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매니저의 리더십은 그냥 생긴 게 아니다
"당장, 매니저를 불러줘요."
진상
손님이 씩씩거리며 프런트에서 매니저를 찾았다. 핫 텁(hot tub)이 지저분해서 기분이 나쁘단다. 구체적으로는 제트스파의 공기가 나오는 구멍이 깨끗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억지
구멍 안이 찝찝해서 스파를 못한다는 불평은 누가 들어도 의도적으로 컴플레인을 하는 억지이다. 청소할 때 쓰는 화학성분이 얼마나 강한지 박박 문지르며 힘들게 닦지 않아도 웬만하면 새 욕조처럼 반뜩반뜩해진다. 그리고 슈퍼바이저가 최종적으로 객실점검을 한 후에 손님을 받기 때문에 불평을 할 정도로 구멍이 지저분할 리가 없다.
공감
매니저는 태연하게 "묻지 마 사과"를 했다.
“불편하셨다니 죄송합니다. 저 같아도 구역질 나서 배쓰 하기 싫었을 거예요.”
브리아나(Briana)의 사과는 담달랐다. 누구나가 똑같이 말하는 “죄송합니다”라는 상투적인 멘트에서 그치지 않았다. “저 같아도” 라며 공감을 표현했다.
손님을 대하는 매니저 입에서 나오기엔 살짝 격이 떨어질 법한 “구역질 (disgusting)”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손님의 화를 달랬다. 구역질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그 진상손님이 쓰고팠던 단어였을 것이다. 브리아나는 손님의 마을을 빨리 파악하고 그 격이 떨어지는 단어를 자신의 입으로 대신 말해줌으로 손님의 입에서 더 이상 컴플레인이 나오지 않게 한 것이다.
매니저의 재량
그리고 즉시 파격적인 호의를 베풀었다. 숙박비 50%를 환불해 주고 조식권 두 장을 주었다. 매니저의 재량이란 이렇게 파워풀한 것이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씩씩거리며 로비를 뒤집을 것 만 같았던 손님이 순식간에 순한 양으로 돌변했다. 되려 매니저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하였다. 스파는 찝찝하지만 다른 건 완벽하다며 최고의 호텔이라고 극찬까지 하며 객실로 돌아갔다.
진상 손님의 입을 막는 법
손님이 사라지고 브리아나에게 물어봤다.
“브리아나, 누가 봐도 억지인데 그렇게까지 쉽게 줘야만 했어?"
“그 미친년 입을 틀어막고 싶었어."
욕을 찰지게 하는 브리아나가 갑자기 멋져 보였다. 보통 욕을 하면 사람이 저속해 보이기 마련인데 이런 상황에서 브리아나의 욕은 마치 숙취를 풀기 위해 해장국을 먹은 듯 시원하게 속풀이를 해주었다.
“와, 브리아나! 너 정말 멋져!”
“나도 알아. 저런 미친년 한두 번이 아니거든. 나도 처음엔 진땀 빼고 울고 그랬어. 이제 딱 보면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쯤은 알아.”
당황해하지 않고 그런 손님을 여유롭게 대하는 재치가 역시 매니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래도 조식권에 숙박비 반값 할인이라니 너무 파격적이진 않았나 싶었다. 하지만 브리아나의 생각은 달랐다.
“이 정도는 큰 손해가 아니야. 형편없는 후기를 달게 되면 그 타격이 더 크게 돌아오지. 그년 입을 막은 건 투자라고 해두자."
브리아나의 생각은 적중했다.
다음날
비스트로에서 일하는 날이라 새벽에 출근했다. 오픈도 하지 않았는데 그 진상이 어제 받은 조식권을 들고 로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스타벅스 커피를 내리러 주방 안으로 들어가니, 셰프가 바깥 상황을 물어왔다.
"어제 스파 얘기 들었지? 오늘 첫 주문은 그년(bitch) 일 거야. 조심해."
하필 브리아나가 출근하지 않는 주말인데 혹시라도 그 여자가 또 시비라도 걸까 봐 우리 모두는 각별히 긴장하고 있었다.
돈의 힘
의외로 그녀는 주문할 때 매우 부드럽고 상냥했으며, 심지어 팁도 후했다. 여유 있게 조식을 즐기는 모습 또한 여느 손님과 다르지 않았다.
어제 로비로 달려오던 성난 얼굴이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비스트로에 있는 사람들은 본인을 모를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양면의 얼굴을 직접 대해보니 확실히 미국은 뼛속까지 자본주의라는 말이 확 와닿았다. 진상손님도 할인과 무료 조식으로 이렇게 다스릴 수 있다니 말이다.
교수에게 없는 매니저의 재량
진상 손님의 입도 틀어막을 수 있는 호텔 매니저에게는 대학교수가 갖지 못하는 게 있다. 자본주의에서 한방에 통하는 바로 돈,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매니저의 재량이다.
교수인 내가 학생들 앞에서 을이 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학생들이 컴플레인할 때 그렇다. 특히 1점 차이로 목숨 걸고 무식하게 들이대거나, 울면서 때를 쓰는 여학생들은 공포의 대상이다. 겉으로 티는 안내지만 그런 학생이 강의평가에 안 좋게 쓸까 봐 걱정이 되기도 하다.
"에잇, 나도 브리아나처럼 학생이 컴플레인하면 그냥 확 A를 줘버리고 입을 막아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
브리아나는 핫 텁 구멍이 정말 그렇게 컴플레인을 할 정도로 지저분했는지 확인조차도 하지 않았다. 손님이랑 실랑이를 벌이기도 전에 화끈하게 손님의 화를 다스렸다.
리더십
브리아나는 손님이 사라진 후 하우스키퍼인 나를 보며 말했다.
"절대 네 잘못이 아니야. 하우스키퍼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나는 다 알아. 신경 쓰지 말고 지금처럼만 해."
이런 감동이 들어간 리더십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니다. 브리아나가 고백했듯이 매니저를 처음 맡은 해에는 많이도 울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화를 누르고 억울한 눈물을 흘렸을까. 지금의 브리아나를 보면 그 시련과 눈물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냥
브리아나가 매니저라는 타이틀을 그냥 얻은 게 아니듯, 무슨 일이던 처음부터 그냥 잘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 무엇인가 잘 안 돼서 힘들다면,
그래서 포기하고 싶다면,
혹시 내가 그냥 잘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냥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냥이란 없다.
* 이 글은 <나에게 솔직해질 용기>에 담긴 에세이의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