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동안 마당에 살던 고양이는 마당이 시시해졌는지 베란다 문만 열리면 한 발을 안으로 넣으려는 시도를 한다. 들어오고 싶어 자꾸만 들여다본다. 길고양이는 한 장소에 오래 있지 않는다. 자신을 노출하지 않으려는 의도 같기도 한데 며칠 간격으로 잠자리며 생활공간을 몇 군데를 정하고 회전식으로 돌아가며 바꾸는 것 같다. 바깥에서 살던 고양이를 집안으로 들이는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므로 고양이와의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유리문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눈빛이 점점 불쌍해질수록 들어오지 못하게 해서 미안한 마음은 점점 커진다.
며칠간의 태풍으로 밤낮으로 비바람이 몰아쳤다. 스티로폼 박스 안에 계속 있는 것도 답답한지 집 위로 올라가서 또 한참을 앉아 있는다. 바람 때문에 비가 옆으로 오는데도 부들부들 떨며 박스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밤이 되니 번개까지 치고 바람은 돌풍급으로 바뀌었다. 다음날 또다시 예보된 태풍에 결국 우리는 거실 문을 열어주었다. 거실로 공간을 한정한다는 조건으로. 예상외로 집안에 들어온 마당냥이는 이제 되었다는 듯이 집안을 돌아다니지 않고 거실 바닥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예전부터 여기 살았던 것처럼 주인인 듯 꼬리까지 흔들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람 아기도 아닌데 고양이를 위한 물건들이 별 것이 다 있었다. 고양이용 변기통이며 계획에도 없던 참치캔이며 간식, 장난감 같은 것을 샀다. 배변용 모래도 여러 종류가 있다니 내가 모르는 다른 세상이다. 모든 것은 다 있었지만 내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관심이 없으면 눈도 멀고 만다.
사각사각 사료를 먹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졌는데 아마도 이 마음 때문에 사람들이 말 못 하는 동물들에게 그토록 정성을 들이는가 싶었다. 나로 인해 누군가가 필요한 것을 얻고 나로 인해 누군가가 살게 되는 것을 보면서 사람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도와주고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하는 존재. 그것으로 자신이 행복해지는 존재.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사는 힘이 생기는 존재가 사람이었다.
배를 채우고 편안한 생존을 누리고 있는 고양이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있는 내가 바로 캣맘이 되고 있었다.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캣맘을 욕했던 나인데 길고양이의 눈을 보고 달라진 내가, 또 다른 누군가의 눈에는 한심해 보일 것이다. 예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짐승에게 줄 정성을 사람에게 쏟지 못하고 쯧쯧. 그러나 그 짐승을 돌보는 이에게는 그 짐승이 이미 사람인 것을 몰랐다.
역시 정해진 좁은 화장실에서의 배변은 길고양이에게는 배우고 싶지 않은 구속이겠지. 새벽마다 문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애처로운 눈빛과 울음을 우는 녀석에게 문을 열어주고 만다. 그리고 몇 시간 후에 다시 돌아와서는 아침밥을 먹고 쉬었다가 문을 열어주고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의 즐거움을 돌려주었다.
들어왔더니 또 나가고 싶고 나가 있으면 들어오고 싶고 이제 들락거릴 일만 남았다. 집안은 고양이에게는 새로운 놀이터나 식당, 잠자는 곳 정도의 공간이 되었는지 주생활은 마당과 집 앞이다. 자신의 필요에 따라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시계를 보고 움직이는 듯 대략 정확히 시간이 맞는 것이 신기했다. 생명들은 원래 자신의 몸 안에 자신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가 보다.
사람을 따라오는 길고양이는 삶의 의지나 욕구가 그렇지 않은 고양이보다 뛰어나서 더 영물이라고 한다. 비참한 길 위의 삶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돌볼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영리하다고 해야 할까 영악하다고 해야 할까. 지금 내 옆에 있는 회류를 보면서 길고양이는 생존의 본능으로 살기 위해 우리를 선택했고 자신이 받을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알아보기라도 한 듯 우리에게 온 것이 이미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신비로운 생각이 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