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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 Apr 03. 2023

 기다림

너의 이름은 회류



설마 또 왔을까, 혹시 있을지도 몰라, 없을 거야, 없어도 돼, 있으면 좋겠다에서 베란다 문을 여니 빼꼼히 얼굴을 들이민다. 그리고 야옹.     


그래 왔구나. 누군가를 이토록 반가워한 적이 얼마만이었던가. 약속하지 않았고 다시 온다 하지 않아서 더 반가웠을까.     




옆에 뭔가가 있길래 자세히 보니 문 앞에 죽은 쥐를 물어놨다. 사냥을 한 모양이다. 머리가 반쯤 날아간 생쥐는 눈을 뜬 채로 죽었다. 우리의 주말 아침을 놀라움과 신기함으로 깨운 고양이.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사냥감을 보여주는 것이 고양이에게는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한다. 자신의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의도가 있고, 또한 감사의 마음? 같은 표현을 한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

먹을 것을 두어 번 주고 잠자리를 봐준 것이 감사까지 받을 행동이었다니 이쪽이 더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다.  황송한 고양이의 칭찬보다 고양이라는 그저 한낱 동물이 감사라는 대단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 그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로 들렸지만 잡은 쥐 옆에서 의기양양한 긴 꼬리를 힘차게 흔들며 위풍당당했던 그 표정만은 사실이었다.           


         

일정한 시간에 찾아와 배를 채우고 돌아서는 고양이를 보면서 나는 어느 날부터 다음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름을 지었다. 돌아올 회, 흐를 류 또는 버드나무 류. 나비라던가 좀 더 고양이다운 이름을 지을 수도 있지만 일부러 거창하고 어려운 이름을 주었다. 이름은 원래 희망이니까. 소망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삶이니까. 이름만큼은 가장 소망하는 것으로 지어주고 싶었다. 사람처럼. 원뜻은 돌아서 흘러가다는 뜻이지만 길고양이 특성상 시간이 흘러도 다시 돌아오라는 의미와 원하는 대로 흘러가라는 이중적인 의미로 회류라고 부르기로 했다. 마치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대리만족하듯 원하는 대로 어디든 오가며 자유롭게 살기를 바랐다.   또한 아들이 좋아하는 버드나무가 암컷의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버드나무처럼 자유롭게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며 마음대로 살아라, 회류야.



한번 나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회류를 하루종일 기다렸다. 몇 번씩이나 먹이통이 비었나, 그새 왔다 간 것은 아닐까,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고양이집을 이제 내가 기웃거렸다. 그 조그만 것에 마음을 주고 속을 끓이는  내가 한심하기도 하고 내 속을 태우며 오히려 나를 이용한다는 생각에 그 작은 것이 얄밉기만 했다.     



배고플 때는 애처롭게, 기분이 좋거나 만족할 때는 몸을 슬쩍 기대며 지나가면서 꼬리와 몸을 사람의 다리에 스르르 모른 척 갖다 대며 한번 휘감듯 스쳐 지나간다. 관심이 없는 척하며 사람의 관심을 끈다. 만져주면 가르랑 하면서 애교를 부리고 몸을 기대며 사랑받고, 가고 싶을 때면 뒤도 안 보고 쌩하니 떠나서는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배고프면 나타나서 눈치를 보며 불쌍한 척을 한다. 


생명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기적인 유전자가 전부인 듯 그것만이 작동한다. 경쟁적인 적자생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당연한 자연의 순리나 이치인지 모른다.  갓 태어난 아기의 이기심을 보라.  오직 먹고 자고 자신의 필요만을 위해 생존한다. 배려나 이해는 생존과는 무관한 도덕이다. 그러한 아기의 이기심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고양이 같다.  오직 자신의 필요에 의해 사람을 가까이한다. 먹을 것을 주는 주인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는다. 먹을 것에 영혼을 팔지 않고 아무리 먹이를 주고 돌보아주는 주인이라도 내키지 않으며 털끝하나 만지지 못하게 바로 발톱을 세우고 앞발을 들고 내젓는다. 같이 놀고 싶어 하는 주인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인간의 사회성은 때로는 자신의 욕구보다  관심과 배려라는 타인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처럼 여겨진다. 사람은 원래 혼자서는 살 수 없어 사람과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고 살기 위해 어울렸지만 그것이 오히려 죽을 만큼 괴롭게도 하는 모순을 짊어지고 살기도 한다.  그래서 고양이의 이기적인 독단성이 오히려 주체적이고 카리스마를 가진 고고한 인간이 마땅히 지녀야 할 품위 같은 매력이 된다. 고양이의 숨기지 않는 이기심 앞에서 타인을 위한 배려와 희생을 위해 당연히 감춰져야 했던 나의 이기심이 얼마나 위선이었는지 알게 된다. 당당히 밝히지 못하는 나의 이기심은 언제나 수치심이 되었다. 

 

좋게 말하면 자유, 쉽게 말하면 제멋대로인 고양이의 태도를 인간은 부러워하는 것 같다. 자신이 갖지 못했기에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하기에 고양이를 보며 그런 가련한 자신을 위로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고양이의 이기심을 알면서도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 고양이인 것이다. 개처럼 착하고 주인의 사랑을 갈구하는 순둥이가 아니라 주인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나쁜 사랑을 하는 고양이의 매력에 나는 점점 빠지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동네마다 길고양이는 있었다. 골목의 귀퉁이나 구석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는 고양이와 마주치면 절대 눈을 먼저 피하지 않고 사람을 빤히 끝까지 쳐다보고 있는 고양이의 올라간 눈꼬리가 좀 많이 무서웠다. 덩치가 큰 것들은 가까이 가도 ‘여긴 내 자리!’라는 분위기로 먼저 피하지도 않고 ‘네가 피해가~’ 하는 듯이 모른 척하고 꼼짝도 않는 그 거만함.  살갑지 않은 그 쌀쌀맞음이 얄미워 도통 정이 가지 않는 짐승이라 나는 고양이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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