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성옥 Jul 31. 2023

팁 없으면 맥주라도

교수든 하우스키퍼든 그냥 공짜는 좋은 거야

“오 대박이야."

“팁 많이 나왔어?”

“아니, 그거보다 큰 거.”

캔맥주

우리는 바닥에 꿇어앉아 손님이 냉장고에 남기고 간 맥주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일하는 중이라 차마 마실 수 없음이 아쉬울 뿐이었다.


교수라며

“레이나, 맥주 사 마실 돈 없어? 왜 이렇게 좋아해?”

“야, 이 맥주를 돈으로 환산해 봐. 쩨쩨한 $5 짜리 팁보다 차라리 낫지.”

“하긴, 팁을 안 남길 거면 이런 거라도 놓고 가야 우리가 청소할 맛이 나지.”


교수 10년 차에 들어서는 지금도  강의실 문을 열기 전 항상 긴장이 된다. 크게 한번 숨을 들이켜고 강의실에 들어서면서 학생들을 살핀다. 학생들의 눈빛을 보면 오늘 강의가 어떨지 대충 짐작이 간다.


호텔에서 청소할 때는 방문을 열면서 본능적으로 두 가지를 먼저 확인하게 된다.

팁이 남겨져 있는지,

손님이 냉장고에 뭐라도 남기고 갔는지.

이 두 가지는 청소에 즐거움을 더해준다.


행복이 별거냐

가장 반가운 건 역시 현금이지만

그다음으로 고마운 건 시원한 물이다.

청소하다가 냉장고에서 찾는 시원한 물은 마치 사막을 헤매다 발견하는 오아시스와도 같다.

에너지바 같은 간식거리로 청소하다 떨어진 당을 충전할 때는 정말 세상을 다 갖은것 마냥 행복하다.


행복이 별거냐, 배고플 때 배를 채우고 갈증 날 때 목을 축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한데 말이다.


생수와 맥주

물론 청소하러 갈 때는 늘 물을 챙겨 다니긴 한다. 손님이 냉장고에 남기고 가는 시원한 생수는 뚜껑을 따는 소리만 들어도 갈증이 반은 가시는 듯 기분이 좋다. 비상으로 락커에 쟁여두었다가 마시기에도 좋다.


나는 생수를 사고 맥주를 사 마실 돈이 있다. 특히 코스트코 같은 대형 할인마트에서는 맥주 가격도 매우 착하다. 놀랍게도 한국에서 맥주를 가장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는 피엑스보다 저렴하다.

다만 내 돈으로 맥주를 사서 마실 정도로 맥주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같이 마실 사람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이지 싶다.


공짜

그래도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손님이 놓고 간 맥주는 그렇게 꿀맛일 수가 없다.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이레 이렇게 손님이 남기고 간 맥주를 다람쥐 도톨이 모으듯 부지런히 옮겨 날랐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다양한 종류의 맥주가 있다.


잔디 깎고 온몸이 땀과 풀로 범벅이 되면 아무리 함께 마실 사람이 없어도 맥주 한 캔 정도는 벌컥벌컥 넘어간다. 공짜라서 더더욱 맛있다.


기분에 띠라 골라 마셔본다. 내 돈을 들이지 않고 여러 종류의 맥주를 맛볼 수 있음이 얼마나 짜릿한지 모른다. 이 또한 호텔에서 일하는 짭짤한 즐거움이다.


공짜효과 (Zero Price Effect)

인간에겐 공짜효과 심리가 있다. 공짜 앞에서는 기분이 좋아지면서 자연스레 판단력이 흐려지는 효과이다. 마치 무료배송 혜택을 받기 위해 계획에 없었던 물품들을 쇼핑카트에 채우듯이 말이다.


호텔에서 일하다 보면 공짜로 얻는 게 꽤 있다. 직원할인, 스타벅스 커피, 한 달간 찾아가지 않아서 폐기처분하는 분실물들, 오늘같이 냉장고 안에 남겨진 술과 개봉하지 않은 간식거리 등.

호텔 냉장고 안에 남겨진 먹거리들

“호텔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면 이렇게 공짜로 떨어지는 재미도 없어지겠지? “


나도 나약한 인간인지라 공짜 맥주 앞에서 기분이 좋아지고 호텔아르바이트를 그만두면 아쉬울 거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박사학위까지 받은 교수도 공짜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학회장에 가면 형광펜이나 볼펜을 주는 부스(booth)에는 사람들이 몰려있고 늘 인기가 많다. 이른 아침 세션에 더 많은 참석자를 유도하려고 커피와 머핀이나 베이글 같은 아침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 공짜 아침 프로모션은 확실히 효과가 있다. 억대 연봉을 받는 교수, 장학금으로 연명해 가는 박사생 할 것 없이 이 공짜효과는 잘도 먹힌다.


오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 두 손이 무거웠다. 집에 도착하여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내리는데 기분이 묘했다.

이방 저 방 돌아다니며 수박 서리라도 한 것 마냥 짜릿하기도 하고,

마치 먹잇감을 사냥해서 새끼에게 물어다 주는 듯 한 내 모습이 암사자라도 된 듯해서 뿌듯하기도 했고,

교수라는 사람이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는데 청소부 유니폼 차림에다 양손에는 호텔 로고가 찍힌 비닐봉지(laundry bag)에 손님이 남기고 간 음식을 바리바리 싸 온 내 모습이 너무 알뜰한가 싶어 웃기기도 했다.


뭔지 모를 이 기분이 딱 한 가지로 정의 내려지지 않는 상태로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씩 웃음이 나왔다.


"아, 맞아. 이건 그냥 공짜라서 좋은 거야!"


오늘

시급 $17 받으며 5시간 동안 방청소를 했다: $17x5=$85

손님이 놓고 간 팁: $24.78 (동전은 소파 밑에서 주운 것)

방에 남겨진 (개봉하지 않은) 맥주와 음식물들: 약 $80

셰프가 몰래 만들어준 브랙퍼스트 샌드위치와 스타벅스 커피: 약 $35

공짜로 인한 기분전환: 화폐가치로 환산할 수 없음


교수든 하우스키퍼든 우린 모두 공짜라면 기분이 좋아지는 그저 본능에 충실한 인간들이다.

이전 17화 명문대 출신, 최저시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