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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정 Jun 08. 2024

삶의 이유

오늘 쓰는 이 글에, 제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존재하는 이유를 간략하게 담아보려고 합니다.





제가 인생에서 추구하고 있는 가치는 '자유, 사랑, 정의'입니다. 이 3대 가치를 위하여, 저는 오늘도 일을 하고, 밥을 먹고,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글을 씁니다. 제가 행동하는 근원적인 이유이자, 살아가기를 택하는 이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가요?'라고 물어보면, 당황합니다. 대부분 이러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눈이 떠졌으니 일어나고, 배가 고프니 밥을 먹고, 살아야 하니 돈을 벌어오는 식입니다.





사실, 이러한 '철학적인 사고'를 하지 않아도, 인생을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질'이 급격히 저하됩니다. 본인이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어떨 때 즐거운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없다면, 그저 요동치는 자신의 감정에 오늘 하루를 전부 내맡겨 버리고, 그러한 하루가 쌓여서 과거와 다를 바 없는 미래를 맞이하게 됩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생각을 하며 괴로울 때면, 매초 진행되었던 자신의 선택을 변호하기 위한 핑곗거리를 찾습니다. 과거에 겪었던 트라우마, 불우한 가정, 넉넉하지 않은 경제 형편 등이 수없이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입니다.





제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는,



감정의 장난에 놀아나지 않고 -무기력, 우울감, 부정적인 사고방식, 나태함, 분노, 슬픔 등- 제가 원하는 것을 위해 하루를 운영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매 순간의 선택을 '핑곗거리' 따위로 대체하지 않고, 언제나 당당하게 제가 내린 선택에 대한 이유를 댈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제가 하고 있는 모든 선택은, '자유, 사랑,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유, 사랑, 정의에 대해 논하기 전, 제가 이 단어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책을 읽지 않았음을 밝힙니다. 그저 주관적인 견해일 뿐입니다.




< 자유 >



“자유에는 그에 걸맞은 책임이 따른다.”





제가 좋아하는 문장입니다.




과거의 저는, 위 문장에 의아함을 느꼈습니다. '책임'이 잇따르는 자유는 자유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그 당시 제게 '책임'은 '속박'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책임'이 뒤따른다면, 마음대로 행동하는 데 제약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니, 위에 격언이 참언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가 곧 '자유'입니다. 이때, '마음대로' 하려면, 본인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본인 마음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책임 없는 자유는 곧,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자유를 실현한 주체가 책임을 회피해버리면, 주변 사람들 또는 미래의 본인이 책임에 대한 대가를 언젠가는 치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청결하고 깔끔한 방에서 생활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면, 그렇게 생활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받았다면, 당연히 주기적인 방 청소와 정리 정돈을 병행해야 할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 부자가 될 수 있는 자유를 허락받았다면, 당연히 부자가 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고, 공부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통제, 저축, 공부, 성장에 걸맞은 자질 함양 등도 필연적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본인이 좋아하는 사람과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받았다면, 당연히 상대에 대해 알아가고, 상대의 감정과 생각을 존중하며, 서로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자유에는, 그에 걸맞은 책임이 뒤따르며, 책임을 짊어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를 누릴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다소 나태하고 게으른 자아를 위한 선택을 일삼으며 '자유'를 외치고 있다면, 본인의 선택에 대해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인의 게으른 천성을 위한 '자유'에 대한 대가를 누가 책임지고 있는가?"





어질러진 방, 비위생적이고 정신없는 방에 대한 책임 -바퀴벌레가 기어다니고, 악취가 풀풀 나며, 정리 정돈이 되어있지 않아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됨, 이는 본인 방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집안 전체에도 악영향을 끼침-





이불 속에서 나오지 않고, 배달음식만을 주야장천 시켜 먹으며, 하루 종일 휴대폰만 붙잡고 하루를 보낸 선택에 대한 책임 -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이 지게 될 가능성이 높음, 금수저가 아닌 이상, 100프로 과거 본인 선택에 대한 후회를 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임. 심지어 저출산 고령화 사회로, 나중에 연금도 부족해질 마당에 돈을 저축해두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고 봐야 함-





버는 족족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며,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에 대한 책임 -위와 마찬가지로, 경제 개념이 박혀있지 않으면서, 자유를 외치고 순간적인 본능에 충실하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미래에 본인이 지게 되어 있음-





저는 제 삶에 '자유'를 원합니다.




현재 제가 누리고 있는 '자유-누군가의 간섭 없이, 모든 선택을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자유, 나의 시간을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자유, 신체적 또는 정신적인 자유 등'에도 마땅히 감사함을 표하지만, 그보다도 더 많은 자유를 원합니다.





1. 경제적 자유

돈을 많이 벌고 싶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좋은 차를 사고 맛있는 것을 먹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기도 하거니와 -부정하지 않습니다. 안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제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하여 속수무책으로 앉아 있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편찮으셔서 수술을 해야 할 때, 돈이 없어서 부모님의 고통을 방관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저는 치밀어 오르는 제 자신을 향한 분노를 참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돈이 없어서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시할 수 있는 선택지를 줄이고 싶지 않습니다. 저보다도, 제 사람들에게 더 좋은 삶을 살게 해주고 싶고 무엇보다도, 삶이 힘든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추고 싶습니다.





/





2. 정신적 자유

여기서 말하는 '정신적 자유'란, 내면의 결핍 또는 지식의 결핍으로 타인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곧 철저히 제 자신을 믿고 설 수 있을 정도의 내면의 성숙함 그리고, 지적인 풍요로움을 갖추고 싶다는 뜻입니다.




전문가에게 돈을 쥐여주고서, 제 일에 대한 권한을 넘기고 싶지 않습니다. 더불어, 제 삶에 대한 통제권을 넘기고 싶지도 않습니다. 전문가 만큼의 깊이는 아니더라도, 제 앞가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다방면의 지식을 적절히 흡수하고 싶습니다.





/





3. 신체적 자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저 또한 건강하고 싶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근육이 빠졌을 때 남들보다 일찍 지팡이를 들고 싶지 않고, 남들보다 일찍 병원에 누워있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제가 몸 관리를 얼마나 신경 써서 하든, 유전적 또는 우연적으로 얼마든지 불구가 될 수 있는 것이 인생이기에 몸 관리에 최선을 다하되, 마주하게 될 수 있는 '절망'에 대해서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내적인 성숙함 또한 갖출 것입니다.





위의 3대 자유를 위해서 저는 끊임없이 성찰하고, 학습하며, 행동하고, 운동도 할 것입니다.





< 사랑 >




'사랑'이 없다면, '자유'는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의 대상은 본인이 될 수도 있고, 타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더 풍요로운 삶, 더 행복한 삶, 더 평안한 삶을 바칠 대상이 없다면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본인이 아무리 돈이 많고, 건강하고, 아는 게 많다고 한들 그것들을 발현할 수 있는 대상이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한때는 '사랑'이라는 개념이 참 낯설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라니, 자신을 사랑하라니, 어느 맥락에나 이러한 표현을 썼을 때 오글거리고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압니다. '사랑'에 대한 표현은 맥락이 필요 없다는 것을요. 사랑은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허무주의'라는 이데올로기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 허무주의 또는 니힐리즘: 신, 구원, 진리로 대표되는 추구해야 할 절대적 가치 및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상 - 나무위키





시대가 발전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과학을 기반으로 한 사람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되짚어 보며 '종교'의 기원을 분석하고, 그를 토대로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어느덧 답을 내릴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한 것입니다. -종교의 기원을 개괄적으로 잘 설명한 책 '사피엔스' 추천합니다-





최근 들어 주변에 '무신론자'들이 많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면서도 신앙 활동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절대적인 신의 존재를 믿지 않음에도, 종교의 기능적인 측면을 보며 신앙 활동을 유지하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문명과 사회를 지탱해 주는 보편적인 신념 -평등사상, 인권, 뿌린 대로 거둔다, 마땅히 ~ 해야 한다 등-은 절대적인 존재가 부여한 당위적인 행동 양식이 아닌, 그저 인간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문화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인간이 만든 안정장치라는 것을 깨닫게 된 이후부터는, 우리가 당연하게 믿고 지켜야 왔던 신념들에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원래 세상은 평등하지 않은데, 왜 나는 약자의 편에 서야 하는가'




'부자들은 행복하지 않다고 하던데, 그런 것도 아니라면서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잖아'




'세상의 진리는 약육강식이야'




'나는 한평생 하나님을 위해 살아왔는데, 그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니,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인간의 만행으로 환경은 급속도로 오염되어 왔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왔어. 자연발생적 우연으로 똑같이 발을 내딛게 된 타종은 무참히 학살하고, 통제하며 그들의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우리가 이토록 편안해진 것인데, 그건 너무 잔인한 거 아닐까. 환경을 보호하고, 동물들의 멸종을 막으려면 인간은 없어져야만 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자멸이야' 등






인간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생물이기 때문에 욕구를 해소한다고 한 평생 잘 살 수 있는 개체가 아닙니다. 타종과 달리 인간은 본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위해 살아갑니다. 즉, '의미 부여'를 할 수 있어야만, 우울증에 걸리지 않고, 허무주의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본인의 존재 이유가, 자신이 생각했을 때 잔인하고, 비합리적이며, 납득이 안 될 때 '자살'할 수 있는 생물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런데 현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간은 아주 큰 난관에 봉착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탱해 준 '전통적인 신념'들이 와해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인간들의 편의를 위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고, 후세대의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의 의도대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많은 이들이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에 사로잡히고는 합니다.





저는 이 위험을 타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이자, 제가 살아가는 이유는 나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고, 환경을 사랑하고, 동물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제가 환경과 동물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기준은, 환경이 오염되고 파괴될 때, 동물들이 처참히 짓밟히고 자유를 박탈당할 때 심적인 고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의자가 부서지거나, 식물들이 뜯겨나갈 때 심적인 고통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물론 제가 애지중지하는 물건이면 다르겠지만요-





나, 타인, 환경, 동물




이 4가지 요인에게 적절한 관심을 배분하여,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제가 믿고 있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의미 없는 것이었더라도, 어차피 종국에는 '파멸'이 다가올 것이라도,




저는 현재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제 자신이 뿌듯함을 느끼기 위해, 제가 쓰다듬고 있는 강아지의 삶이, 제가 발 딛고 있는 환경이 조금은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존재할 수 있도록 돕는 모든 것들에 대한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 정의 >



* 정의 -국어사전

1.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자유와 정의와 진리

2. 바른 의의

3.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정의의 개념은 2번입니다. 사실 1번이나, 3번의 경우 <사랑>의 확장에서 실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아 물론,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이타적인 사랑이 커야만 합니다. '나'를 위한 이 아닌,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이 '정의'를 내리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이미 보편적으로 정의되어 있는 '단어'를 재해석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는 개념에 모두가 동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는, 이론적으로 알아도, 경험적으로 와닿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게 된 체험으로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 이런 게 사랑이구나. 사랑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사랑을 받고 사랑한다는 건 이런 거구나" 하는 깨달음.




이러한 깨달음을 얻고 나서, 저는 그 단어 또는 개념에 대해서 재해석합니다. 사랑이라는 건 무엇인지. 어떨 때 사랑받는다고 느끼는지, 사랑을 실현하려면 어떠한 사고방식과 행동을 해야 하는지 등.





그렇게 보편적인 단어를, 주관적으로 해석했을 때야 비로소,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친구에 대하여, 경제적 자유에 대하여, 삶의 가치에 대하여, 가족들 간에 마땅히 이루어져할 상호 교류에 대하여 등 광범위 한 개념, 현상,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하고 혼자만의 정의를 내리는 과정을 통해 한층 더 성장함과 더불어 저만의 주관적인 세계관을 확장합니다.





본인이 주체적으로 어떠한 개념이나 현상에 대해 정의를 내리지 않고, 남들의 말에 쉽게 동화되어 버리는 사람의 경우, 본인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넘겨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지 못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본인의 사고방식이 꽤나 얄팍하다는 반증입니다.





어떠한 정보를 입수했을 때 그 정보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가를 따져보는 과정 없이 바로 흡수해버리면, 넘쳐나는 정보화시대에서 갈피를 잃고 정체되어버리기 십상입니다. 그렇기에, 아주 적은 단서와 정보를 가지고도, 심사숙고하는 습관은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이렇게 제가 추구하는 인생의 가치는 자유, 사랑, 정의입니다.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인생, 보다 후회 없는 삶이 될 수 있도록 함께 힘낼 수 있다면, 오늘 보다 더 나은 내일이, 더 밝은 미래가 다가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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