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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언니 Dec 28. 2023

가짜웃음 #1-2

#1-2



#1-2


얼마나 지났을까 그 남자는 잠이 들었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갈 곳 없던 나는 결국 기숙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야, 어디 갔다 온 거야. 한참 찾았잖아. 아니 또 왜 홀딱 젖었데.”

룸메이트가 아무리 소리쳐도 난 여전히 깊은 물속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녀는 모를 것이다. 지금 자기의 말은 내 귀에 웅얼거리기만 할 뿐이라는 것을.

“....... 미안. 나 졸려. 조금만.. 조금만 누워있을게.”

깨끗해진 이불 위로 내 더러운 몸을 뉘어본다. 곧 이불도 더러워지겠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애쓴다 한들 나는 또다시 더럽혀지겠지. 그냥 이 상태로 잠이 들어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시공간을 구분할 수 없는 꿈을 꿨다. 측은하게 바라보는 가면을 쓴 사람들 가운데에 나는 하얀색 드레스를 입고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고 누워있다. 내 손에는 언제 묻었는지 모를 피가 굳어 있는 칼이 쥐어져 있다. 왠지 모르지만 저 안의 나는 무척 홀가분하다. 너무 홀가분해서 그런 것일까? 내 몸은 하늘로 위로 점점 떠오르고 있다. 자세히 보니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하염없이 울고 있다. 사람들은 그런 얼굴이라는 것을 아는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그저 가십으로만 여기며 혀를 찰뿐이다.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아침부터 울리는 핸드폰 진동 소리에 눈을 떠보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룸메이트는 내가 아파 보였는지 과사에 대신 말할 테니 오늘 하루 푹 쉬라는 메모를 남겨 놓았다. 그 옆에는 어느새 충전되어 있는 핸드폰이 있었고, 나에게 화를 내듯 진동이 울리고 있다. 액정을 확인해 보니, 엄마였다.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경서야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 엄마 이 사람과 이혼하기로 했어. 너도 이제 다 키웠고 이제는 이 촌구석에서 못살겠다. 어제도 뭘 하고 왔는지 연락도 안 되더니 말도 없고, 더 이상은 의미가 없다. 이혼 서류 법원에 접수했으니까 당분간 집에 오지 마라. 알았지?"

".......... 왜..?... 왜, 이제서 그 말을 하는 건데? 진작........ 그러지 그랬어.  내가 우리끼리 살자고 했었잖아. 그때는 내 말 듣지도 않더니 지금에서야 헤어진다고? 진작 그렇게 말해줬으면 나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왜!!!!!!!! 도대체 왜!!!!!!!!"

"아니, 얘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너마저 왜 이래. 학교생활 힘들어? 무슨 일이야?"

"엄마의 그 사람이... 그 더러운 사람이 나한테 어떻게 했는데!!!!!!!!!! “


 나의 모든 것을 엄마에게 다 풀어냈다. 나와 성이 다른 그 사람이 월경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나에게 했던 더럽고 잔인했던 모든 것들을 토해 내듯이 풀어냈다. 엄마의 부재 속, 나의 지옥 같은 나날들을 잊지 않으려 곱씹고 곱씹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생생한 그날의 아픔들을 말이다. 엄마가 받을 충격 따윈 내 안중에 없었다. 그 충격이라 해봤자 내가 받은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내가 당한 날것의 이야기들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자세하게 얘기했다. 듣는 동안 엄마는 내내 말을 잊지 못하다가도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면서 울부짖음에 가까운 화를 냈다. 그러다가 별안간 전화기 넘어 도망치려는 엄마를 다시 부여잡고, 몇 시간을 내리 말했다. 한참을 숨소리조차 내지 않던 엄마는 그놈을 죽이겠다며 들썩거리다 이내 차분해지더니 당장 이 집구석부터 나가겠다며 전화를 끊었고, 엄마는 그 길로 그 사람을 의붓딸 성폭행 범으로 고소했다.


-현재-

 그 사람이 출소하는 날 찾아가 내 몸을 유린한 것처럼 그 사람의 몸을 천천히 그러나 구석구석을 고통스럽게 녹여버리겠다 다짐했다. 간호사의 사명보다는 그 사람에 대한 복수심이 훨씬 컸다. 나는 그럴 자격이 충분했기에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늘은 나에게 그런 복수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희망이 없는 내 삶에 그 복수는 삶의 목표였는데, 그것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니 이 세상을 살아갈 의미가 없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이때까지 버텼는데, 그렇게 평화롭게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 인간에게는 그런 호사조차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평화로운 죽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직접 천천히 죽이고 싶었는데, 천천히 고통스럽게 고통을 쥐어주려고 했다. 내가 당해온 10년의 고통을 그렇게라도 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럴 수 없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내가 죽어야 이 고통이 끝날 것 같다는 생각만이 반복해서 들었다.

'풍덩.' 나는 다시 어두운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잠이 오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습관적으로 일어나 옷을 입고, 터벅터벅 걷다 보니 벌써 지하철 역 근처 골목에 들어서고 있었다. 정신을 겨우 차리고 뻑뻑한 눈을 돌려 시계를 바라보니 이제 겨우 7시 10분이었다. 한숨을 쉬며 돌아서려는 그때였다. 어두컴컴한 골목을 쓸 때 없이 환하게 비춰주는 간판이 거슬린다.

<미소상점>

아침마다 이곳을 빠르게 지나가서 그런 것일까? 처음 보는 간판을 잠을 못 자 무거워진 눈을 굴려가며 살펴보지만 역시나 영 낯설다.

'… 새로 오픈한 곳인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다시 길을 걸으려던 찰나 발에 전단지가 차인다.

"당신의 가면을 만들어드립니다. 미소상점으로 들어오세요."

 고개를 들어 다시 상점의 간판을 바라본다. 나도 모르게 이끌리듯 갑자기 날아든 궁금증에 유리창 가까이 갔을 때였다. "따르릉"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등뒤에서 불어오는 가벼운 바람에 떠밀리듯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미소상점입니다."

갑자기 들려온 친절한 목소리에 경계하듯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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