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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여름 Oct 11. 2024

네, 전 아니에요.

결국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

채용 취소의 충격으로 나는 깊은 대미지를 입었지만 마음을 다시 잡고 다른 회사에 지원서를 내기로 했다. 새로운 회사에 서류를 접수하고 바로 다음 날 면접 제안받았고 합격 후 오퍼까지 빠르게 진행되었다. 회사는 가능한 빠른 입사일을 요구했다. 회사 사정이 매우 바쁜 상황임을 예견할 수 있었고 나 역시 빠른 입사가 가능한 상황이었으니 시간을 지연할 이유가 없었다.


입사 첫날 팀장에게서 동시에 네가지 정도 되는 업무를 부여받았다. 나의 직속 상사이자, 프로젝트 디렉터이기도 했던, 최 팀장은 40대 초반의 기획자였다. 미간에 굵은 주름이 새겨진 그는 늘 화를 머금고 있는 듯보였다. 거친 숨을 곁들인 작고 낮은 목소리로 연신 무거운 긴장감을 만들었다. 프로젝트 성공에 대한 심리적 압박에 쫓기던 그는  일 진행에 대해 조급함을 숨기지 못했다. 줄담배를 달고 살았지만, 담배를 태우는 시간에도 촉각을 다루었다. 그가 짊어진 압박은 고스란히 프로젝트 전체를 조이고 있었다.


나 역시 효율적으로 결함 없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에 강박적인 편이어서, 그의 강렬한 속도를 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숨도 쉴 수 없이 긴장이 가득한 사무실에서 업무에 치여 화장실 타이밍을 놓치는 일이 빈번했다.


오전 내 업무 처리를 하느라 일어나지 못하다 화장실에 갔다. 복도에 서서 창밖을 보고 한숨을 돌리는 데 멀리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팀장의 호출을 받았고 그는 화장실을 왜 이렇게 오래 다녀오느냐고 질책했다. 이어서, 우리 회사에 3개월 수습 기간이 있는 걸 모르나 본데.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후에도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파트장에게 어딜 갔냐고 찾았다고 한다.


파트장은 매사를 그에게 보고했다.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 잠시 담배 좀 피고 오겠다. 십 년을 함께 했다는 그들의 묘한 지배 구조는 조직 전체 분위기에 우울하고 경직된 분위기를 형성했다. 팀에 살아남기 위해 파트장을 모델 삼아 움직여야 함이 피부로 다가왔다.


파트장은 수도권에 분양받은 아파트에 입주하기 위해 일을 쉴 수 없다고 말했다. 자신은 혈당을 조절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업무 시간 내내 과자를 먹었다. 어떤 날에는 두세 봉지를 책상 위에 펼쳐 놓고 먹기도 했는데, 저녁 시간이 다가오고 식사를 하러 가자는 팀원들에게 본인은 생각이 없다, 그보다 00 과자가 생각난다며 부탁했다. 그거 아까 드신 거 아니에요? 그랬더니, 아, 내가 그랬어요?라는 대답을 해왔다. 그는 어쩌면 출구 없는 방에 갇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동시에 시나리오, 배경 설정, 애니메이션 기획, 콘텐츠 기획 등의 업무를 병행했다. 몰아치는 업무에서 주도적으로 일하기 위해 더 기민하게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한편, 팀장의 마음에 들어보려고도 애썼다. 새벽까지 회식 자리를 지켰고 일정보다 더 빨리 업무 보고를 했다. 첫 빌드(게임 내 목표한 콘텐츠를 구현하고 테스트가 가능한 버전으로 만드는 일)는 괜찮은 사내 평가받았고 대표의 칭찬도 있었다.


그러나 최 팀장의 목을 죄는 듯한 습관적 부정어는 변할 기색이 없었다. 그가 만들어내는 긴장을 넘어선 우울감이 나에게도 전염되기 시작했다. 정신이 번쩍 든 것은 사내 테스트 후 기획 회의에서였다. 이전 미팅을 잘 마치고 좋은 분위기로 시작된 회의였는데 최 팀장은 다시 습관적 불평을 시작했다. 이전에 내 포지션에 있던 선임자는 한 번에 다섯 가지 일을 해도 밀리는 것이 없었는데, 서여름은 네 가지 일밖에 주지 않았음에도 완벽히 소화해내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게임 속에 사운드를 넣는 툴을 다루지 못해 해당 업무의 담당자 계획을 변경한 일에 대한 불평이었다. 거기에 빼놓지 않고 우리 회사에는 3개월의 수습 기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얼굴도 모르는 퇴사한 선임자와 비교를 받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얼굴도 모르는 선임자라 비교를 당해도 할 말이 없었던 나는, 지난 야근 식당에서 했던 동료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나와 전혀 다른 일을 했었고 그 사람이 이곳을 떠난 이유가 무엇이었겠느냐고.


나는 팀장에게 “팀장님, 저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모르지만 저 역시 제가 할 수 있는 역량 이상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부분에 대해 피드백 주시는 건 감사히 듣겠습니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분과 비교하는 일은 그만 삼가세요.”


평소 기획팀 내에서 팀킬은 금기요, 배신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그는 기획팀원들 앞에서 직속 부하 직원의 모욕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아 왔던 것이다. 내 말에 적잖이 당황한 최 팀장은 횡설수설한 논리를 앞세워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나는 결국 퇴사를 결정했고 파트장은 만류했다. 자신도 여러 번 팀장으로부터 도망치려고 가방을 쌌지만 결국 다시 돌아왔다고 말했다. 네, 전 아니에요. 속으로 말하며, 잘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로 짧은 인연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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