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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언니 Jan 04. 2024

가짜웃음  #1-3

#1

"어서 오세요. 미소상점입니다."

갑자기 들려온 친절한 목소리에 경계하듯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던 곳을 쳐다보았다.

 안경을 쓴 외모에 헌팅캡을 쓰고 있고, 그 아래로는 적당히 통통한 몸이 뭔가 푸근해 보이는 인상을 주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매일 아침 출퇴근하면서 오며 가며 마주쳤던 사람 갔기도 한 데, 정확히 떠오르진 않지만 영 낯선 얼굴은 아니었다. 얼굴은 웃고 있는 게 분명한데, 눈은 뭔가 슬퍼 보이는 모습이라 더욱 기억에 선명하게 새겨진 듯하다. 엉겁결에 들어와 어리바리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나의 말을 기다리는 듯하다. 분노고 뭐고 어쨌든 정신 차리고 나가야겠다.

"아, 제가 잘 못 들어왔네요. 죄송합니다. 다음에 올게요."

"ㅎㅎ서둘러 나가실 필요 없습니다. 천천히 둘러보세요. 오픈행사로 일주일가량은 미소를 무료로 대여해 드립니다. "

 이게 무슨 소리야. 미소라니. 이거 신종 피라미드 뭐 이런 건가 싶어 얼른 한 발 뒤로 뺀다. 세 발 뒤에 문이 있다. 여차하면 뛰어나갈 것이다.

"네? 미소요?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천천히 둘러보세요. 고객님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감춰지지 않는 감정을 미소로 감춰줄 수 있는 그런 맞춤형 가면을 파는 곳입니다."

 순간 나가려던 발걸음이 멈춰졌다. 처음 보는 이 사람에게 들킬 만큼 나는 아무리 해도 숨겨지지 않는 감정을 들켰나보다. 안된다. 내 얼굴에서 감춰야만 했다. 그래야 사람들 사이에 섞여 아무렇지 않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낼 수 있을 텐데. 혹시나 싶어 다시 돌아섰다. 역시나 나를 보며 웃고 있다. 저 사람도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일까?

"... 저... 제 심경이 얼굴에 티가 날 만큼 보이나요?"

말없이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까의 자애스러운 미소보다는 약간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듯한 표정이다. 처음 보는 이 사람도 이렇게 알아채는데 남한테 관심 많은 병원동료들도 분명 금방 눈치챌 것이다. 그러나 고민된다. 이게 피라미드이거나 신종 마약이라면 어떻게 하지? 근데 주변 사람들에게 내 감정을 들키는 게 더 두렵다. 그래 뭐 어때 싶어 두려운 생각을 거두고 남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그 미소를 대여할 수 있을까요?"


"방법은 간단합니다. 앞에 보인 메뉴판에서 자신이 원하는 미소를 고르시기만 하면 됩니다.

간단히 설명을 드리자면,

① 온화한 미소 - 상대를 배려하고 싶을 쓰는 가면★

② 여유로운 미소 – 화가 나지만 현명해 보이는 가면★★

③ 친절한 미소 - 고객을 대상으로 절대 흔들리지 않는 친절을 주는 가면 ★★

④ 행복한 미소 - 과거로 인해 행복하지 않지만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을 때 쓰는 가면

★★★

 여기서 고르시면 됩니다. 가면을 고르는 순간 12시간 효과를 볼 수 있고, 8시간 후부터 내 피부에 조금씩 흡수되고 안 좋은 감정들과 근심들은 가면과 함께 외부로 증발되면서 함께 사라지게 됩니다. 미소 가면의 부작용은 오후 10시 이후엔 잠이 쏟아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뒤에 보이는 별표는 가격을 의미하게 되는데, 오늘은 오픈행사로 무료로 대여해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밤 약속이 없으시다면 여기서 가면을 골라보세요. 아주 행복한 경험을 하게 되실 겁니다."

 한 참을 듣다 보니 문득 출근시간이 걱정되어 시계를 바라봤다. 아직 7시 12분이었다. 이상하다. 적어도 10분은 지난 것  같은데 겨우 2분 지났다니 아이러니했지만 아직 시간이 얼마 안 지났다는 생각에 메뉴판을 다시 바라봤다. 분명 <행복한 미소> 저 가면이 오늘 나에게 가장 필요했다. 목이 타는 듯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런 나를 사장은 그럴 수 있다는 듯 조용히 그저 기다려줄 뿐이다.


"음... 오픈행사라고 하시니까... 저... 마지막에 있는... <행복한 미소>로 골라 봐도 될까요?"

"그럼요. 아주 현명한 선택입니다. 잠시만요. 얼굴크기 눈 사이 거리, 입 크기 스캔을 위해 여기 앉아서 잠시 눈을 감아 주실 수 있으실까요?"

 남자가 안내한 손을 따라 눈을 돌려 보니 핑크색 푹신한 의자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무화과와 우디향이 섞인 차분한 향을 뿜어내는 아늑한 소파에 앉아 있으니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리면서 얼굴에 모든 근육과 주름이 자연스러워졌다. 웃으려 노력하지 않으니 광대의 근육들은 자연스럽게 풀어졌고, 생각하느라 생긴 미간사이 주름도 펴졌다. 나도 모르게 향기에 취해 눈이 감겼다.

"자, 이제 눈을 뜨시고 3초간 이 앞에 카메라를 보실게요. 1,2,3 네! 되셨습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실게요."

"아.. 네.."

남자는 가고 조명은 반쯤 어두워 졌다. 그러고 보니며칠 잠을 못자 그런가 눈이 무거워진다. 눈을 뜨려 버티고 싶은 생각이 없다. 눈을 감고 좀 더 이 안온함을 느껴도 된다는 생각에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대 본다. 좋다. 이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을 그런 편안함이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다시 지옥불로 끌려간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다.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늘은 그 일로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정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저 멍할 뿐이다. 그냥 포근한 침대에 멍하니 있는 느낌이랄까?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건지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 알 수 없는 아늑 함에 적응할 때쯤 남자가 나를 부른다. 조금 더 기대고 싶은 생각에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손님 이제 나오시면 됩니다."

"아... 네."

포근했던 소파를 뒤로하고 일어나려니 영 아쉬워 한 번 더 뒤를 돌아본다. 소파는 아직 내가 앉아있던 모습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마치 모든 아픔을 이 소파가 흡수한 것처럼 푹 꺼져있다. 그래서일까 뭔가 발걸음이 가벼워진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나도 참 웃기다. 처음으로 들어온 이 가게에 이렇게 마음을 놓고 쉬고 있을 수 있다니 우스운 생각이 든다. 그동안 마음이 편안했던 적이 없어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제 써보시겠어요? 이쪽으로 얼굴을 갖다 대시면 가면이 얼굴에 흡착될 거예요 착 감기는 느낌이 처음엔 좀 낯설 수 있지만 금방 적응되실 거예요."

 반짝반짝 투명하게 빛나는 것이 절로 눈을 뜨이게 했다. 투명한 시트 위에 보일 듯 말듯한 금사로 이루어진 입체적인 가면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거부감이 조금들어 조금 망설여졌지만 어차피 오늘일이 자체가 늘상 있는 일이 아니기에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곧, 얼굴을 갖다 대니 차갑고 얇은 가면이 얼굴에 착 붙는 느낌이 들며 흡착되었다. 남자가 말한 느낌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자, 거울 한 번 보세요."

거울 속 나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 조차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억지로 짜내듯 웃지 않는 자연스러운 미소가 동그란 거울 안에서 빛나고 있었다. 이게 정말 내 얼굴이 맞나 싶은 생각에 손으로 내 얼굴을 더듬어 본다. 밤새 잠을 못 자 푸석하던 10분저의 내 얼굴이 아니었다. 눈밑의 그림자도 거칠게 일어난 입술도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어때요? 만족스러우신가요? ㅎㅎ 부작용 기억하시죠? 잊지 마시고, 그 시간엔 집에 계셔야 합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상점에서 나와 손목시계를 바라보니 이제 겨우 7시 20분을 지나고 있다. 상당히 오래 있었던 것 같은데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들어 발걸음을 바쁘게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쇼윈도에 비치는 내 실루엣이 오늘따라 당당하고 빛나 보였다. 아마도 플라세보 효과 같은 기분 탓이겠지. 짧은 순간에 많은 것들을 경험해서 그런 건지 꿈을 꾼듯하기도 하고 뭐에 홀린 것 같기도 하다. 얼른 걸음을 재촉하며 사람으로 가득 찬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사람들에게 몸이 치이면서 내 존재를 확인받는 것에 익숙해서일까 오늘 아침까지 꼭꼭 묻어 두었던 나를 괴롭히던 10년간의 악몽 같은 일 들을 잠시나마 잊게 되었다. 하루 종일 떠오르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정말 다행이다 싶은 안도감이 들었다.

"경서선생님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ㅎㅎ 근데 화장품 바꿨어요? 오늘 얼굴이 너무 좋은데?"

"네? ㅎㅎ아니에요. 에이 또 저 좋으라고 칭찬해 주신다. ㅎㅎ 감사해요."

"아니야. 오늘은 평소랑 좀 달라. 뭔가 사람이 빛난다고 했나? 나 몰래 시술받은 거 아냐?"

"아니에요 ㅎㅎㅎ 커피 사라고 칭찬하시는 거죠 ㅎㅎ 뭐 드시고 싶으세요?ㅎㅎ"

 정말, 미소 가면 때문인가? 아무리 웃어도 얼굴색 좋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는데, 오늘따라 동료들도 환자들도 유독 분위기가 밝다면서 달라졌다고 한다. 심지어 과한 웃음이 아니라 차분한 미소에 분위기 있어 보인다고 무뚝뚝한 원장님까지 알은 채 하였다. 정말인가 싶어 거울을 확인해 보니 나 역시도 놀랄 만큼 내 모습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12년 전 아무런 사건, 사고도 당한 적 없던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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