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의 본질
사람들이 내게 “그렇게 살면 재미있냐?”라고 묻는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묻는다. “그렇게 살면 행복한가요?”
재미라는 것은 일종의 외부 자극이라고 본다. 재미는 곧 흥미가 간다라는 것이고, 흥미가 간다는 것은 곧 신경이 외부로 분산되었다는 뜻이니까. 나의 감각에, 나의 생각에, 나의 감정에 집중해야 할 신경들이 외부에 분산되어 버리면, 자아를 감당하지 못하여 고통을 느끼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 하다고 착각한다.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어서,
맛있는 것을 먹어서,
신나는 노래와 분위기에 온몸을 내맡겨서,
퇴근하고 소소하게 술 한 잔을 기울일 수 있어서.
그것이 곧 재미이자, 행복이라면 행복이라는 것은 참 간사하고 얄팍한 것일 테다. 조건을 건 행복이라니. 매 순간 조건을 충족할 수는 없지 않은가. 외부 자극을 통해 얻는 행복은, 자신을 기만하는 착각 행위이며 잠깐 도파민을 분비시켜주는 일종의 오락과도 같이 여겨진다.
나를 아주 조금 아는 사람들은, 나의 정신 건강을 걱정한다. 친구도 만나지 않고 매일 카페를 가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나를 보며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는 아웃사이더”, 또는 “관계에서 얻는 재미를 모르는 꽉 막힌 애”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듯하다.
사실 과거에는 그러했다. 나는 친구들과의 자리를 편안하게 즐기지 못했고, 대화 주제 -연예인, 소비, 뒷담 등-에 공감하지도 못했으며 마땅히 내가 좋아하는 친구도 없었으니까. 친구들과 함께해야만 하는 자리는, 간당간당하게 줄 위를 건너가는 것만 같은 위태로운 감정만을 남겼다.
차라리 외로워도 혼자 있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중, 고등학교 때도 친구들이 떠들고 몰래 술을 마시고 사고를 칠 때 나는 뒤에서 운동과 책으로 도피했다. 도서관은 학교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고, 운동장은 자기효능감을 일시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었다.
과거의 나는 관계를 필요로 했다. 나는 자아를 직시하지 못했고, 나의 필요를 충족하고 감정을 수용하는 법을 몰랐다. 그래서 외부 관계에 의존하고 싶었다. 외부 자극으로 도피하고 싶었다. 잠시 나에 대한 감각을 지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오늘 하루를 충분히 잘 견뎌낸 것이었다. 모든 외부 자극이 차단되는 순간을 가장 두려워했다. 침묵, 아무런 일정이 없는 하루, 지겨운 방학 기간, 짧으면서도 긴 주말 등이 그러했다.
나는 그런 자투리 시간조차도 자극을 통해 나와의 대면을 적극적으로 피하고자 애썼다. 주말에는 쉬지 않고 알바를 갔다. 평일에는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인 후에 저녁이면 남동생을 데리고 운동을 하러 나갔다. 방학 기간이면 집에 절대 틀어박혀 있는 날 따위는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바다와 들을 돌아다녔고 조금 커서 엄마가 스마트폰을 쥐여주었을 때는, 페이스북 화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10대는 흘러갔다.
그러다가 20대 초반에 어느 시점에서 깨달았다. 나는 욕심이 많은 편이었고, 나의 기대를 충족해 줄 수 있는 ‘타인’은 존재하지 않다는걸. 타인에게 기대를 걸어서는 안되었다. 나의 외로움을 채워주면서, 경제적으로도 힘이 있으면서, 내적으로도 성숙한 타인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엉망진창인 상태로 관계에 의존하려고 하니, 당연히 내 주변에는 엉망진창인 사람들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마이너스’와 ‘마이너스’가 모여서 ‘플러스’가 되지는 않는다. “더 큰 마이너스”가 될 뿐이다.
나는 멋있는 사람과 교제하고 싶었다. 나는 더 멋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나는 나라는 사람이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나는 우리 가족이 부유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우선 나부터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더 이상 외부 자극에 의존해서는 안 되었다. 20년이 넘도록 회피해왔던 내부 자극을, 이제서야 직시하기 시작했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그토록이나 괴로운 이유를, 숨이 턱턱 막혀오는 기분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기력에 빠져 침대 밖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규명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왜 힘이 드는가”
“나는 왜 울고 있는가”
“나는 정말, 객관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것이 맞는가”
남들이 보기에 혼자 있는 시간을 아주 잘 보내고 있는 나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100% 활용할 줄 아는 사람들은 장담컨대 내적인 성숙도가 상당히 높은 사람일 것이다. 이미 자신의 자아를 직시하고 수용하고 필요를 적절히 충족해 주며 본인의 목적만을 추구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쉽게 얻어낼 수 없다.
나는 꽤 독립적인 편이다.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애정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외로움에 취약한 편도 아니다. 그럼에도 인간이라는 종은 외로움을 느낌으로써 공동체에 소속될 수 있도록 진화한 듯하다. 내 성향상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타지 않음에도, 외로움에서 비롯된 ‘불안’이라는 감정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혼자 나이 들어 죽을 것만 같은 생각에, 결혼식장에 아무도 안 오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미래에 내가 너무 별 볼일 없어서 창피한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밤 잠을 설쳤다. 주기적으로 밤마다 울었다. 미친 듯이 일만 하고 스스로를 질책하고 비난하기 바쁜 시절이었다. 그 당시 나는 부모님의 지원 없이 -원래 용돈을 받지 않았다- 집을 구했고, 1000만 원 이상을 모았으며 대학교 생활과 유도를 병행하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가학적이었다. 나는 내 몸에 상처가 나는 것에 대해, 내 마음이 병들어 가는 것에 대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불분명한 나의 암담한 미래와 나로 하여금 불편을 느낄 수 있다는 타인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타인이 나의 몸에 실질적인 피해를 가해도, 나의 마음을 가지고 놀아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니 한참 뒤늦게 과거의 고통으로 몸부림친 이유는, 그 당시 나의 고통을 감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나는 나 자신으로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나 자신을 대하고 있는 태도를 관찰하고, 분석하고, 교정하는 꽤 긴 시간을 보냈다. 평소에 습관처럼 반복하고 있는 생각들에 어떤 평가도 붙이지 않고 그저 ‘관찰’ 했다. 내가 어떤 것 때문에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지, 무엇이 원인인지를 분석하고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동안 남동생이 우울증에 걸려 남동생 본인과 부모님이 힘들어할 때, 나는 우울증 관련 책만 3권을 읽었고 새벽마다 전화가 오는 남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부모님의 노후와 건강이 걱정되어 밤잠을 설쳤을 때는, 일단 나부터 부자가 되는 게 먼저라는 생각에 경제 관련 책을 읽었다.
과거 부모님과 주위 사람들이 내게 주었던 고통이 부정적 감정의 원인이었다면, 그로 인해 현재도 괴롭다면 글을 썼다. 그때 상황이 어떠했고, 나는 무슨 감정이었고, 지금 왜 힘든지에 대해서. 그리고 내게 고통을 안겨 준 상대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신기하게도, 고통의 주체를 ‘이해’하면 고통의 많은 부분이 상쇄된다.
나 자신에 대해 숙고한 기간은 사실 2년도 채 안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내적인 평화를 얻어내었고, 그로 인해 내가 원하는 방향을 향해, 목적을 향해 아무런 방해도 없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상태가 심리학에서 말하는 ‘반 엔트로피’ 상태이다.
내가 정의하는 행복은 결코 ‘재미’가 아니다. 재미는 외부 자극을 통해 내부 자극을 잊게 만들어주는 일종의 ‘진통제’다. 현실에 존재하는 것을, 궁극적으로 나로서 존재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는 지금 이 순간 고통을 지움으로써 행복 상태를 체험할 수는 있게 하지만 고통의 존재를 소멸시키지는 않는다. 본질적인 치료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내게서 고통을 지웠다. 요즘의 나는 오로지 현실에 존재한다. 모든 감각이 열려있음이 느껴진다. 잡생각에 사로잡히지도 않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투명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타인의 행동에 담긴 의지와 감정들을 알아차리는 데도 꽤나 예리해졌다.
본인에 대한 고찰의 시간을 갖고 본인을 수용하고, 본인이 원하는 것을 알게 될 때 인생의 새로운 길이 열린다. 더 이상 외부 자극이 필요하지 않다. 과거에는 외부 자극으로 인해 내적인 평온함을 아주 잠깐 유지할 수 있었다면, 현재는 모든 외부 자극이 그저 소란과 혼돈일 뿐이다. 시간을 잡아먹는 블랙홀일 뿐이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무런 재미도 없다.
나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 커피를 홀짝일 정도로 한가로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 시간에 한 쪽의 책을 더 읽기를 바라고, 지금 떠오른 생각을 글로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도배된다. 차라리 혼자 여유롭게 산책을 하며 현재 멀쩡한 나의 안구와 튼튼한 두 다리와, 열려있는 나의 청각으로 세상이 내게 전달하는 모든 느낌에 집중하고 싶다. 차라리 그 시간에, 침대에 누워 조금 더 많은 에너지를 비축하거나, 최근 관심을 갖게 된 요리에 집중하고 싶다.
나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직장 동료들과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는 회식자리와 심심해서 던져 본 “뭐해?”라는 말을 극도로 싫어한다. 보통 이렇게 가볍게 이어진 자리에는 본인의 외로움을 해소하고 결핍을 충족하는 것이 자리의 목적이 되기 때문에 상대에 대한 배려와 관심은 결여되어 있다. 실제로 내게 가볍게 “뭐해?” 묻는 사람 중 내 기준으로 정상인 사람은 없었다. 나는 가벼운 사람을 안 좋아한다.
간혹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어린 나이에 친구도 안 만나고 추억도 안 쌓고, 그렇게 살면 재미있어?”라는 타인의 말을 들으면 즐겁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자본주의 세상에 살고 있으니, 내가 이길 확률이 더 높아질 거라는 생각에.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너무 행복하다. 관계에 의존하지 않고도 나는 나 자신을 위하고 돌보는 방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신문을 읽고 아침 6시에 출근하여 오후 12시에 퇴근하면서 월 250 이상을 벌고, 일 끝나면 카페에 와서 하루 종일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내가 배우고 싶은 것 -컴퓨터 활용, 영어, 경제 공부 등-을 배우고, 간간이 산책을 나가 모든 감각을 열고서 세상을 느끼고, 가만히 있어도 연락 오는 사람들과 내가 사랑하고 나를 아껴주는 가족들의 관심을 받는 것만으로도 이미 나의 삶은 완벽하다. - 하루 한 끼를 먹으면서, 그 한 끼도 최고의 요리를 만들기 위해 식재료를 알아보고, 장을 봐오고 혼자 요리를 도전하고 실패하면서 나의 삶은 더욱 완벽해졌다. 이 과정 자체가 내게는 행복이다.-
이러한 내 삶에 ‘재미’가 굳이 필요한가. 내가 재미를 느끼는 부류는 ‘배움’과 ‘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