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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여름 Oct 09. 2024

단절 속 연결

결국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

하와이에 일하러 간 게 아니라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취직했다. 나는 미뤄왔던 임신을 준비했고 그동안 공부한 부동산 지식을 동원해 내집마련에 뛰어들었다. 그 해 우리는 첫 집을 분양받았고 이듬해 건강한 아기가 찾아왔다.


시나리오 라이터의 장점은 프리랜서로 작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임신 중에도 건강상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일을 이어가려는 생각으로 프리랜서 이력서를 오픈했고 들어오는 일들을 하며 임신기를 보냈다. 임신 7개월 차에는 중견 기업의 자회사였던 소규모 회사의 시나리오 파트장 포지션을 제안받았다. 임신부임을 밝혔지만 회사 상황상 나의 이력이 필요하다며 출산 한 달 전까지 일해 준다면 3개월의 출산 전후 휴가와 육아휴직을 지원하겠다고 나를 설득했다.


회사는 남편의 회사 인근에 있어서 함께 출퇴근할 수 있었고 주 3일 근무에 이틀은 재택근무라는 파격적인 근무 조건에 급여 조건도 괜찮았다. 건강한 임신부였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오퍼를 받아들여 3개월간 IP 게임을 모바일 화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주어진 일은 허들이 높았다. 나는 주 2회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이 회사의 모회사였던 IP 홀더에게, 모바일 프로젝트에 쓰일 시나리오를 검수받아야 했다. IP 홀더와 자회사, 세 명의 대표와 IP 시나리오팀 사이에서 나의 시나리오를 설득해야 했다. 출근하는 날이면 회의가 길어져 어김없이 야근으로 이어졌지만, 임신부의 특혜였을까, 그 회사에서는 여타 다른 회사에 비해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가 덜한 편이었다. 회의나 발표할 때는 태동이 더 강했지만 힘찬 태동마저 엄마의 활동에 대한 건강한 반응으로 여겼다. 3주간 회의 끝에 시나리오 안을 승인받았고 3개월에 걸쳐 작업을 마쳤다.


그즈음 메르스가 퍼졌다. 내가 진료 중이던 병원에도 메르스 감염자가 나왔다. 남편은 하와이에서 사귄 일본 친구의 집으로 피신할 것을 권했으나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가족이 함께 있는 곳이 내겐 가장 안온한 안식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막달이 되었고 회사는 약속대로 출산 휴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나는 28시간 산통 끝에 건강한 아이를 출산했다. 이후 회사의 배려로 출산 휴가에 이어 몇 개월간 육아휴직을 사용했다. 아기가 만 3세가 되기까지는 직접 기르겠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복직할 생각은 없었다. 약속대로 일정 기간 육아휴직을 사용했고 퇴사했다. 이후 육아와 병행하기에 무리 없는 선에 외주를 맡아 내 경력을 점선으로 이어갔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아이를 보는 기쁨은 비할 바 없는 행복이었지만 육아와 살림이 적성에 잘 맞는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흔한 엄마 커뮤니티 같은 관계가 나에게는 없었고 그런 관계를 맺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다.

아이가 만 25개월쯤 되었을 때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했다. 아기와 분리된 시간 동안 엄마가 아닌 한 사람 서여름의 모습을 복구해 갔다. 요가를 하며 출산 후 불어나 버린 체중을 줄였고 나를 위한 옷을 몇 벌 샀다. 십 년 만에 친구랑 둘이 부산을 여행했고 그 자유로움에 다시 ‘나’로 살고 싶어졌다. 간헐적 단식과 방탄 커피를 마시며 몸과 뇌를 맑게 했다. 그렇게, 재취업을 준비했다.


첫 지원 회사는, 허들이 높기로 유명한 대기업이었다. 임신 중 다녔던 회사와 프리랜서 계약직이 인정되어 서류 통과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육아 기간을 보내며 직장인의 언어와 용어를 거의 잊었다는 것이다. 출산과 회복을 경험한 여성이라면, 그 시기 감정 변화뿐 아니라 신체 변화, 지능과 생각의 변화까지 자신에게 얼마나 큰 변화가 있었는지 기억할 것이다. 나는 임신기와 육아기 프리랜서로 일을 이어왔지만, 아기를 키우는 3년간 홀로 육아하면서, 어른의 말을 거의 잊은 상태였다. 특히 업무 용어와 문서 작성, 발표 등의 기획영역은 뇌 공간 저편 어딘가 창고에 완전히 묻어 둔 상태였다. 면접 준비를 하며 돌아올 것 같지 않던 뇌 속 업무 라인을 빠르게 복구했다.


인맥 없이는 들어가기 힘들다는 허들 높은 대기업은 면접 과정도 상당히 까다로웠다. 실무 면접, 심층 면접에 이어 인사팀 면접까지 이어졌고, 한 달이 꼬박 걸린 면접 과정을 무사히 통과했다. 입사일이 결정된 날 밤, 남편은 케이크를 사 와 축하해 주었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아빠의 모습에 덩달아 신난 아이의 모습도 사진으로 남아있다.


육아는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엄마는 아이의 육아와 나의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생업을 접을 결심을 하셨고 전적인 지원을 약속하셨다. 감사함과 죄송함, 그리고 앞으로 잘해보자는 의미로 삼대 모녀는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일정대로라면 여행 중 처우에 대한 메일을 받았어야 했다. 그런데 약속된 날짜가 되어서도 최종 오퍼 메일이 오지 않았고 인사 담당자는 내부 사정상 일정이 연기되었다며 사과 전화를 해왔다. 회사 다른 팀에는 남편이, 해당 팀에는 지난 동료가 재직 중이었다. 나의 채용 과정을 알고 있던 그 팀의 직책자이자, 지난 동료는 남편에게 문제가 생긴 건 아니니 안심해라. 곧 연락이 갈 거다, 고 찾아와 이야기했다고 했다.


제주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나는 얼마 후 채용 취소를 통보받았다. 인사 담당자의 연락 이후 해당 프로젝트 피디에게서 사과 연락도 받았다. 내부 사정상 채용이 취소되었고 정말 죄송하다는 말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져 그 외에 대화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고 이후에 좋은 기회가 있으면 다시 연락 달라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그 사건 이후 나는 한 달여간 잠을 잘 수 없었다. 대응에 대해서도 여러 방면으로 고심했다. 노무사와 상담도 했고 1인 시위를 해볼까 생각도 했다. 그러나 접기로 했다. 나는 보상보다 취업을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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