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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여름 Oct 14. 2024

불편한 게임

결국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

퇴사 후 유명 원작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 게임의 면접 제안을 받았다. 이야기를 중심으로 게임을 개발한다는 점과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회사 중 하나라는 점에서 기대가 되었다. 면접 분위기는 좋았고, 이후 원만한 채용 과정을 거쳐 입사를 결정했다.


입사 후 일주일쯤 지나 회사 대표는 신규 입사자들과 대담 시간을 가졌다. 회의실에서 시작해 점심시간으로 이어진 그 자리에서, 대표는 회사 소개와 개인적인 이야기, 특히 사업가로서의 고민을 직원들에게 공유했다. 형식적일 수 있었던 그 자리에서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회사 대표가 바쁜 시간을 할애해 그런 자리를 마련한 데에는 단순히 형식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말했다. "하루에도 수천억이 오가는 이 사업에서 돈은 나에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대표로서의 책임감과 무게감은 저를 수십 번 자살 충동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이어 "회사에는 늘 '암' 같은 문제가 존재합니다. 대표 자리에 앉으면 모두가 아는 걸 본인만 모르는 경우도 많고, 알아도 도려낼 수 없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그럴 때마다 외로움을 느낍니다."라고 덧붙였다. 대기업 자회사 대표로서 느껴지는 외로움과 정치적 위협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의 말은 생각보다 빠르게 내 일상에 가시적으로 다가왔다.회사 리더 중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일부였고 다수는 정치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내가 참여한 프로젝트에는 강력한 IP 홀더가 있었고, 모든 일은 IP와의 논의를 통해 추진이 가능했다. 원작이 있는 게임은 많지만, 원작자와 개발사 간의 관계, 계약 상황, 원작자의 성향에 따라 IP 홀더의 개입 여부와 정도는 달라진다. 동료 시나리오 라이터는 IP의 개입이 없을수록 자유롭게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원작의 의도를 가장 잘 아는 원작자가 게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원작의 팬들은 게임에서 원작의 구현을 기대할 것이고, 이를 통해 더 강력한 팬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작자와 개발팀 간의 소통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팀의 리더들은 IP 홀더와의 신경전으로 몇 개월간 일을 진행하지 못했다. 한편, 회사는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여러 사람을 동시에 채용해 갈등을 조장하고 정치적 줄 세우기를 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는 고스란히 실무자들의 자질 문제로 둔갑해 그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


정치 게임과 그들의 노선에는 관심이 없었던 나는 시나리오 담당자로서 내 일을 잘해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연일 야근을 하며 파트원들과 협력해 IP 홀더를 설득할 시나리오를 만들어냈고, 미팅을 통해 IP 홀더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팀의 주요 정치가 중 하나였던 팀장은 IP 홀더와 합의를 이룬 후에도 진행을 보류했다. 그 이유는 신규 입사자였던, 자신이 발령한 시나리오 파트장이 주도한, 기본 구성안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새 파트장은 끝내 일을 정리하지 못했고, IP 홀더마저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러한 내부 정치 게임은 결국 아무런 결과도 만들지 못한 채 정체되었다.


이후 프로젝트는 계속 난항을 겪었다. IP 홀더 측에서는 미팅 후 결정 사항이 반영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내부에서는 팀 내 협업으로 만들어진 시나리오가 팀장에 의해 거부된 상황이었다.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팀 내 인력의 자질이 문제라는 평가가 나왔고, 프로젝트는 대혼란에 빠졌다. 진전이 없자 회사는 지속적으로 프로젝트 책임자를 교체했다. 나는 대표가 말했던 '암적인 존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본질적으로 정치적이지 못한 나는 상황에 따라 아군과 적군을 나눠야 하는 직장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IP 홀더와의 관계에서 힘겨루기를 하던 팀장의 편에 서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직장 생활 중 처음으로 업무 평가에서 D를 받았고, 인사팀과의 면담을 통해 사실상 권고사직에 가까운 피드백을 들었다. 결국 나는 자진 퇴사를 결정했다.


퇴사일은 최대한 빠르게 정했다. 퇴사 전, 팀의 소속자로서 업무 일지와 히스토리를 정리해 인사 면담자였던 본부장에게 전달했다. 본부장은 재면담을 통해 책임을 통감한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타 부서로 이동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직장에서 살아남기에 결함이 있다는 걸 알았다. 정당하지 못한 사내 정치에 질렸지만, 그것이 어쩌면 나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경력이 거듭될수록 정치의 폭풍을 타거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안전한 곳에서 숨만 쉬고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내가 과연 언제까지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을까? 평생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그때부터 진정한 나의 일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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