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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여름 Oct 18. 2024

소진과 붕괴

결국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



삶의 가치관에 따라 집을 짓기로 선택했지만, 현실은 심각한 재정 위기에 처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재정 위기를 막기 위해 일을 구하거나, 집 계획을 전면 수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입사 제안을 받게 되었다.


직장으로의 복귀를 다시는 생각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는데, 갑작스러운 연락은 우리에게 한 줄기 희망이 되었다. 당시 우리에게는 자금 조달이 너무나 중요했고, 특히 상장 회사의 직장인이라는 대출이 가능한 포지션은 절실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회사에 나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영혼을 갉아먹는 일정이 시작됐다. 새벽이면 집짓기 현장에 가서 공사를 검수하고 미팅에 참여한 뒤, 강남까지 왕복 서너 시간을 운전하며 출퇴근했다. 가장 중요한 일이었던 엄마로서의 역할은 친정엄마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밖에 없었다. 늦은 퇴근 때문에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없었고, 아이는 평일에 외가에서 지냈다. 주말에 아이를 집에 데려오면 할머니와 떨어지기 싫다며 울었고, 월요일 아침에는 집에서 떠나기 싫어 울었다. 남편과도 공사 검수와 시공비 문제로 이삼일이 멀다고 다투었다. 행복을 위해 시작한 집 짓기가 결국 가족의 큰 불화를 야기했다.


회사에서 나는 한 파트를 맡은 리더였고, 조직장과는 오랜 동료이자 (그의 표현으로는) 친구였다. 업무는 당연히 잘해야 했고, 지인을 통해 입사한 만큼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업무적 입장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조직장의 추천으로 입사한 만큼 그의 편에 서서 일을 도와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리더로서 내 의견이 필요한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그 의견은 때때로 조직장 생각에 반하는 것이었고 다른 리더들과 협력적인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직장은 나에게 전적인 협조를 원했고, 그런 이유로 회의에서 내 의견을 말하기 어려웠다. 동료들은 그런 나에게 벽을 세웠다.


경제적인 이유로 직장에 다시 나가게 되었지만, 스스로 이 일에 의미를 찾지 못하면 이전 회사와 같은 이유로 오래 지속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시 시작한 일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았기에 난관을 헤쳐 나갈 의지도 없었다.


결국 결심했다. 끝이 있을 이 과정(집 짓기와 자금 문제 해결)이 마무리되면 지금의 생태계를 정리하고, 미약하더라도 새벽을 깨우며 진짜 내 일을 시작하겠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알아야 했다. 그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주말 과정의 대학원에 진학했다. 당시의 진학 결정은 이기적이고 철없는 행동으로 비쳤지만, 나에게는 그곳이 안식처였다. 남편은 아이와 사이가 좋았고 주말에 자신이 함께 있으면 된다며 말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툼이 있을 때면 꼭 대학원 이야기를 꺼내며 불평과 질책을 했다. 사람은 세 가지 일만 해도 삶의 균형이 흔들리기 마련인데, 집 짓기와 직장 생활로 엄마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해내지 못하는 내가, 갑자기 학교에 다니며 주말을 보내니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 그 시간은 유일하게 나를 돌보는 시간이었다.


그런 와중에 육체적, 정신적 건강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출근길에 매일 아침 나는 '괜찮아, 할 수 있어, 이 문제는 곧 해결될 거야'라고 읊조리곤 했다. 퇴근길에는 강남대로의 교통 체증 속에서 수십 번 한숨을 내쉬며 부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러나 결국 버티지 못했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위태롭게 유지되던 현실은 결국 붕괴되고 말았다.


번아웃이 오기 6개월 전, 회의 중 공황 증세를 겪었다. 갑자기 몸이 움직이지 않았고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회의가 끝난 후에도 30분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응급실에 갔고, 수액을 맞았다. 갑작스러운 뇌 혈류 증가로 신경에 급성 마비가 왔을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정밀 검사를 원하면 접수하라고 했지만, 종합병원 진료를 이어갈 여유가 없었다.


그 이후 회의에 들어가면 30분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특별히 회의가 많은 팀이었고, 직책상 회의에 참여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조직장, 즉 나를 채용한 지인과의 관계였다. 그는 나에게 절대적인 협조와 정신적 지지를 원했지만, 나는 그의 지시를 이행할 뿐, 진심을 담아 따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려고 애썼다. 그사이 나도 모르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조직장은 동료들과의 관계와 태도에 대해 연속적으로 부정적인 피드백을 했다. 나는 더 이상 역할을 해낼 자신이 없었고 직책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곳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에게는 현실을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그래서 우회를 선택했다. 한 달간의 휴직과 부서 이동을 신청하고 휴가를 썼다. 휴직 이전의 한 달여간은 회의실에서 10분도 버티기 어려운 상태였다.


휴직이 시작되었을 때 나의 정신과 육체는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내게 주어진 휴직 기간은 길지 않았고, 빠른 시간 안에 회복해야 했다. 체력과 정신력을 기르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지만, 전혀 기운이 나지 않았다. 식은땀이 계속 나고, 먹지 않아도 식욕이 없었다.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해 일주일 동안 매일 토마토 한 알만 먹었다. 일주일 만에 체중이 약 5킬로그램 줄었다.


며칠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잠자리에 들면 갑자기 숨이 가빠지고, 이러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남편에게 나의 상태를 알렸고, 우리는 응급 진료가 가능한 병원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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