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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정 Jun 16. 2024

인간의 존재가치는 효용성에서 비롯하는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잔인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받아 온 교육과 문화의 영향으로, 현재 우리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세계관은, ​“효용성-쓸모 있는가”의 여부가 인간의 존재가치를 결정짓는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외모가 뛰어난 사람, ​능력이 출중한 사람, ​재화가 풍부한 사람,​유머러스하고 인맥이 넓은 사람,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을 ​​동경하고, 존경하며, 우러러보는 동시에 ‘효용성’의 특정 영역을 단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한 사람을 보면 비난하고 배척합니다.

​​타인이 외모를 가꾸고, 지식을 섭렵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사회성을 높이는 등과 같은 노력을 할 때, 그들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여기고 ‘그들이 받는 비난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사변으로는, 그들을 향한 비난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비난의 측면으로 누군가의 인지 영역을 확장시켜주고, 더욱 탁월한 이상향을 위해 자극을 주는 ‘촉진제‘가 될 수 있지만, 그러한 긍정적 측면보다는 대게 누군가의 인생을 끌어내릴 요인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더욱 많습니다.

열등감과 수치심을 안겨주고, 사회에서 부정당한 경험으로 본인 또한 자신을 부정하게 됩니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세계관에 적합하지 않을 때, 그들은 방 밖으로 발을 내딛지 못하고 본인의 삶에서 타락하는 것에서 나아가 주변 사람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요인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세계관이 옳지 않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들이 노력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주관적인 기준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입니다.

수많은 인간들 중 같은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성향과 기질, ​환경, ​학습의 범위, ​주변 사람들, ​무의식에 자리 잡은 신념과 가치관, ​지능, ​신체의 발달 정도, ​관심사 ​​​등과 같이 모든 것이 다른 개인들에게 ‘같은 세계관’을 들이밀게 되었을 때 다양한 오류가 발생됩니다.

우선,  그들은 마땅히 ‘이런 부분에서 탁월해야 한다.’라는 보편적인 인식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노출되어 온 환경과 학습의 범위에 따라서 그들에게는 ‘이상’이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둘째, 지능과 신체의 발달 정도-신체적 결함에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이상’에 비교적 접근하기 쉬울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어떤 난제보다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셋째, 환경적인 요인-경제력, 부양가족 등 을 뛰어넘을 정도로 내면의 힘이 뛰어나지 않아서 환경에 굴복하고 정체되어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

다양한 변수가 작용하면서 형성된 개인에 대하여 ‘공통된 이상’을 제시하고 그 이상에 부합하지 않을 때 ‘노력을 하지 않았다’며 비난하기에는, 그들의 노력의 정도를 아주 단편적인 모습만을 보고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

‘인간의 존재가치는 효용성에서 비롯한다.’라는 공통적인 세계관에 대하여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네”​​

”걸리적거려. 있으나 마나인데 왜 계속 나오는 거야”​​​​

‘효용성’ 즉, 나라는 사람이 세상에 어떻게 도움이 되고 있는가는 우리의 존재 이유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

내가 살아서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일을 하며 목숨을 연명해나가는 행위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특별해서가 아닌, 누군가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인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입니다.

내가 죽으면 부모님이 속상해하시니까, ​내가 출근하지 않으면 회사가 곤란하니까, ​내가 공부하지 않으면 가족이 걱정하니까

​와 같이,

​​

누군가는 자신의 존재 이유와 행동 이유를 타인에게서 찾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타인을 통해 확인하려는 사람은, 늘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곧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이기 때문에,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은 본인을 위한 삶이 아닌,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갑니다.

​​​​​

그들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인간의 존재가치는 효용성에서 비롯한다’라는 명제를 전제로 깔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타인에게, 세상에 기여를 해야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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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언제부터 ‘쓸모 있는가’의 여부를 ’존재 이유’로 해석하게 되었을까요? 잔혹하기만 한 이 명제는 고도화된 산업화와 빠른 발전으로 인해서 ‘생산성’만을 맹목적으로 좇게 된 배경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더 편안한 삶을 위해서, ​더 빠른 경제 흐름을 위해서, ​더 혁명적이고 위대한 인간 문명의 발전을 위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지만, 현 세대에 적용되고 있는 미의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서,

인간은 늘 더 빠른 것을, 더 편한 것을, 더 많은 것을, 더 예쁜 것을, 더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것을 좇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창조해 내는 수많은 ‘상품’에서 더 나아가 ‘인간’ 그 자체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생산성을 높이지 못하는 인간은 도태된 인간이며, ​​현 세대가 추구하는 ‘이상향’에 부합하지 못하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쓸모없다’라는 낙인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없애버리기 때문에 낙인찍힌 사람들은 본인만의 삶을 개척해나가려는 일련의 시도를 포기해버립니다.

그저 숨이 쉬어지면 쉬는 것이고, ​​숨 쉬는 것마저 힘들게 느껴지면 목숨마저 포기해버립니다.

​​​​

그들에게는 ‘우울증’, ‘신경쇠약’, ‘히키코모리’, ‘사회 부적응자’, ‘백수’와 같은 부정적인 꼬리표가 여럿 붙지만, 그들에게 붙은 꼬리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그들이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

우리는 정말 ‘쓸모가 있어야만’,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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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가끔, ​​어지러운 도로 위에 힘들게 피어진 꽃 한 송이에 감탄하기도 합니다.

“이런 아스팔트 사이에서 어떻게 피어났을까?” ​​​​하며, 꽃 한 송이의 부단한 노력과 끈질긴 생명력, 그리고 아름다움에 감탄할 때가 있습니다.

​​​

때로는 새파란 하늘 위에 몽글몽글한 하얀 구름이, ​​하늘하늘 불어오는 바람에 제 몸 싣고 실려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기분 좋게 웃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름다운 하늘과, 하염없이 기분 좋게 만들어지는 구름 따위에 감사하면서요.

​​​​

때로는, 생각 정리를 하기 위해 산책하러 나와서 맡게 된 상쾌한 밤공기와, ​​​은은한 노란 햇빛을 흩뿌리며 기울어진 해를 멍하니 바라볼 때, ​​​험난하고도 고난 했던 일상을 잠시 잊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눈을 감기도 합니다.

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맞이할 때, ​​​자연이 내게 어떻게 도움 되고 있는가를 따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맞이합니다. ​​​​​우리가 자연을 보며 자연의 효용성을 따지고, 도움 되지 않는 자연의 일부는 배척하지 않듯이, ​​​인간이 인간을 바라볼 때도 있는 그대로를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

자연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우리에게 고양된 감정을 선물하듯이, ​​인간도 그 자체로 아름답고, 경이롭습니다​​​​​.어떤 형태를 갖고, 어떤 냄새를 가졌으며, 어떤 행동을 취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선이면서, 동시에 악이기에 ​​​​아무런 평가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는 태도를 가질 수 있다면, 조금 더 안정되고 온화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맹목적으로 좇고 있는 생산성이, 종래에 자연의 파멸과 다양성의 축소, 인간 세계에 폭력과 배척을 야기한다면 현재 우리가 떠받들고 있는 ‘이상향’이 본질적으로 인간에게 어떻게 도움 되고 있는가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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