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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옥 Jun 16. 2023

명문대 출신, 최저시급

UC 버클리 출신 교수, 우울증, 호텔 비스트로

"Did you go to school? 너 학교는 다녔니?"

 

스타벅스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블레어(Blaire)가 물었다. 이력서에 학력위조를 했는데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뭐라고 답해야 할지 순간 망설였다.


레이나: "응, 버팔로에서 학교 다녔어."

블레어: "대학... 다녔어?"

레이나: "응"

블레어: "혹시 SUNY Buffalo 다녔어?"

레이나: "어, UB졸업했어, 근데 너 수니 버팔로를 알아?"


이방인

내가 살고 있는 미네소타의 작은 도시에 사는 대다수의 로컬 사람들은 뉴욕주립대(Th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라고 풀어 말하지 않으면 수니 버팔로를 알지 못한다.

이 동네는 명문대 진학률 또한 낮다. 대도시 학생들처럼 공부를 치열하게 시키지 않는 경향도 있지만 공부를 잘해도 굳이 큰 대학으로 가지 않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고등학교 4년 내내 전 과목 A를 받고 장학금 및 수상경력도 많은 졸업생 소식이 얼마 전 지역신문에 실렸다. 동네 작은 대학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고 가기로 결정해 지역의 “자랑인”으로 화제가 된 것이다. 인서울, 스카이에 목숨 거는 한국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문화이다. 이런 분위기의 동네에서 버팔로라는 도시 이름 하나 만으로 수니 버팔로라며 반기던 블레어는 한국인인 나보다 더욱 이방인 같게만 느껴졌다.


눈을 크게 뜬 블레어가 흥분한 듯 반가워하며 답했다.


블레어: "그럼! SUNY Buffalo 당연히 알지! 나도 사실 UC졸업했거든."

 

역시 캘리포니아에서 왔구나. 인구 5만 5천 정도밖에 안 되는 이 작은 도시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을까? 여기가 고향이어서 졸업 후 돌아온 걸까?


레이나: “고향이 여기야? “

블레어: "아니."

레이나: "캘리포니아에서 어떻게 하다 이동네로 온 거야? 혹시 풀타임 잡?"

블레어: "강의 나가. 주말 오전에는 여기서 일하고, 오후에는 헬스장에서 일해."

레이나: "너 직업이 세 개씩이나 되는구나!"

블레어: "사실 네 개야. 밴드도 하거든. 너는? 메인 직업이 뭐야?"

레이나: "나도 대학에서 가르쳐. “


강사인지 교수인지는 알아서 해석하겠지. 오픈준비를 하느라 우리의 첫 대화는 일단 여기서 마무리가 되었다.


영어와 신분

블레어는 왜 그 학벌로 호텔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는 거지? 왜 최저 시급을 받아가며 호텔에서, 헬스장에서 주말에 까지 일을 하는지? 혹시 파이어족? 그럼 은퇴를 목표로 하는 기준은 무엇일지? 대도시로 갈 수 있는 스펙으로 왜 이 작은 동네까지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

블레어에 대해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누가 봐도 깔끔하고 호감 가는 외모의 백인, 영어는 당연히 능통하고, 명문대 학사 석사 출신에, 성격도 좋고, 일하거나 손님을 대하는 센스도 넘쳐나는 고급인력이다. 잠시 나눈 대화에서도 어휘력이 남다르게 교양스러웠다.


모든 한국사람이 한국어를 잘하는 게 아니듯, 미국사람이라고 영어를 다 잘하는 게 아니다. 다양한 인종이 정착한 미국에서는 내가 하는 말이 나의 신분을 결정할 만큼 영어도 다양하다.

지역 혹은 인종별 민족 집단별로 발음이나 억양, 관용어구가 조금씩 다르다. 블레어의 영어는 내가 만난 로컬 사람들과는 확실히 다름을 느끼게 한다.


마감

비스트로를 마감할 때쯤 블레어가 식세기에서 방금 꺼내온 따끈따끈한 스푼과 포크를 테에블에 올려두었다.


블레어: "레이나, 여기 앉아. 실버웨어 준비하는 거 알려줄게."


종아리가 아팠던 참에 앉아서 하는 일이라니 좋아라 덥석 앉았다. 스푼과 포크를 건조해 하얀 냅킨에 예쁘게 둘둘 말아 스티커를 붙여 고정시키는 작업이다. 블레어는 정성스레 순서를 설명해 주며 단계별로 따라 하기를 시켰다. 재밌고 쉬운 단순작업은 잡념을 없애기에 딱 좋다. 수다 떨면서 하기에도 좋다. 블레어가 먼저 물어봤다.


블레어: "오늘 일 어땠어? 할 만 해?"

레이나: "응, 새로운 걸 시도해보고 싶었어."

블레어: "무엇이 새로운 일을 도전하게 만든 거니?"

레이나: "우울증."


우울증

이제는 감추지 않는다. 우울증이 내 잘못은 아니니까. 나의 감정을 꽁꽁 끌어안고 숨길 필요는 없다.


블레어: "나도 우울증이 있어. 나와서 일을 하는 건 좋은 전략이야. 같이 일하게 돼서 정말 반가워."


최근에 애인과 헤어지고 우울증이 심해졌다 한다. 손님을 대할 때 매우 밝고 친절한데 잠시라도 혼자 있는 게 힘들어 주중 주말 쉴 새 없이 일을 하러 나온다. 블레어를 백번 이해한다. 그는 우울증과 함께 헤어진 애인을 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거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에게 운동을 하라고들 한다. 운동이 확실히 좋긴 하나, 가장 힘든 게 운동이기도 하다. 우울증이 오면 스스로 운동을 하기란 하기 싫은 공부를 하는 것보다 백배 더 힘들다. 억지로 누군가가 신발을 신기고 엉덩이를 끌어내지 않으면 스스로의 힘으로 운동을 하라고 말하는 의사의 말은 가장 무책임한 처방전이다. 온몸이 축 처져서 잠만 자고 싶고 그 무엇도 동기부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한 우울증을 갖고 사는 전문직의 사람들도 동료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일을 할 때만큼은 우울증 환자로 보이지 않는다. 오늘 비스트로에서 일하던 블레어의 모습에서도 전혀 우울함을 느끼지 못했듯이, 나 또한 누가 봐도 멀쩡하게 교수생활을 잘하고 있다.   


Hospitality

대접, 접대라는 뜻이다.


레이나: "너라면 아르바이트라도 많은 선택을 할 수 있을 텐데, 호텔에서 일할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블레어: "Hospitality! 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손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즐거워."


마감준비를 하며 오전 내내 담아두었던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우리에겐 참 많은 공통점들이 있다.


- 남을 대접함으로 기쁨을 얻는다.

- 단순작업으로 마음을 비우고 성취감을 느낀다.

- 혼자 있기보다는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는 주말 일이 즐겁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기는 힘들어도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해야 하는 주말 아르바이트는 여러 면에서 블레어와 나에게 매우 좋은 우울증 치료법이다.


- 본업과 관련이 없는 사람을 만나 부담 없이 소통을 하면 스트레스 해소가 된다.

- 교수가 아르바이트한다는 게 엉뚱하게 보일 수 도 있지만, 새로운 일을 시도해 보는 게 너무나도 의미 있다.

- 서비스를 제공하면 자존감이 높아진다.

- 최저임금이라도 내가 즐기는 일을 하며 돈도 번다.


명문대 졸업장은 하기 싫은 일이라도 돈을 벌기 위해 해야 할 때 쓰는 것이다. 내 학벌을 서랍 속에 넣어두면 최저 시급 아르바이트로 더 즐거운 일을 할 수도 있다. 명문대 졸업장 만으로 충족되지 않는 공허함이 있다면 돈을 떠나 내가 정말 즐길 수 있는 일을 찾아 도전해 보는 것은 멋진 일이다.


* 이 글은 <나에게 솔직해질 용기>에 담긴 에세이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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