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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 Apr 13. 2023

길 위의 잠

부러움인가 연민인가





오래전 중학교 2학년 남학생에게 영어과외를 한 적이 있었다. 일주일에 두어 번 방과 후에 우리 집으로 와서 공부를 하던 그 아이는 항상 마음껏 놀지 못하고 정해진 시간에 엄마의 강요로 나와 만나는 것이 늘 불만이었지만 그래도 약속을 어기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시간을 맞추어 나타났다. 학원이 많이 없었고 인터넷도 제대로 안되던 때라 방과 후에 남학생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축구나 농구 같은 운동을 하는 것이 하루의 제일 큰 낙이었다. 그런 작은 즐거움을 나에게 빼앗긴 그는 우리 집으로 오는 길에 동네 마트 앞에 항상 엎드려 자고 있는 한 마리 개가 세상에서 제일 부럽다며 내게 신세한탄을 하곤 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면 꼭 그 개로 태어날 것이라는 다짐으로 위안 삼으며  긴 불평과 넋두리를 마무리했다.  원하지 않는 계획대로 끌려다니는 자신에 비해 볼 때마다 엎드려 자고 있는 개가 세상에서 제일 편해 보인다고 하면서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그때 나는, 인간보다 못한 한낱 미물인 짐승을 부러워하는 철부지 녀석을 혼내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과 자존심,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행복이 있다 등등 일장훈계했다.  물론 녀석은 나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지만.      

 

그러나 어리석은 것은 나였을까. 삶의 굽이굽이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떠안아야 했고 인간임으로 인해 피할 수 없었던 무력감과 좌절이 또한 나를 더욱더 인간이게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그제야 나는 그 아이의 말에 깊이 동감했다. 그때의 그 개가 누린 것이 진정한 행복이었던 것은 아닐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삶에 부대낄 때 아무것도 하지 않던 그 개가 떠올랐다.  


    




낮에는 집 주변의 순찰을 돌고 마당에서 어슬렁대다가 저녁 즈음에 집 안으로 들어와서 초저녁의 꿀잠으로 하루를 끝내는 회류는 배를 드러내고 때로는 사람처럼 '대 자'로 누워 자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도 그렇지, '대 자'라니. 편해도 너무 편한 거 아니야?  이제 우리가 너무 편해진 건가.  상대의 지나친 긴장감 없는 행동은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인간관계의 법칙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는 고양이의 자는 모습이 단지 너무 편안해 보여서 예의라던가 그런 인간의 규범이 순간 약간 우습게 여겨졌다.


처음 만났을 때의 긴장에 비하면 천국의 잠을 자는 호사를 누린다.     


나는 개든 고양이든 길 위의 야생동물에게 관심이 없었다.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이 있을 것이므로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내 곁에서 편안하게 잠이 든 회류를 보면 이렇게 편하게 잘 수 있는데 길에서는 절대 벌러덩 눕지 못하고,  길바닥에 엎드려 눈을 감고 있지만 온몸의  털로 보이지 않는 위험을 다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길을 떠도는 동물들에게 인간은 구원자가 될 수 없다. 동물들도 그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지금 내가 느끼는 이런 마음을 가지기를,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동물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자신만을 생각했던 인간이었던 내가 인간이 아닌 생명에게도 마음이 있음을 알게 된 것처럼. 



이제는 길을 걷다 어느 그늘아래에서 엎드려서 잠을 청하고 있는 개나 고양이를 보면 부러움보다 연민을 느낀다.  어쩌면 인간보다 더 한 치 앞을 모르는 삶이기에 잠깐의 잠을 가장 편하게 자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장 현재에 충실한 말 못 하는 동물들이 사실은 삶의 정답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마흔 고개에 가까이 갈 그 아이도 길 위의 개나 고양이가 더 이상 부럽지 않고 가엾은 마음이 드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리라 가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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