝난 건가요?"라고 묻고 상담사는 그렇다며 우리의 허니문 상담은 재밌게 다녀오라는 말을 들으며 아무 소득 없이 막을 내렸다. 제주도라는 상품이 없는 걸 보니 요즘 대부분의 신혼여행지는 해외인가 보다. 뭔가 마음이 씁쓸했다.


  뭔가 해결 방안이 생길 줄 알았는데 잘 다녀오라는 말을 듣고 상담이 끝나버리니 괜히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그 느낌은 길을 잃은 느낌이기도 하지만 신혼여행은 해외를 나가서 호화롭게 보내야 한다는 그런 속박 밖으로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가이드의 말에 따라 강아지 산책하듯 움직이지 않아도 되며, 우리가 원하는 곳을 원하는 시간대에 원하는 경로로 우리 둘만의 차를 타고 움직일 수 있다는 큰 장점들이 느껴졌다. 다음 상담을 하러 가면서 아내에게 혼잣말로 할 만한 생각을 한마디 던졌다. "이러다가 정말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하겠는걸..?" 그랬더니 아내가 대답을 했다. "그러게, 뭐 어때, 난 좋아."


  나는 그냥저냥 구경하러 떠나는 여행에 대해서는 큰 흥미가 없다. 혹 여행을 간다면 배낭여행, 도보여행, 자전거 여행, 종주, 백패킹 등 뭔가 고통이 따라야 하며 내 체력과 내면의 밑바닥을 볼 수 있는 그런 여행을 선호한다. 그런 나에게 어떤 경치 좋은 곳에서 수영장이 딸려있는 풀빌라에서 고급스러운 척을 하며 '우리 호화로워요'라는 표정으로 사진을 찍어서 SNS에 업데이트하는 그런 여행은 정말이지 힘들다. 물론 아내의 입장은 다르다. 나는 그런 고통의 여행을 좋아한다면 아내는 위험하지 않아야 하며 돌발변수가 없어야 하며 체력적으로 무리가 없어야 한다. 또한 우리 둘 다 쇼핑에 대해서 큰 욕심이 없기 때문에-갖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에-쇼핑의 메카라는 그런 나라를 가도 흥미가 없다. 그런 우리에게 그런 한 달이라는 기간은 해외에서 아무런 영향을 받지 못할 게 분명하다-물론 각자 간다면 다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우리는 점점 더 제주도 한 달 살이로 마음이 옮겨졌고 아내는 이내 검색창에 "제주도 한 달 살이"나 "제주도 신혼여행"을 검색하기에 이르렀다.


  한 번씩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너무 거부감을 내뱉어서 아내가 가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던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면 마음이 미안해지고 다음에 무언가 선택을 할 때에 항상 아내에게 먼저 답을 말할 수 있도록 물어보게 된다.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한 효과는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물어보기는 먼저 물어보지만 그 뒤 대처가 화를 불렀다. 아내는 '왜 오빠는 생각을 먼저 말 안 해?' 혹은 '내가 말하면 오빠가 싫더라도 내가 말한 대로 할 거잖아'라는 말들이 돌아왔다. 그러면 나는 그 상황에 또 미안한 마음이 생긴다. 좋은 취지로 시도한 방법들이 다시 나에게 장애물로 다가올 때는 마음이 참 답답하다. 정도껏 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 정도껏의 기준은 정말 어느 정도 일까?


  어찌 됐든 우리의 신혼여행지 상담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채 그렇게 막을 내렸고, 웨딩 박람회에서 예물과 가전을 예약했고 한복과 양복은 조금 더 알아보기로 했다. 박람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은 아내와 나 둘 다 큰 말이 없었다. 하지만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대충이나마 짐작이 가능했으리라.


  '이제 결혼에 점점 가까워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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